49살에 미국 공립학교 새내기 교사가 된 한국 경단녀 이야기
재미교포 경단녀
나는 미국 보스턴 지역 공립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 이주민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교사다. 나이 49살에 처음 미국에서 공립학교 교사로 일을 시작했다. 올해 7년째 미국 공립학교 교사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7년 차 초임 교사다. 매일 첫 교단에 서는 마음으로 출근한다. 매일 아침 설레는 가슴으로 아이들을 만난다. 나의 교실이, 나의 가르침이 이 아이들이 배우고 성장하는 통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나이 49살에 미국 학교 교사로 새로운 출발을 했다. 나이 49살이라면 보통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나이다. 커리어를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늦은 나이로 여길 수 있다. 나는 남들이 은퇴를 준비하는 나이에 나의 커리어를 새롭게 시작한 셈이다. 그것도 타국인 미국에서 말이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한국인이 미국 공립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는 사실이 조금은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다. 49살 한국 아줌마가 미국 공립학교에서 어떻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을까? 내가 미국에서 공립학교 영어교사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소개해 보겠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오고 인생은 예기치 않게 전개된다. 나도 내가 미국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되리라고는 7년 전인 2014년 6월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상상도 계획도 하지 못했다. 인생은 예측불허다. 내 계획과 상관없이 전개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 가운데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 인생의 새로운 길을 열기도 한다.
미국 공립학교 교사가 되기 전까지 몇 가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인생의 쓴 맛과 좌절을 맛보았다. 지금은 10년이 넘은 일이어서 담담하게 회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아린 가슴을 잡고 매일 아침 일어나야 하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나는 소위 경력단절녀였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15년 정도 하고 미국에 왔다. 미국에서 전문직을 갖고 싶었다. 하버드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보스턴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시간 강사직이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비정규직 강사직은 불안정하다. 대학 시간강사직은 처우나 지위면에서 열악했다. 적은 임금에 상사의 갑질에 시달려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내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한국어 강사직을 그만두었다.
안정적인 전문직을 구하기 위해서, 박사학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박사학위 취득 후 대학에서 안정적으로 강의하고 싶었다.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밤잠 줄여가며 고3 수험생 이상의 강도로 공부에만 전념했다. 몸을 너무 혹사시킨 탓인지 건강에 무리가 왔다. 추간판 협착증이 심해져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학업은커녕 일상생활을 유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한학기도 마치지 못 한 채 박사과정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치료에 집중했다.
안정과 휴식을 취하자, 건강이 회복되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읽고 쓰고 해야 하는 박사생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추간판 협착증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최우선 순위는 단연코 건강이다. 추간판 협착증으로 고생을 하면서 건강의 소중함을 절감했다.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공부를 해서 무엇하랴. 학업이 아니라 직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궁리하며, 일을 찾고 있었다.
어느 날, 평소 나를 언니처럼 따르던 같은 한인 교회에 다니는 후배가,
"언니, 학교 교사하면 잘하실 것 같아요. 교직으로 한번 알아보세요."
학교 교사를 권했다. 같이 있던 지인들도 한국에서 교사도 했고 하버드에서 영어교육 관련 전공도 했으니, 학교 교사를 해 보라고 권유했다.
나는 속으로 "누가 나같이 나이도 많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아줌마를 교사로 뽑아줘" 생각하며,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미국에 마흔 살이 다 되어 이주한 나는 이 곳에서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도 다니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학교생활은 대학원 4년이다. 초중고교에서는 문화적인 이해와 공감을 기반으로 하는 학생들과의 의사소통과 정서교류가 중요하다. 초중고교 교사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경험이 부족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더구나,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을 어떤 학교가 채용해 줄까? 초중고교 교사직은 내게는 아주 먼 나라 이야기로 들렸다.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만 있을 뿐이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 다시, 대학 시간강사직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 조차 몰랐다. 그저 막막했다. 그러다 세월호 집회로 알게 된 한인 엄마가 던진 말 한마디가 단초가 되어, 교직에 대한 취업 정보를 구할 수 있었다. 나도 도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세월호 집회에서 일어난 우연이 나에게 교직의 가능성과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2014년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큰 상흔을 남긴 사건이 일어 난 해다. 그해 4월 나는 보스턴에서 티브이를 통해 304명의 고귀한 생명을 태운 세월호가 바다로 가라앉는 광경을 그저 바라만 봐야 했다. 그날 그 자리에 국가는 없었다. 보스턴 한인들은 비탄에 잠겼다. 구할 수 있는 아이들을 구조하지 않은 정부에 분노했다. 희생자를 추모하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150여 명의 한인이 하버드 스퀘어에 모였다. 첫 세월호 집회를 시작으로 몇 명의 한인 엄마들이 지속적으로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집회와 피케팅을 이어갔다. 우리는 그해 6월 말 유가족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바자회를 열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바자회에서 대학강사로 일하고 있는 한 엄마로부터 대학강사직이나 교직 관련 채용공고를 알 수 있는 웹사이트 정보를 얻었다. 처음에는 대학강사직을 알아보려고 이 웹사이트를 검색했다. SchoolSpring.com이라는 웹사이트인데, 대학강사직뿐만 아니라 초중고 대학의 모든 교직에 대한 채용정보가 있었다. 이 웹사이트를 통해 교직 관련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정보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내가 과연 교사로 일할 수 었을까? 작은 정보가 나에게는 인생의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 이 소중한 정보 덕분에 나는 교사가 되는 길과 방법을 알게 되었고, 교직에 도전할 수 있었다.
나의 첫 도전
처음에는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교사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지원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이 웹사이트를 매일 몇 시간씩 파면서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웹사이트를 통해 교사로 취업을 하려면 어떤 자격 요건이 필요한지, 어떻게 채용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매사추세츠주 정부 ESL 교사자격증이 필수적이다. 교사자격증은 영어교육 관련 학위와 교사자격고사인 MTEL 시험 (Massachusetts Tests for Educator Licensure)을 통과하면 주어진다. MTEL 시험은 읽기와 쓰기, 전공시험 등 2종류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정보의 조각조각이 모이자, 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교사자격증이 있어야 지원을 할 수 있으니, 교사자격증 시험 통과가 일차 목표였다. 2014년 7월 20일에 교사 자격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언제 시험을 볼 수 있을지 감도 못 잡았지만,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시작이 반이다. 목표는 분명하고 갈 길을 아니, 이제 앞만 보고 가면 된다. 의기가 충천했다. 고지가 바로 눈 앞에 있는 듯했다.
기회는 나를 찾아왔다. 강물이 흐르듯 순조롭게 상황이 전개되었다. 교사자격시험 준비를 시작했던 날, 보조교사 채용공고 포스팅을 보았다. 초중고교가 같이 있는 공립 차터스쿨 (자립형 공립학교)에서 초등학교 보조교사를 구하고 있었다. 보조교사여서 교사자격증은 요구하지 않았다. 보조교사라면 정교사를 그야말로 돕는 역할이니 부담 없이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 지원서를 냈다. 자기소개서, 이력서, 성적표, 추천서 등을 SchoolSpring에 온라인으로 올려 지원했다. 이제 풀타임으로 일을 할 수도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나의 꿈은 그렇게 아주 작게 시작되었다.
기회는 계속 오고 있었다. 7월 24일, 지원한지 4일 만에 학교 교장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운동을 하느라 받지 못해 음성 메시지를 확인했다.
“귀하가 본교의 보조 교사직에 지원한 것을 압니다. 우리 학교에 4학년 영어와 역사 교사 자리가 새로 났는데, 관심 있으신지요? 전화 부탁드립니다.”
전화 목소리와 어조에 나에 대한 호감이 느껴졌다. 마치, 당첨 확률이 높은 복권을 한 장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생각을 가다듬고 나서, 30분 정도 후에 전화를 했다. 교장선생님에게 내 소개를 하고 학교 소개를 듣고 대화가 이어졌다. 4학년 영어와 역사 교사직에 대한 나의 의향을 물었다. 나는 교사자격증이 없는데, 정교사직에 지원할 수 있는지 물었다. 차터스쿨의 경우, 학교장의 추천 하에 관련 학위만으로도 1년은 자격증 없이 가르칠 수 있으며, 단 1년 안에 교사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고 했다. 내 경우, 자신이 추천을 할 테니 일단 지원할 것을 권고했다.
교장선생님은 보조교사로 지원한 나에게 4학년 영어와 역사 정교사직을 권유한 것이다. "나를 무척 잘 봤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제안을 받고, 처음에는 망설였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 속에서 뒤엉켰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실은 보조교사나 튜터 정도는 충분히 부담 없이 가르칠 수 있다. 그런데, 정교사로 차터스쿨에서 원어민 아이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고 게다가 역사까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내가 원어민 학생들에게 영어와 역사를 가르칠 수 있을까?’ 그런데, 엄청난 기회인 건 분명했다.
이것은 기회다. 기회가 왔을 때, 잡자!
“교장 선생님, 제 전공은 응용언어학으로 영어교육과 관련되기에 영어를 가르치는 데는 문제가 없겠는데요. 역사는 제 전공은 아닙니다. 이미 짜여진 역사 커리큘럼이 있다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좀 보내주시겠습니까?”
내가 조건부 제안을 한 셈이다. 대화는 계속되었다. 나의 한국에서의 교직경력, 내 전공에 대해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교장선생님:
“선생님은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으셨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가르치면 되지요. 선생님 이력서를 보니 충분히 해내실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I am very interested in you. 선생님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나를 직접 만나고 싶다고 했다. 교장선생님과 나는 다음 주 수요일로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전화 대화가 첫 번째 인터뷰였다. 나는 이 인터뷰를 통과해서 1차 심층 인터뷰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교사 선발은 학교 단위로 이루어진다. 교사자격증을 비롯한 교사로서의 자질을 갖춘 후보자가 교직을 지원하면 각 학교에서 교장과 인사담당자가 선발한다. 한국은 공립학교의 경우 각 시도교육청에서 선발해 각 학교로 발령을 내준다. 이 시스템 하고는 많이 다르다. 교사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요건이다. 교사로 취업하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려있다. 보통 교사직에 지원하면, 1차 서류 심사를 통해 후보자를 선별하고 2차 전화면접, 3차, 4차 심층면접을 거쳐 최종 선발자가 결정된다. 마지막 단계에서 수업시연을 하기도 한다. 여러 관문을 통과하는 지난하고 힘겨운 과정이다.
이 차터스쿨의 경우도 수십 명의 지원자 중 서류심사로 20명 정도를 걸러냈다. 다시 전화면접으로 13명을 심층면접 대상자로 선발했다고 들었다. 일단, 서류심사와 전화면접을 통과해, 1차 심층면접의 기회가 내게 온 것이다. 이렇게 교직에 발을 딛기 위한 도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후, 1차 심층면접과 2차 심층 면접을 거쳤다. 이 면접의 경험은 미국의 교육과 교사의 역할, 학교 문화 등을 이해하는 큰 자산이 되었다. 면접을 통해 미국의 학교가 원하는 교사상, 기대하는 교사의 역할을 알게 되었고 역으로 그들의 기준에 부합해 선발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드디어 4학년 영어/역사 교사직 인터뷰 날이다. 다행히 많이 떨리지는 않았다. 적당히 긴장되는 정도였다. ‘되면 되고 안 되면 말자. 설마 나를 뽑겠어.’ 이런 심정이었다. 미국 학교 교사 인터뷰는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는 차원에서 한번 해보자! 밑져야 본전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했다. 준비에는 만전을 기했다. 예상 질문 30개를 뽑아서, 미리 연습해 갔다. 수십 번 읽어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예상 질문 안에서 나오면 다행이고 아니면 임기응변으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오전 10시 30분 인터뷰다. 학교에 도착했다. 10시 10분. 5분 정도 차에서 인터뷰 준비 내용 다시 보았다. 차에서 내려 학교로 갔다. 비서가 교장실로 안내해 주었다. 복도에서 기다리면서 학교 연혁에 대한 게시물 읽어보았다.
10시 30분이 조금 못 되어 교장선생님이 등장했다. 50대 후반의 백인 남성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학교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시설이 산뜻하게 잘 갖추어진 학생이 700명 정도 규모의 학교다.
10시 40분에 인터뷰가 시작되어 1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교장선생님과 영어 선생님, 두 명의 면접관과 인터뷰를 했다. 내 소개, 왜 교사가 되었는지, 한국에서의 교직 경험, 초등학교 담임교사 시절 나의 학급운영 방식, 수업방식, 영어교사로서의 수업 방법, 수업 모델 등에 대한 무수한 질문이 쏟아졌다. 그들의 질문은 매우 구체적이었고, 내가 설명하는 도중 구체적인 예를 들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다. 예시를 들어 설명하면, 두 면접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의사를 표했다.
여러 질문 중 내가 경험한 한국 교육과 미국 교육의 특성을 말하라는 질문도 있었다. 나는 특성 중 하나로 한국에서는 노력이 성공적인 학업성취의 주요인으로 보고 미국에서는 학생의 타고난 재능을 중요하게 보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학생들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각각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교장: 그럼, 선생님은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노력이 학업성취에 더 중요하다는 걸 어떻게 설득하겠습니까?
나: 저는 제 개인적인 경험을 예로 들겠습니다. 저는 결코 특별하지 않은 두뇌에, 영어가 제2언어인 이주민이지만 열심히 노력해 하버드에 입학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저는 형편이 안 좋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기에 장학금을 받아 대학도 가고 교사의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두 면접관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능력과 요구가 다른 학생들에 대한 수업계획, 교사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 경우 등에 대한 그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에 담지 못한 나의 경력이나 경험에 대해 물었다.
나의 20대의 삶의 경험을 전했다.
‘나는 군사독재가 권력을 잡고 시민을 억압하던 1980년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나와 많은 이들이 시민의 자유과 권리, 정의를 지키기 위해 불의한 정권에 저항했습니다. 많은 대학생들과 노동자, 시민들도 함께 했습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과 시민의 힘을 배웠습니다.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최선을 다 한 삶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20대의 이러한 경험을 통해 교사로서의 신념과 철학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교장선생님이 나의 삶의 모토에 대해 물었다.
“저는 크리스천이며 내 신앙의 실천과 맞물려 다음의 말을 삶의 모토로 삼고 있습니다.
Justice is what love looks like in public. 정의는 사랑이 대중 속에서 발현되는 모습이다."
나는 이 말을 뜻을 새기며 살려고 한다고 했다.
교장선생님이 자신도 이 말을 좋아한다고 누가 한 말인지 안다고 했다. 코넬 웨스트 Cornel West의 말이라고, 그를 존경한다고 했다. (코넬 웨스트는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진보적 철학자, 정치사상가다. 현재, 하버드에서 정치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이 순간 이심전심의 뭔가 뜨거운 공감의 분위기가 확 무르익었다. 면접이 이루어진 공간은 서로가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가 다르지 않음을 느끼는 무언의 공감대로 채워졌다.
이 부분이 내 생애 취업 면접 중 가장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면접에서도 전혀 모르는 사람하고 인생관과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로 공감을 나누는 기쁨을 체험했다.
중간에 농담도 같이 하고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하고 편안한 가운데 대화가 계속되었다. 일방적으로 내가 질문에 대답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서로의 교육에 대한 견해를 나누는 자리였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나에게 질문이 있으면 해 보라고 했다. 교사에 대한 학교의 기대나 요구사항에 대해서 물었다. 교장선생님은 교사들에게 많은 자율권이 주어져 특별한 요구사항은 없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교장선생님이 나를 학교 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미국에서의 첫 교사 면접을 마쳤다. 1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면접을 마치고 여러 의미에서 흐뭇했다. 나를 새롭게 발견하고 내가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기회였다. 별로 긴장 안 하고 당당하게 내 의견을 밝힌 자신이 대견했다. 영어는 내게 모국어가 아니기에, 내가 영어를 어느 정도까지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늘 궁금했다. 오늘 면접에서, 예상치 못 한 질문이 여러 개 나왔지만 기지를 발휘해 잘 대응했다. 용기 있게 침착하게 대응한 스스로의 모습에 놀랐다. 오늘 배운 중요한 점은, 핵심은 콘텐츠라는 점이다. 나의 철학, 나의 가치관이 부재했다면 절대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내가 부족한 점은 내가 영어 네이티브가 아니라는 점이 아니라 나를 표현할 콘텐츠의 부족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10년 가깝게 살아오던 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재발견한 기회이기도 했다. 나 같은 외국인에게도 영어를 가르치는 기회를 주려는 이 사회가 참 감사하게 여겨졌다. 49살 난, 네이티브가 아닌 외국인 아줌마인 나에게 공립학교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서 이 사회에서 나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았다. 나의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배경을 보지 않고, ‘나’라는 사람 자체와 능력을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가 제2언어라는 점도, 나이가 49살이라는 점도 교직을 구하는 데는 장애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여기서 오직 실력으로만 승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공정하게 기회가 주워지는 이 사회의 면모를 체험했다. 이것은 희망이다!
(물론, 미국이 인종, 문화, 언어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공정하게 기회가 주어지는 나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이 존재하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료보험이 없어 아무리 아파도 병원을 못 가는 현실이다. 조지 플로이드가 거리에서 살해되는 나라다. 차별이 존재하는 현실에서도 내가 경험한 이런 긍정성은 이 사회가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교장선생님의 열린 사고와 마음이 존경스러웠다. 권위를 내세우지는 않는 태도가 나를 편안하게 대화로 이끌었다. 진정 소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교육자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배어 나오는 교장선생님의 교육자로서의 통찰과 식견, 깊은 철학에 감동받았다. ‘저런 교장과 일하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크게 기대는 걸지 않기로 했다. 안 된다면 아직은 부족하니 더 준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비웠다.
또 한 가지, 나이먹음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나이먹음이 직업을 갖은데 꼭 부정적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 나이 49살, 나이가 나이인지라 많은 경험에서 나오는 삶의 철학과 교육에 대한 식견은 분명 장점이 될 수 있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서로가 다 흡족해하는 표정이었다.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 오늘 첫 교사 인터뷰에서 느낀 것은, 교사를 뽑을 때 지식보다는 그 사람 자체, 그 사람이 가진 열정과 철학에 더 비중을 둔다는 것이다.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안 돼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일렀다. 매일매일 배워 일신 우일신 하니 떨어져도 크게 아깝지 않으리라!
두 번째 심층면접의 기회가 왔다.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해 거의 마지막 관문에 이른 것이다. 첫 번째 심층면접에서 13명이 후보자 가운데 5명을 선발해서 두 번째 심층면접을 한다고 했다. 여러 경쟁자 가운데 5명에 뽑힌 것이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기뻤다.
2차 심층면접도 1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45 분했는데, 나만 1시간을 했다고 교장선생님이 인터뷰 후에 알려주었다. 나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였다고 했다.
2차 인터뷰에 임하면서도, 한편 돼도 걱정이었다. 미국에서 학교 교사로 가르친 경험이 전혀 없는데.. 내가 과연 초자로 정교사로 잘 가르칠 있을까? 전공도 아닌 미국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데, 수업 준비하면서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겪을까? 담임을 맡아 아이들 생활지도를 잘 해낼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도, 뽑는 것은 교장선생님 마음이니 이분께 그냥 맡기기로 했다. ‘전문가인데 사람 보는 능력이 출중하겠지. 인터뷰하면서 알아서 내 능력에 맞는 자리를 주겠지. 오늘의 인터뷰만 생각하자!’
두 번째 인터뷰에는 교장선생님을 포함 모두 5명의 면접관이 함께 했다. 이번에는 학급운영과 영어수업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받았다. 예를 들어, 학업성취도가 낮은 학생에 대한 대안, 수업 중에 말 안 듣는 학생에 대한 대처, 읽기 및 쓰기 지도 방법, 교실환경을 어떻게 구성할 건지, 4학년 소리 내어 읽기 read aloud 용으로 추천할 만한 책들, 수준별 학습에 대한 나의 견해 및 수업 적용 방법 등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번 인터뷰도 훈훈한 분위기에서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다. 한국 초등학교 교사 출신의 후보자를 바라보는 그들의 따뜻한 눈빛에서 그들의 호감과 호의를 느낄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과 다른 교사들은 나에게서 신선함과 새로움을 발견했다고 나의 대답에 응수하기도 했다.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나의 대답에 자신감을 더해 주었다. 나의 지식과 나의 경험을 토대로 최선의, 최고의 대답을 하려고 했다. 두 번째 심층면접도 면접관과 나와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즐거운 대화였다. 내가 잘했는지 못 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면접관들과 유쾌하게 소통했고 공감대를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결과를 며칠 안에 통보해 준다고 했다.
며칠 후, 교장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른 사람을 뽑았다고 했다. 불합격을 통보받은 것이다. 전화통화 마지막에 "However, we admired you. 하지만, 우리는 선생님에게 경탄했습니다"라고 했다. 왜 안 됐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네이티브가 아닌 교사가 네이티브인 학생들의 담임이 되어 영어와 역사를 가르친다는 게 학교 측에서는 선뜻 내키지 않았던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완전 초짜 교사가 아닌가. 나의 추측이다.
결국, 김칫국부터 마신 셈이었다. 사실, 돼도 걱정이었다. 전혀 실망하거나 의기소침해지지도 않았다. 다른 학교에 ESL 교사로 지원했고 서류 심사가 진행 중이다. 나에게 맞는 자리를 찾고 있는 과정일 뿐이다.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 될 때까지 도전하면 된다.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모르겠으나, 자연스러운 낙관론과 자신감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계속되는 도전
지원한 학교는 보스턴에 있는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있는 공립 차터 스쿨이다. 이 학교 ESL 디렉터와 전화 인터뷰 후, 두 차례의 대면 인터뷰를 거쳤다. 다수의 지원자가 있어 1차로 전화 인터뷰하고, 10명으로 추려 한 사람씩 인터뷰 중이라고 했다. 첫 인터뷰에서는 디렉터와 1시간 정도 대화를 했다.
나의 이력, 경력, 학위에 대한 소개, 나의 교육 철학, 학생관, 미국 교육에 대한 경험, 한국과 미국 교육 비교, ESL 수업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 수업 운영에 대한 질문, 학생 훈육 방식, 나의 강점, 가장 어려웠던 수업 경험, 가장 성공적인 수업 경험, 학생의 입장에서 나를 표현하는 3가지 말, 보스의 입장에서 나를 표현하는 3가지 말, 교사 동료부터 얻은 가장 큰 교훈, 동료와의 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점 등을 질문받았다.
디렉터는 시종일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나의 대답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때때로 호기심을 드러내며, 나의 대답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나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다. 근무시간과 하루에 몇 시간 수업하는지, 교사 복지 시설 등에 대해 물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내가 받고 싶은 연봉을 물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한참을 머뭇거렸다. 디렉터는 내가 자격이 차고 넘치는데, 학교 사정 상 내 능력에 비해 아주 많이는 못 주겠다고 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연봉을 협상하는 상황은 처음이다. 첫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리라고는 예측 못 했다. 혹시, 내가 너무 높은 연봉을 요구해 나를 채용하지 않으면 어쩌지? 이런 우려에서 받고 싶은 연봉보다 좀 낮춰서 말했다. 디렉터는 나의 연봉 액수가 자신들의 연봉 책정 액수 범위 안에 있다고 안심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안 사실은 이것이 나의 실수였다는 것이다. 첫출발부터 나의 가치를 평가절하해서 내놓았던 것이다.
1차 면접 이후, 교장과의 2차 면접이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디렉터로부터 전화로 채용 제의를 받았다. 그 기쁨이란!
디렉터와의 면접에서 흐뭇한 대화가 오갔다. 끝나고 느낌이 좋았다. 교장과의 인터뷰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 했다. 그동안의 인터뷰에서는 나의 지식과 경험을 명확하게 설명하며 나를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이 차터스쿨 교장과의 인터뷰에서는 별로 시원하게 대답을 하지 못 했다. 초반부터 40대 중반의 여성 교장의 카리스마에 압도되었다. 전혀 예상치 못 하고 생각해 보지도 못한 질문이 나와 말을 얼버무리기도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느낌이 안 좋았다. 안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갔다. 금요일에 교장과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월요일에 전화로 채용 제안을 받았다. 남편으로부터 바로 수락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은지라, 생각해 보고 목요일까지 채용을 수락할 건지 여부에 답을 주겠다고 했다. 목요일 오전에 디렉터에게 먼저 전화가 왔다. 월요일부터 일을 시작해야 해서 지금 바로 답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바로 수락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첫 디렉터와의 인터뷰에는 나의 채용이 거의 정해졌다. 교장과의 인터뷰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ESL 디렉터에게 ESL 교사 채용의 전권이 있었다. 교장은 디렉터의 선택과 결정을 신뢰하기에 채용 확정 전에 확인차 나와 인터뷰를 한 것이었다. 나의 느낌이 적중하지 않은 셈이다.
채용 확정이 된 날, 나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신임교사 오리엔테이션이 있을 예정이다. 이 날부터 정식 출근이다. 내일 학교에 가서 정식으로 채용계약서에 서명을 한다. 월요일부터 미국 공립학교에서 ESL 교사로 일 한다는 게 실감이 안 난다. 7월 20일에 처음으로 미국 교사가 되려고 작정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MTEL 시험 연습문제 책 주문하고 ESL 교사 채용공고를 보았다. 이렇게 시작해서 3주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긴장과 걱정, 불안 그리고 설렘과 자신감, 희망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이제 미국에서 교사로 새롭게 출발한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쁘다!
이렇게 나는 미국 공립학교 교사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50을 앞둔 나이에 불가능할 것 같은 꿈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것은 꿈을 이루기 위한 시작이었다. 나는 오늘도 꿈을 꾸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한발 한발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