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어때서!
45살 아줌마 하버드 간 이야기
지금부터 11년 전이다. 40대 중반의 길목에서 인생의 또 다른 장을 열었다. 내 나이 45살. 하버드에 간 것이다. 2년 후, 하버드에서 응용언어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것도 4.0 만점에 3.97의 성적으로. 내 생애 학교에 다니며 받았던 최고의 평점이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끝내 목표한 학업을 이루어 냈다. 한창 공부하며 성취할 청년의 나이가 아니라 불혹의 나이에 이룬 성취다. 나에게는 박사학위 이상으로 소중한 석사학위다. 학교나 학위 자체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40대 중반에도 새롭게 도전하고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성취의 경험은 나이를 잊고 끊임없이 도전하게 하는 힘이 된다. 나는 오늘도 나이는 진정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삶으로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40대 중반, 시작하기 좋은 나이!
50대 중반을 살고 있는 지금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함을 항상 스스로에게 되뇐다. 물론, 나이 듦에 대한 생물학적 변화를 몸으로 느낀다. 가슴속에 솟구쳤던 열정과 몸에서 발산되던 에너지가 한창때와는 다르다. 그러나 이렇게 되뇌는 이유는 이런 변화를 핑계 삼아 여전히 부족한 나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할까 봐서다. 나의 부족함과 취약함을 잘 알기에 그래서 성장을 멈출 수 없기에 스스로에게 거는 일종의 주문인 셈이다. 10년 전, 40대 중반의 나에게도 이런 주문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남편과 정착하기 위해 미국에 온 지 몇 해가 지났다. 내게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아이를 낳았고, 아이를 기르면서 새로운 나라에 적응해야 했다. 타국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려니, 어려움이 많았다. 육아와 집안일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벅찼다. 이민 초기 몇 년을 엄마로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 어느새 내 나이도 4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업주부로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40대 이민자 아줌마에게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결단의 때가 찾아왔다. 38살에 시작해 다 마치지 못 한 공부를 다시 하고 싶었다.
2003년, 38살의 나이에 미국에 왔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다음 날 매사추세츠 주립대학교에서 응용언어학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나의 이민은 공부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문화, 언어에 적응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적극적으로 토론과 발표에 참여해 열정적인 몇 주를 보냈다. 중간고사에서 30여 명의 원어민 학생들을 제치고 최고의 점수를 받기도 했다. 미국에 온 지 몇 주 안 되어 여전히 교수의 강의를 100% 이해할 수 없는 나였지만 노력 하나만으로 교재와 교수의 강의를 외우다시피 해 시험 준비를 했다. 교수는 최고 점수를 받은 나의 서술형 답안지를 학생들에게 모범 답안지로 보여주기도 했다. 이제 막 한국에서 온,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의 노력과 성취에 그들은 박수를 보냈다.
30대의 끝자락에서 넘치는 열정과 패기로 시작한 미국 대학원 생활은 매일 보람과 성장, 성취의 연속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이었다. 주어진 모든 시간이 나의 것이다. 나의 시간을 온전히 학업에만 쏟으며 공부에 몰입했다. 첫 수업부터 자신 있는 자기표현과 수업 참여로 교수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심었다.
한국에서 쌓은 경험과 나의 세계관을 나누었다. 나의 학생운동과 교사운동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회적, 역사적 체험에 대한 나의 이야기에 학생들과 교수들은 귀를 기울였다.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 온 사람의 사회적 경험과 인식은 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과 새로운 사고로 다가오는 듯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단순히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정의, 민주주의, 평화를 위한 투쟁과 땀과 피에 대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우리의 노력과 헌신에 존경과 경외심을 표했다. 나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문화적, 사회적 경험의 폭과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그들의 가치에 부합했다. 이때 인연을 맺은 교수들과는 아직도 연락을 한다. 그 이후 계속된 나의 학업과 취업 지원 과정에 언제나 강력한 추천서를 써 주며 나의 도전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었다.
첫 학기의 힘찬 출발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계속하는데 어려움이 뒤따랐다. 임신, 출산, 육아의 어려움으로 공부는 미룰 수밖에 없었다. 첫 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심한 입덧이 시작되었다. 계속되는 구역질과 구토로 학교를 다니기는커녕 일상생활도 불가했다. 음식을 먹지도 물을 마시지도 못 했다. 두 달 정도의 입덧으로 몸무게는 9kg 정도가 줄었다. 결국, 수강연장 incomplete을 신청을 했다. 입덧이 멎자, 다시 등록을 하고 못 마친 과목의 과제와 시험을 완료했다. 출산 예정일 2주 전까지 만삭의 몸으로 기말 페이퍼를 썼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2004년 7월 23일. 내 생애 최고의 날이다. 아이가 태어났다. 나이 39에 얻은 첫 아이이자 외동 아들이다. 아이 탄생의 기쁨과 함께 맞이한 육아의 어려움은 내 삶의 계획은 바꾸어 놓았다. 9월 학기를 시작했지만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밤낮없이 하루 종일 울어대는 아기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육아를 하며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불가했다. 그렇게 공부를 접어야 했다.
바로 지금이 꿈을 펼칠 때다!
5년을 엄마로서, 주부로서 열심히 살았다. 어린아이를 둔 전업주부는 늘 분주하다. 육아와 집안일만으로도 하루 24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키우며 늘 바빴다. 이 시기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육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운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액티비티에 데리고 다니고 같이 놀아주었다. 도서관을 같이 다니며 읽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책을 빌려와 밤마다 책을 읽어주었다. 수족관, 과학박물관 등을 찾아다니며 아이가 다양한 교육적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아이의 양육에 몰두하며 성장하는 모습에 기쁨을 느꼈다.
전업주부로 바쁘게 살면서도 늘 마음 한쪽에는 마무리 못한 공부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삶의 무게가 버거워서, 더욱 가중될 삶에 무게가 두려워서 내게 주어진 가장 가벼운 짐만 지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늘 꿈을 가슴 한편에 간직하고 있었다. 언젠가 접었던 자기실현의 꿈을 다시 펼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아이가 프리스쿨 preschool (유아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일주일에 3일은 하루에 2시간 정도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접어둔 꿈을 다시 펼칠 때가 온 것이다.
출산과 육아, 가사로 중단한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쉽지 않은 결심이었다. 처음에는 주저하고 망설였다. 5년을 전업주부로 지내면서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 주부 건망증에 깜빡깜빡 잊기가 일수였다. 여러 가지 걱정이 앞섰다. 40대 중반은 공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닐까? 내 나이에 과연 학업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학업을 병행하면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러나, 뒷걸음치려고 하는 나를 다시 다잡았다.
바로 지금이야! 더 이상 미룰 수도 기다릴 수도 없어. 내 생애 제일 젊은 날이 바로 오늘이야. 그래, 시작하자! 가슴속에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꿈과 계획을 이제 펼쳐야 한다.
결심이 섰다. 꿈을 펼칠 때는 바로 지금이야! 그렇게 시작했다. 20대의 나는 어쩌면 40대 중반의 나이가 인생에서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막상 50대 중반을 살고 있는 나는 인생에서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결코 늦은 나이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 시작을 막는 것은 내 마음속의 주저함이다. 그냥 시작하면 된다.
몇 년 전, 30대의 끝자락에서 경험한 성취와 기쁨은 나에게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주었다. 30대 후반의 패기와 열정은 40대 중반의 나의 가슴에 다시 살아난 것이다. 용기를 잃을 때, 과거의 성공과 성취의 경험은 나에게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내가 해 냈던 일들을 떠 올렸다.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버티어냈던 경험을 회상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할 수 있어!
하버드 어떻게 준비했나
매사추세츠 주립대학교에서 첫 학기를 열정과 혼신의 노력으로 보냈다. 그때, 아주 강렬하고 좋은 인상을 주어 신뢰관계가 형성된 교수로부터 박사학위 지원을 권유받았다. 그중 한 학교가 하버드교육대학원 응용언어학과였다. 목표가 정해지자, 나는 본격적인 입학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영어공부부터 다시 시작했다. 미국 대학원을 진학하는데 어학은 기본 관문이다. 본선을 치르기 전의 예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학문적 능력을 평가받을 수 있다. 최소한의 자격 요건이 어학점수로 가려진다. 두 가지의 표준화된 영어시험, TOEFL Test Of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영어권 대학에 입학하고자 비원어민 학생의 영어능력을 측정하는 시험)과 GRE Graduate Record Examination (미국 대학원 입학을 위한 일종의 수학능력 평가 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24시간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 주어지는 24시간 중 공부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이었다. 아이가 프리스쿨에 가 있는 일주일에 3일, 하루 2시간 정도만 시간이 났다. 대학원 입학 준비를 하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이다.
결국 아이를 재우고 나서 밤에 공부할 시간을 내야 했다. 하루 종일 가사와 아이 돌보는 일에 파김치가 된 몸으로 밤에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피곤함에 꾸벅꾸벅 졸기가 일수였다. 게다가, 처음에는 10분도 집중해서 공부하기 힘들었다. 책을 붙들고 공부를 하는데,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어떤 날은 아이를 재우다가 같이 잠이 들어 버리기도 했다. 일어나 보면, 어느새 아침이었다. 그런 날 아침이면 정말 우울했다.
오랜만에 하는 공부여서인지 효율성이 떨어졌다. 학습능력의 꽃인 암기력의 저하로 고전을 면치 못 했다. 방금 전에 외운 단어가 돌아서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루에 수십 개의 고급 어휘와 예문을 외웠다. 여러 번 반복해야 그중 몇 개가 기억이 났다. 중학교 3학년 수준이라는 GRE 수학도 내게는 너무 어려웠다. 대학원 공부를 할 수 있는 학습능력이 남아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되든 안 되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시간을 쪼개가면 공부했다.
GRE 시험 준비는 매우 지루하고 지겨운 과정이었다. 전공 특성상 언어영역의 점수가 관건이다. 학문 영역에 쓰이는 수많은 고급 단어를 외워야 하므로 암기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단어의 관계를 유추하는 문제나 독해 문제는 고도의 이해력, 논리력, 추론 능력을 필요로 한다. 작문영역에서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학문적 글쓰기 능력을 요한다.
공부하고는 담쌓은 지 몇 년이 되었고 나이는 이미 4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나이 들수록에 학업에 필요한 능력이 생물학적으로 감퇴함을 몸으로 느꼈다. 특히, 단기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짐을 체험했다.
그러나, 나이먹음이 공부에 늘 부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점과 약점을 잘 파악해, 자신에게 맞는 효율적인 학습법을 발견한다면, 연륜과 경륜은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결국, 공부란 자기 훈련의 문제가 아닐까.
나는 암기력이 많이 떨어진다. 부족한 암기력은 노력으로 메우면 된다. 암기력이 좋은 사람이 한번 보고 기억할 내용을 나는 다섯 번, 열 번 더 반복해서 보고 외우려 했다. 처음 며칠은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하루, 이틀, 일주, 이주 공부에 습관을 붙이자 집중력도 점차 좋아졌다. 주어진 시간은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했다. 공부에 몰입했을 때는 옆에서 내 이름을 크게 불러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
이해력과 논리력은 나이가 들수록 더 좋아지는 것 같다. 세상과 인생 경험을 통해 얻은 식견과 통찰력은 이해력, 논리력과 긍정적인 연관이 있어 보인다. 단기 기억력이나 암기력이 학습능력의 전부는 아니다. 자신에게 맞는 공부방법을 찾아내고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어학시험을 준비한 지 5개월 만에 토플 TOEFL과 GRE 시험을 보았다. 하버드를 포함한 다른 학교에서 요구하는 점수가 나왔다. 그 당시, 토플은 최소한 IBT Internet Based Test 100점, GRE는 언어영역 평균점수 680점이면 족했다.
합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기소개서 SOP (Statement of Purpose), 연구논문 실적, 추천서, 학교 성적, 수상실적, 활동 경력 등이다. 가장 중요한 SOP에 심혈을 기울였다. 나의 학문적 경험과 배경, 학생운동과 교사운동 경험, 세계여행, 교직 경력 등 내 삶의 다양한 모습을 담았다. 한치의 거짓도 없이 객관적 사실에 근거에 나의 학문적 관심과 소양을 표현했다.
매사추세츠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1년간의 수학 경험은 미국 사회, 특히 미국의 대학이 무엇에 가치를 두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미국의 대학은 다양성을 추구하며 사회정의와 인권을 위한 저항과 노력에 가치를 부여한다. 나는 모든 과목의 첫 학기 강의에서 이런 면모를 감지했다. 그리고, 수업이 진행됨에 따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나의 학생운동과 교사운동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 내 말을 경청하는 그들의 따뜻한 시선을 느꼈다. 그들의 눈빛은 관심과 경이로움을 나타냈다.
첫 몇 년간의 이민생활을 통해 미국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나름대로 이해했다. 이 사회는 다양한 사고와 경험을 존중하며 포용한다. 나를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내가 지니고 있는 나만의 고유성, 나만의 경험을 솔직하게 나의 자기소개서에 표현했다. 편견 없이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으로 이해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SOP에 나의 학문적 관심을 한국인 이주민의 관점에서 표현했다. 내 학문적 관심의 중심은 이중언어 교육이다. 미국에서 5년간 살면서 한국인 이주민 자녀와 부모의 언어 습득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아이들은 제2언어인 영어를 쉽게 습득하는 반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무렵이면 한국어 능력을 잃어버린다. 부모는 영어라는 장벽으로 인해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아이가 중고교에 가면 부모와 자녀 간에 깊은 대화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아이는 한국어로 의사를 표현하기가 어려워지고 부모는 아이와 영어로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주민 가족의 언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이중언어 교육에 대해 연구하고 싶었다. 아이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면서도 한국어의 능력을 유지하거나 향상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민자 부모의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할 수 있는 효율적인 영어학습은 무엇일까? 이민자 아이들과 부모,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희망을 주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나의 학문적인 관심과 교육자로서의 고민을 SOP에 담았다.
교수의 추천서도 입학 결정에 작용하는 요인이다. 나는 매사추세츠 주립대학교 교수 세명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았다. 응용언어학 석사 프로그램을 다 마치지는 않았지만, 모든 수업에서 좋은 성과를 내었다.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나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며 수업에 크게 기여했다는 교수들의 평가와 더불어 시험과 페이퍼 모두 우수한 성적을 받았기에 주저 없이 추천서를 써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나의 학문적 도전과 성공을 바라며 기쁘게 추천서를 써 주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의 성적 또한 중요하다. 나의 학부성적은 2.68이었다. 나의 불성실함이나 게으름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으로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을 하였음을 설명했다. 학부 성적이 낮은 이유를 솔직하게 SOP에 밝히고 이해를 구했다. 매사추세츠 대학교 석사 프로그램에서는 4.0 만점에 3.96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받았기에, 이로서 나의 학문적 성실성을 입증할 수 있었다.
나는 하버드, 보스턴 칼리지, 매사추세츠 주립대학교 애머스트 (UMASS Amherst) 세 곳의 박사과정을 지원했다. 세 곳 모두 응용언어학, 언어교육 분야에서 뛰어난 프로그램으로 인정받는 학교이다. 하버드로부터는 박사가 아닌 석사로 장학금 함께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UMASS Amherst는 전액 장학금과 생활보조금을 받는 조건으로 박사과정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나는 하버드를 선택했다. 세계 최고의 지성이 모이는 곳이 하버드다. 세계 최고의 석학들로부터 배울 수 있고 전 세계에서 온 뛰어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점이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특히, 하버드의 응용언어학과는 이 분야의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다. 응용언어학 분야의 세계적 거장인 캐서린 스노 Catherine Snow 교수의 명성에 끌린 점도 있다. 하버드에서 석사를 하면서 박사과정을 지원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자는 생각도 있었다.
하버드에서 나를 발견하다
2009년 8월 말, 나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하버드를 만났다. 보스턴의 이글거리는 여름 태양 아래 하버드에서의 경험이 시작되었다. 하버드 학생들의 첫인상은 여름의 뜨거운 햇볕만큼이나 강렬했다. 여유 있는 표정. 활짝 웃는 미소. 그들의 얼굴이 빛났다. 열심히 달려왔고 그래서 또 다른 성취를 위한 출발선에 서 있는 그들이었다.
신입생 환영 파티가 시작되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선다. 하버드 교육대학원 래드클리프 야드 Radcliffe Yard는 어느새 신입생으로 빽빽이 채워졌다.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야드 한쪽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이미 몇몇이 춤을 주고 있다. 건너편에서는 둥근 탁자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음악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래드클리프 야드에 가득하다.
하버드 생활을 시작하는 행복감과 설렘이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배어 나온다. 2009년 가을학기 신입생 환영 파티장에서 만난 하버드 신입생은 모두 활기 넘치고 환했다. 그들은 목표를 성취한 뿌듯함과 행복감으로 충만했다. 나도 그들 중 하나라는 사실이 행복했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 다시 서게 된 학문의 전당에서 느끼는 감회는 특별했다. 이날 나는 그 어느 집단에서도 느끼지 못 한 강한 자신감과 충만한 행복감을 그들에게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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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연재에서는 하버드에서의 도전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