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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Feb 17. 2021

카사블랑카에 생긴 가족

모로코 여행을 통해 문화에 대한 편견을 깨다

오래전 나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문화권의 사람들과 가족과도 같은 우정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가족이 생겼다. 잉글릿드 버그만과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영화로 유명한 카사블랑카. (실제로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촬영되지 않았다.) 카사블랑카 근교의 바닷가 별장에 초대되어 모로코 기족들과 함께 즐거운 한 때를 보내기도 했다.


아름답고 따뜻한 사람들! 추억을 더듬어 사진 두장을 찾았는데, 하나는 마라케시 또 하나는 카사블랑카.

두장의 사진이 나를  27년 전 모로코 여행으로 초대한다.


지브롤터를 건너 모로코로


스페인의 타리파에서 배를 타고 이제 곧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다. 배표를 끊고 여객선 대합실에서 배를 기다리는 나는 긴장감으로 가슴이 움츠려졌다. 처음 가는 이슬람 국가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과 불안감이 뒤섞여 있는 나를 스스로 애써 진정시켰다. 며칠 전 그라나다에 오기 전 마드리드에 겪은 일이 다시 떠올랐다. 골목길에서 강도를 만나 소지품을 다 뺏기는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마드리드에서 저녁시간에 탱고 공연을 보러 가는 중 강도의 습격을 당했다. 어둑어둑할 무렵, 지도를 보며 공연 장소를 찾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골목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순간, 골목길에서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내 앞에는 얼굴을 가린 두 명의 괴한 나타났다. 순간 공포심이 나를 엄습했다. 바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내주었다. 비디오 카메라와 가방을 다 통째로 주었다. 끼고 있던 반지도 빼서 주었다. 순순히 모든 소지품을 다 내놓자, 그들은 물건을 들고 골목 저쪽으로 사라졌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손이 떨렸다. 내가 공포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Help me please”를 외치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도움을 주었다. 스페인의 시민들은 친절했다. 한 행인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경찰에 신고를 해 주었다.  다른 한 행인은 골목 어귀에 있는 카페로 데려다주었고 나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다 사람 사는 세상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도움을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세상 어디나 인정은 살아있다. 그날 마드리드 시민들이 보여준 친절과 도움은 잊을 수가 없다.


한 시간 정도 후 경찰이 왔다. 경찰차를 탔다.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에는 철창과 투명한 플라스틱 창으로 박혀 있었다. 경찰차 뒷자리에 앉은 나는 강한 오줌 지린내를 느꼈다. 나 직전에 부랑인이나 홈리스를 태웠나 보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강도를 만나 다치지 않고 카메라와 돈, 반지, 가방 정도를 빼앗긴에 얼마나 다행인가! 경찰관의 도움을 받으러 경찰서로 가는 길이다. 이 정도의 불편함도 문제가 아니었다.


강도를 만난 상황을 설명하고 조서를 작성했다. 경찰은 내게 복면을 한 강도들이 아랍인이 아닌지 여러 번 물었다. 머리카락,  피부, 눈동자의 색깔이 기억이 나는지 물었다. 나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모자와 후드를 쓰고 있는 두 명의 남자라는 것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스페인 경찰관들은 마치 범인을 아랍계 이주민으로 몰고 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잠깐, 아랍계 이주민들이 스페인에서 받을 편견과 차별에 대해 생각했다. 여행자도 감지하는 정도라면 그들이 이 곳에서 살면서 느끼는 어려움과 고통은 어떨지 짐작이 갔다.


강도를 잡을 가능성도 빼앗긴 내 비디오카메라와 소지품을 되찾을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이런 일이 종종 있으니, 앞으로 주의하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태어나서 경찰서에 딱 두 번 조서를 써 봤다. 한 번은 86년 가두투쟁을 하다 연행되어 집시법 위반으로 조서를 썼다. 이번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강도 사건 피해자로 조서를 썼다. 이날의 강도 사건 덕분에 스페인 경찰차도 타보고 스페인 경찰과도 1시간 가깝게 대화를 나눴다.


교훈을 얻었다. 일몰 후에는 절대 혼자서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 여행을 다니면서 경험이 쌓이자, 여행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이 자신감은 방심으로 이어져, 이런 안 해도 될 경험도 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는 혼자서는 대낮에도 다니지 않았다. 마드리드 강도 사건 이후 단 한 번도 여행 중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


이번 모로코 여행에서는 일몰 후에는 혼자 다니지 않는다는 철칙을 꼭 지킨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배 안 여객실에서 배낭을 앉고 창밖의 바다 풍경을 바라보던 나에게 미국인 여성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나도 그녀도 혼자 여행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금새 친구가 되었다. 배안에서 그녀는 맥주를 나는 커피를 한잔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탕헤르에서 하루를 머물고 그녀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작은 지역 신문사 기자로 일하는 그녀는 휴가차 스페인에 왔다고 했다. 배는 어느새 탕헤르 항에 닿았다.


코발트 빛깔의 찰랑찰랑한 바다 위에 갈매기가 날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70년대 우리나라의 작은 항구도시의 느낌이 났다. 흰색 상자를 쌓아놓은 듯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돔 모양의 지붕을 한 다른 건축물도 보인다. 거리 군데군데 우뚝 선 야자수가 아랍국가의 정취를 더한다. 처음 와 온 아랍의 도시, 탕헤르. 유럽의 도시와는 확연히 다른, 이곳이 아랍의 도시임을 느끼게 하는 이슬람 특유의 분위기를 물씬 느낀다.


막 친구가 된 미국인 여성과 함께 거리를 걸었다. 그녀와 나의 시선은 동시에 맨발의 소년들에게 머물렀다.  10세 전후의 사내아이들이 신발을 신지 않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 신발을 못 신을 정도로 가난한 아이들. 그들의 발이 많이 아파 보였다. 그들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지갑을 열어 약간의 돈을 그들에게 주었다. 신발을 사서 신을 수 있기를 바랐다.


탕헤르와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서 3일을 보냈다. 다음 행선지는 마라케시다. 라바트에서 밤 열차를 타고 마라케시로 갔다. 침대칸을 미리 예약했다. 자는 동안 마라케시로 이동했다. 94년 모로코의 기차는 설비가 꽤 괜찮은 편이었다.  지금은 훨씬 나아졌을 테지만, 그때도 쾌적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8시간 정도를 달리면 마라케시에 도착 예정이라고 했으나, 기차가 연착되어 10시간이 넘게 걸렸다. 밤 열차는 아침에 마라케시 역에 도착했다.


사막의 도시, 마라케시를 가다


마라케시에서 맞은 첫 아침. 어디선가 들려오는 코란 낭송 소리에 잠에서 깼다. 창문을 열고 거리의 풍경을 보았다. 마라케시는 온통 붉은색이다. 붉은 사막 위에 자리 잡은 마라케시. 건물도 온통 붉은빛이다. 어제 기차를 타고 오며 본 차창 밖에는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보았다. 붉은빛이었다. 이 붉은 흙을 이용해 건물을 지었으리라. 붉은 건축물 가운데 확연히 눈에 띄는 것은 모스크 (이슬람교의 예배당)였다.  투쿠비아 모스크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붉은색 건축물로 특유의 둥근 지붕과 뾰족한 첨탑이 하늘로 뻗어있다. 마라케시에서 제일 높은 건물로, 모로코의 3대 모스크 중 하나다. 도시 여기저기 야자수도 보인다.


아, 내가 모로코의 마라케시에 와 있다. 눈 앞에 이슬람 도시가 펼쳐져 있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의 한 장면이 현실 속에 나타난 것 같았다. 아침부터 들려오는 코란과 도시의 정경은 내가 북아프리카 아랍의 도시의 있음을 실감 나게 했다.


호텔이  마음에 든다. 별 3개짜리 4층 규모의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당시 모로코의 물가는 여행자에게는 부담없었다. 작은 수영장까지 갖춘 시설이 좋고 깨끗한 호텔이었는데, 하루 숙박료를 1만원 정도 지불했다. 위치도 좋아 주요 관광지가 대부분 근처에 있다.  갓 구어낸 모로코 전통 빵 홉즈와 바게트, 버터, 잼, 요구르트, 과일에 곁들어진 조식까지 제공된다. 커피의 풍미가 그윽하다.


마라케시에 도착한 첫날 어제, 마라케시의 명소 제마 엘프 광장을 둘러보았다. 서울의 남대문 시장과도 흡사한 마라케시의 재래시장이다. 마라케시의 농산물, 전통 그릇, 옷, 등과 같이 다양한 물건과 음식을 팔고 있었다. 이곳저곳 상인과 손님 사이에 흥정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영화에서 보았던 피리를 불며 뱀을 춤추게 하는 거리의 악사도 보았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많았다. 세계 어느 곳이나 시장은 삶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오늘은 엘 바디 궁전, 바히아 궁전, 마조렐 공원 등 명소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나의 마라케시 탐험이 시작되었다. 명소 관광 두 곳 정도를 마치고 지도를 보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모로코 전통 음식 타진을 잘하기로 유명한 식당을 찾고 있었다. 그 당시는 스마트폰은 커녕 휴대폰도 일반화되지 않은 시기였다. 지도 앱이 아니라 종이지도를 들고 목적지를 찾아다녔다. 여행은 여행 가이드 책의 정보에 의존해야 했다. 책에 나와있는 정보로는 그 식당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럴 때는 현지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최선이다.


마침, 소년과 소녀가 눈에 띄었다. 그들에게 식당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친절하게도 그들은 나를 식당까지 데려다주었다. 식당 앞에서 서로 헤어지가 아쉬웠던지 우리는 자기소개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남매로 소년은 메디, 소녀는 카디자였다. 내가 며칠 만에 모로코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모로코에 대한 좋은 인상을 말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 88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라고 말하며, 한국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다. 이렇게 우리의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자신에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나에게 그들의 전화번호를 주며 꼭 전화해 달라고 했다. 너무나 뜻밖의 초대였다.


메디와 카디자의 호의를 받아들여, 그날 관광일정을 마치고 그들에게 전화를 했다. 그들은 자신의 부모님이 허락했다고 나를 저녁에 초대한다고 했다. 모로코인 가족에게 초대받다니! 기쁘게 그들의 초대에 응했다. 카디자가 호텔로 나를 데리러 온다고 했다. 이렇게 나는 카디자의 가족의 저녁식사에 초대되어 그들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카디자 가족과의 저녁식사를 시작으로 우리는 가족처럼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메디는 고등학생으로 17살, 카디자는 22살로 전문대학을 마치고 치기공사로 일하고 있었다. 카디자와 메디에게는 모하메드라는 12살짜리 동생이 있었다. 카디자의 부모님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모로코의 전통음식을 정성껏 준비해 주었다. 카진, 홉즈, 쿠스쿠스, 전통 샐러드, 낙타 젖을 발효한 음료 등 가정식 모로코 전통음식을 대접받았다. 모로코 가족과 함께 하며 서로의 문화에 대해 소개하고 이야기하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이 처음 만난 동양인이라고 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궁금한 점이 많았다. 가족, 음식, 역사, 내가 사는 인천은 어떤 곳인지 등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마라케시 며칠 머무는 동안 그들의 집에 두 번 더 초대되어 다과와 차를 나누었다. 카디자와 메디와 마라케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현지인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맛집과 카페도 함께 다녔다. 카디자의 가족이 나를 그들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도 소개해 주었다. 그들은 모두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며칠 사이 수십 명의  모로코 친구가 생겼다.


마라케시의 여정을 마치고 다음 여행지를 출발할 때, 카디자와 그의 가족들은 나를 마라케시 기차역까지 배웅해 주었다. 우리의 우정은 내가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소식을 전했다. 이 친절하고 인정 많은 모로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그다음 해 여름과 겨울에 다시 모로코를 방문했다. 카디자의 가족과 친척집에 초대되어 며칠을 묵기도 했다. 카디자와 그녀의 사촌들과 자동차를 렌트해 모로코 전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모로코 가족이 생기다


카디자의 가족은 카사블랑카에서 열리는 그들의 대가족 모임에 나를 초대했다. 카사블랑카 바닷가, 대서양에 접한 별장에서 그들과 며칠을 함께 생활했다. 카디자의 가족과 일가친척들은 모두 마치 나를 가족의 일원 인양 대해 주었다. 거리감이 없이 나도 모로코의 문화에 동화되어 일주일을 보냈다. 카디자의 가족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촌들과도 아주 가까워졌다.


카디자의 가족, 친척과 지내면서, 모로코의 문화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많은 점에서 모로코의 문화는 내가 상상했던 이슬람 문화와는 상당히 달랐다. 외부인에게 왠지 폐쇄적일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내가 만난 모로코인들은 매우 개방적이고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의 사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자신들의 생각을 솔직하게 나누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냥 이방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질적인 문화에서 온 나를 가족의 일원처럼 대해 주었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나와 그들 사이에 경계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유쾌하고 흥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는 노래와 춤이 함께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표현했다. 정말  노는 민족이다. 그들과의 파티는  즐겁고 재미있었다. 예로부터 가무를 즐겼던 우리 민족과 모로코인들은 신명과 흥이 넘친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들과 나는 모로코의 민요를 부르고 민족춤을 추며 어우러졌다. 한국의 노래와 춤을 보여 달라는 모로코 가족들의 요청에 아리랑을 부르며 우리의 춤사위를 곁들이기도 했다.  


가장 놀라웠던 것 중 하나가 자유로운 여성들의 문화였다. 내가 생각했던 그런 억압되고 폐쇄적인 아랍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전신을 천으로 둘러싼 채 히잡을 머리에 쓰고 다니는 여성은 보지 못했다. 그들의 모습은 유럽 나라의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본 카디자와 그녀의 가족, 친구들 중에 대부분 히잡을 쓰지 않았다. 여성들이 더러 히잡을 가지고 다니며 모자처럼 썼다 벗었다 하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거리에서 모로코의 여성들은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90년대 한국에서 여성이 거리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욱 놀라운 장면을 수십 명의 가족 성원이 참여한 카사블랑카 가족 파티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딸, 아들, 손주, 며느리, 사위까지 일가친척이 다 모인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갓 결혼한 20대의 며느리가 시조부모, 시부모 앞에서 맞담배를 피는 모습을 보았다. 이 장면은 내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젊은 며느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소파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며 시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었다.


젊은 며느리들은 대부분 음식을 먹으며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었다. 한쪽에서는  시어머니와 시할머니가 음식을 나르고 차리는데 분주했다. 한국식 유교 문화에 익숙한 나에게는 이 모습 또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명절이나 가족행사 때면 맏며느리였던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들이 전날부터 하루종일 그리고 새벽까지 음식 장만을 하셨다.  며느리가 모든 부엌일을 의례히 다 해야 하는 것처럼 여기는 우리의 관습이 부당하다고 여겼던 나였기에 이런 모습이 한편 부럽기도 했다.


내 눈에 비친 모로코의 여성은 가족관계에서도 자유로와 보였다.  모로코의 며느리는 자신의 욕구와 주장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표현했다. 이날, 자신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며느리를 보는 시어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대등하고 다정한 고부관계를 보았다.


한편, 정감 넘치고 인정 많은 그들은 많은 면에서 한국인들과 닮았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그들은 생활의 중심이 가족이었다. 산업화의 초기 단계였던 모로코는 그 당시 농업 중심의 국가였다. 핵가족이 아니라 대가족 중심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으리라. 그들에게 가족은 직계뿐만이 아니라 사촌과 친척까지를 포함하는 듯했다. 가족의 대소사에 그들은 자주 모여 음식을 나누고 가족의 정을 나누었다. 사촌이 출장으로 파리를 2주간 다녀왔다. 그녀의 귀국을 축하하기 위해 일가친척이 모여 파티를 열었다. 그녀의 성공적인 출장과 이로 인해 그녀가 회사에서 그녀의 능력을 높게 평가받게 될 것이라는 것에 모두 기뻐했다. 끈끈한 가족애와 유대는 그 당시 모로코인들의 삶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가치로 보였다.


카사블랑카의 가족들에게서 받은 호의와 환대를 생각하면 25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서로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과정이었다. 붉은 토기에 숯불로 모로코 전통 음식 타진을 함께 만들어 먹곤 했다. 모로코 전통 빵인 홉즈에 손으로 찍어먹던 타진은 별미였다. 금세 손으로 먹는 것에 익숙해졌다. 7박 8일 계속되는 사촌의 결혼식에 초대되기도 했다. 카디자와 함께 손에 했던 헤나, 페즈로 여행 가서  당나귀를 타고 다녔던 일, 길모퉁이 카페에서 함께 즐기던 생잎 민트 티, 함께 갔던 사막 여행... 추억의 단편들이 하나씩 피어오른다.    


나를 모로코라는 나라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한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따뜻하고 열려있는 사람들. 인정이 넘치며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멀리서 온 이방인을 가족처럼 대해주었던 사람들. 그들이 그리워 모로코를 세 번 찾아갔다. 나의 모로코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여행하면서 나도 그들 중 하나라고 느꼈다. 메카를 향해 하루에 세 번 절을 하고 라마단을 실천하는 종교적인 의식을 제외하고는 그들과 일체감을 느끼는 데는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서방세계와 이슬람 국가와의 대립과 반목은 어쩌면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이해하려고조차 시도하지 않는 닫힌 마음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문화와 종교의 차이가 결코 분쟁의 원인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 전에는 잘 몰랐던 이슬람 문화를 체험하면서 서로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지구 상에 존재하는 대립과 분쟁은 누그러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다. 우리의 평화로운 공존을 방해 하는 것은 편견과 오해가 아닐까.

 

먼 나라에서 온 이방인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이해해준 나의 모로코 가족들. 그들을 통해 나의 문화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종교나 문화의 차이는 결코 친구가 되고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일깨워주었다.  우리는 결국 같은 사람들이라는 너무도 평범한 진리를 체험했다. 생김새, 언어, 문화, 종교가 다르지만, 또한 서로가 통하는 무언가 있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기반으로 믿음을 쌓아 간다면, 우리는 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태도와 지혜가 필요하다.


나의 따뜻하고 인정 많은 모로코 가족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그들과의 교감, 그들과의 추억은 언제나 내 가슴속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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