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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Feb 15. 2021

여행에 미치다

새처럼 자유롭게 세계여행

20대의 운동하는 삶이란


청춘은 열정이 넘친다. 역동적이다. 6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민주화의 함성을 쏟아내던 주먹 불끈 쥔 젊음이었다. 햇병아리 교사로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던 뜨거운 가슴의 젊음이었다. 배낭 메고 지도를 벗 삼아 세계를 여행하던 자유로운 젊음이기도 했다.


우리의 20대, 모두 나름의 이유로 아름다웠으리라. 20대의 풍랑 속에서 경험하고 고뇌하고 느끼며 내가 형성되었다. 20대의 반추가 나의 30대가 되고, 40대, 50대가 되었다. 20대의 나는 진실을 말하고 정의를 가슴에 품으며 의기충천했다. 때로는 어떤 삶을 선택할지 괴로움 속에 번민했다. 때로는 구름 위를 뛰어다니는 것처럼 들뜨고 즐거운 마음이었다. 매 순간 치열하게 살았고 최선의 선택을 했다.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 떠났다. 나의 최선이었다. 매 순간을 불태우라는 인생의 선물인 시간을 열정을 다해 살았다. 순간순간 불꽃처럼 살고자 했다. 


27살 여름, 나의 삶의 새로운 불꽃이 타올랐다. 여행에 미쳐 세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교사를 하던 시절이다. 동남아시아 배낭여행에서 시작해서 유럽으로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넓혀갔다. 세계를 무대로 한 나의 탐험과 도전이 이어졌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내내 여행에 미쳐 몇 년을 배낭을 메고 세계 30여 개국을 누볐다.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다니면서도 지치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호사스럽게 다니는 편한 여행은 아니었다. 새까맣게 탄 얼굴, 마르고 껑충한 몸으로  20 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다녔다. 밤기차에서 잠을 자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루에 20km 이상을 걷는 날이 허다했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잡힌 물집이 터지고 잡히기를 반복했다. 한 달 정도의 여행을 마치면 나의 발은 마치 혹독한 연습을 견뎌낸 육상선수나 발레리나의 발을 하고 있었다. 힘겨운 여행이었다. 매일매일 지도를 보고 목적지를 찾아다니며 새로운 곳을 발견하고 탐구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그 안에서 진정한 나를,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의 재미와 즐거움을 발견했다. 


나의 모습이 달라졌다. 거리에서 최루탄을 맞으며 독재에 항거하던 대학생 때의 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실로 큰 변화다. 학생운동과 교사운동을 거치면 나는 굳어져 있었다. 지금도 사회운동가 하면 조금은 경직된 이미지가 연상이 된다.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사회운동가들의 모습은 결연한 투사의 모습 자체였다. ‘투사는 머리에 구호를 쓴 띠를 두르고 주먹을 불끈 쥔 채 하늘로 팔을 뻗으며 구호를 외친다. 최루탄과 지랄탄의 뿌연 연기 속에서는 물러서지 않으며 굳건히 투쟁의 자리를 지킨다.’  나도 딱 그런 모습이었다. 


교사로서 전교조 활동과 함께 했던 처음 몇 년은 의미 있게 채워졌다. 불법단체인 전교조에 대한 탄압으로 어려움도 많았지만,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나의 시간과 열정을 쏟았다. 그 시간들은 내게는 정말 보람되고 소중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 원하는 무언가를 다 채워주지는 못 했었다. 처음에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나를 찾고 싶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20대의 나에게는 인생의 결핍이 있었다. 20대의 평범한 대학생이라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그 또래의  경험이 부재했다. 대학 4년을 대학생 운동단체에서 만든 구호가 적힌 티셔츠에 운동화 몇 켤레로 났다. 화장을 하기는커녕 로션도 제대로 바르지 않은 얼굴로 대학시절을 보냈다. 여름에는 뙤약볕 아래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겨울에는 추운 겨울바람에 빨갛게 튼 얼굴로 살았다. 외모를 가꾸는 일은 사치로 여겨졌고 그럴 시간도 조건도 되지 못했다. 학생운동을 하며 요구되는 나의 역할, 나의 일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나에게는 여성으로 외모를 가꾸는 경험뿐만 아니라  한창 풋풋하고 싱그러운 나이에 느끼는 희로애락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 이성을 제대로 사귀어 보지 못했다. 그 흔한 소개팅이나 미팅을 해 본 적도 없다. 연애, 실은, 별로 관심도 없었다. 연애뿐만 아니라, 보통의 대학생이 겪는 그런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경험하지 못했다. 놀이와 즐거움, 재미와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다. 


나의 일상은 학생운동이 중심이었다. 학생운동에 필요한 일과 관계 속에서 삶이 이루어진다. 책을 읽고 토론을 했고, 시위에 참여하고 유인물을 만들어 돌렸다. 폭압의 시대,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저항과 투쟁은 내게는 너무도 당연한 삶의 방식이었다. 많은 양의 독서를 감당해야 토론에 참여할 수 있기에 전공과목에 대한 공부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대학 내내 평점이 4.5 만점에  2.7을 넘지 못했다. 학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공부를 못 해 학점관리를 못 하는 것에 대한 걱정보다는, 비밀리에 하는 활동으로 붙잡혀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가두투쟁 참여와 반정부 유인물 배포는 언제나 연행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개인적인 욕구, 성취, 즐거움은 포기해야지만 가능한 생활이었다. 


교사가 되어서도  나의 생활은 전교조와 지역사회운동단체가 중심이었다. 집, 학교, 전교조, 지역 청년운동단체, 이 네 공간의 내 삶이 이루어지는 전부였다. 이 공간에서 만들어진 인간관계가 내 사회관계의 모두였다. 운동은 내 삶의 모든 것이었다. 당시, 우리 운동하는 사람들 안에서 하던 말이 있다. 


“운동은 삶이다.” 진정 무거운 말이다. 이는 나의 모든 것을 운동에 바침을 의미한다. 나의 열정, 노력, 시간 그리고 즐거움마저도 온전히 다 내주어야 하는 삶이다. 이것이  내가, 우리가 사회운동을 이해했던 방식이었다. 그렇게 몇년을 지내며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일에 죄의식을 갖게 되었다. 나의 욕구를 누르는 일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런 높은 결의와 헌신에 대한 요구는 그 당시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독재정권의 폭압 속에 공개된 활동이 어려운 시기였다. 많은 활동들이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언더그라운드 방식 조직과 모임은 운동 참여자들에게 엄격한 도덕적 훈련과 큰 헌신을 요구했다. 친구들이 연행되고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양심을 지키고 정의에 편에 섰던  선배교사들이 교단에서 쫓겨났고 전교조는 불법단체로 탄압을 받은 상황이었다. 경직된 상황은 경직된 우리의 모습을 낳았다. 


그런 나에게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거리의 투사에서 비행기를 타고 세계 여러 나라를 누비는 여행가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세계 여행에 몰입하며 나에게는 큰 갈등이 생겼다. 전교조 활동을 비롯 한 사회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세계여행을 선택할 것인가? 온전히 나를 던져 헌신하는 운동적 삶만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에게는 운동을 하는 삶과 운동을 하지 않은 삶이 있을 뿐이었다. 그때는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며 사회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삶은 내게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첫 배낭여행을 떠나기 전 모든 일에 지친 상태였다. 수많은 모임과 조직 속에서 대의를 실천하기 위한 일상이 이어졌다. 나를 다 태워 더 이상 내가 남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번아웃 상태가 된 것이다. 나라는 인간이 가진 한계를 넘어 너무 힘들게 나를 몰아붙였다. 학교, 전교조, 지역사회 시민운동이 전부인 나의 삶에는 내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신나는 무언가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치와 보람으로 가득한 삶이었지만, 그것이 나를  온전히 행복하게 해 주지는 못 했다. 그때는 왜 그런지 몰랐다. 그동안 열심히 해 온 활동인데… 모든 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여행이었다. 즐겁고 행복한 나의 모습을 찾고 싶었다.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새처럼 자유롭게 세계여행


새로운 세계,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람을 만나자! 결행했다. 1992년 여름 배낭 하나 메고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떠났다. 후회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


그렇게 난생 처음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여행이 주는 자유로움, 더구나 내가 사는 곳과 전혀 다른 자연과 문화 속에서 느끼는 자유로움은 진정 새로운 것이었다. 새로운 세계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럽, 미국, 오세아니아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을 만나 그들과 대화했다.


지구촌 이곳저곳을 다녔다. 다른 나라의 문화와 풍토를 체험하면서 내 삶이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앞에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어느 날은 프랑스의 파리에서 세느 강변을 걸었다. 어느 날은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에서 라이브 공연을 즐기며 커피를 마셨다. 어느 날은 고색창연한 프라하의 고성에서 한 때를 보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올법한 마라케쉬 이슬람 사원의 앞마당을 걸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낙타를 타고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렀다. 


각 나라의 자연 풍광과 건축물은 다 나름대로 독특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도 그 나름의 역사와 환경 속에서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세상은 넓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피부색과 생김새, 언어, 풍습은 다르지만 다들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를 보고 느끼는 것 자체가 공부였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얘기하고 생각을 교환하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긴장 속에서 살던 경직된 나의 모습은 어느새 자유분방한 20대 청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다양한 문화권의 세계의 젊은이들과 소통하며 행복감을 만끽했다. 그들과 금새 친구가 되었다. 여행은 내 자신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했다. 


세계여행 덕분에 공부가 아닌 공부로 즐거운 지적 훈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학기 중에는 여행지의 역사와 문화, 예술 등에 관한 책을 읽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 문화, 인물, 건축물, 예술품에 대한 풍부한 상식과 지식을 얻게 되었다. 사전에 책을 통해 습득한 지식은 현지에서 체험을 통해 살아있는 나의 지식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세계여행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정보도 얻으며, 세상을 보는 시각도 넓혀갔다.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경계가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세계여행은 나의 관심의 영역을 확장시켜주었다. 세계여행이 동기가 되어 시작된 영어에 대한 관심은 영어학습으로 이어졌다.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을 위한 영어회화능력이 필수적이었다. 숙식을 해결하고, 관광지와 문화유적을 찾아다니고, 교통수단과 현지 시설을 이용하려면 말이 통해야 했다. 첫 해외여행을 떠나기 전 연습하고 암기한 몇 개의 문장과 표현을 사용하며 근근이 여행을 꾸려갈 수 있었다. 그때의 나의 영어회화 실력은 물건을 사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상황에서 기본적인 의사표현을 간신히 하는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매번 여행을 거듭하며 나의 영어회화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성공적인, 알찬 여행을 위해 영어회화 연습에 열중했다. 영어회화 교재를 달달 외우며 여행에서 써먹을 표현을 준비했다. 이렇게 열심히 연습한 영어회화 표현을 여행지에서 외국인과 대화하며 써먹는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학습동기가 매우 현실적이고 확실하니, 영어공부는 공부가 아닌 재미이자 취미였다. 여행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학습의욕을 고취시켰다.


나의 학습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겠다. 나는 텍스트를 통째로 소리 내어 외우는 방법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언어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성대를 울리고 혀와 입술을 움직여 발화될 때 진정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는 “영어책 한 권 읽어 봤니”의 저자 김민식 작가가 권하는 학습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방법에 동의한다. 한 언어를 구사하는 데는 패턴, 즉 문장 구조를 습득하고 어휘를 그 문장 구조에 맞게 활용하는 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아주 쉬운 텍스트를 정해 반복적으로 소리 내어 읽고 외우는 것은 효과적인 영어정복 방법이라고 믿는다. 1992년부터 나는 쉬운 텍스트를 완전히 외우는 방식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외운 영어 표현이 툭 치며 바로 튀어나올 정도로 자동적으로 입에 배게 했다. 


세계여행으로 불붙은 영어공부는 학문적 관심으로 이어져 나중에 응용언어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미국 공립학교에서 이주민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나의 작은 호기심과 결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삶의 여정을 전개시켰다. 진정 여행은 나의 인생의 방향과 인생의 많은 부분을 영향을 미쳤다. 


첫 1993년 첫 유럽여행에서  43일 간 유럽 10여 개국 20여 개 도시를 다녔다. 여러 나라 여러 도시를 섭렵하는 방식이었다.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 여행이었다. 많이 가고 많이 보고 사진 많이 찍는 것이 여행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나라와 도시를 가봤는지가 성공적인 여행의 기준이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개의 나라 3-4개의 도시를 가보기도 했다. 첫 유럽 여행은 수십 개의 도시를 그야말로 맛보기식으로 여행했다. 


이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 이런 식의 도장 찍기 여행은 진정 내기 추구하는 여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원하는 여행 스타일을 찾았다. 많은 곳을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한 두 나라를 정해 보다 깊이 있게 그 나라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점점 여행의 경험이 무르익으면서,  현지의 문화, 풍물, 음식을 제대로 즐기고 음미하는 여행을 추구했다. 한 달 일정 여행에 한두 나라를 여유 있게 즐기며 현지 사람들도 사귀었다. 여행이 일상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여행을 통해 편견을 깨다


여행은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야를 넓혀 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자연환경과 문화환경에 나를 던져놓는다.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보고 느끼고 부대끼는 과정을 통해  통찰하고 성장한다.  특히, 패키지 그룹 여행이 아닌 자유 여행에서는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경험이 조합되어 펼쳐질 감흥과 배움의 폭이 더욱 넓어진다. 자유여행은 비일상성에 새로운 경험과 모험이 만나 보다 스릴 넘치는 여행의 재미를 더해준다.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고  모든 일정이 짜인 패키지여행은 나에게는 매력이 없었다. 


여행의 묘미는 우연성에 있다. 우연히 발견한 거리 카페, 우연히 만나는 여행자들과 현지인들. 우연히 발견한 거리 카페에 매력에 빠지면 그 카페의 고유한 분위기와 커피 맛을 잊지 못해 다음 방학에 또 찾게 된다. 그 카페가 있는 동네와 도시는 여유를 즐기는 삶이 있는 다음 여행지가 된다. 여행지에 다른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과 친분이 생기면 어느새 친구가 되고 우정이 싹튼다. 그들을 만나러 그들이 사는 나라, 그들이 사는 도시를 방문하게 된다. 그들이 내가 사는 한국을 방문하기도 한다. 나는 그들의 여행 가이드가 되어 한국의 문화와 풍물을 소개한다.


여행은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여행의 과정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하며 내가 가졌던 특정 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편견의 파괴를 통해 나의 사고와 인식을 크게 변화시킨 세 가지의 여행 경험이 있다. 그중 가장 최근 여행은 북한 방문이었다.  나머지 두 가지 경험은 나의 20대의 세계여행에서 일어났다. 하나는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만난 가족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만난 게이 부부였다. 여기서는 카사블랑카에서 생긴 가족 이야기를 하겠다.


두 번째 유럽 여행에서 스페인에서 2주를 보내고, 나의 발길은 아프리카로 향했다. 알람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그라나다에서 며칠을 머물며 그 다음 행선지를 아프리카로 정했다. 여행은 미리 계획도 하지만, 때로는 여행을 하면서 그때그때 상황이나 느낌에 따라 즉흥적으로 다음 행선지를 정하기도 한다. 그라나다에서 만난 호주 여행자 들으로부터 모로코에서의 멋진 여행 경험을 전해 들었다. 아름다운 자연, 매력적인 문화, 친절한 사람들의 나라라고 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일군의 호주인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같은 게스트 하우스에 며칠을 묵으며 친해졌기에 그들로부터 모로코 여행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라나다에서 가까운 항구에서 배를 타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면 바로 북아프리카 모로코다. 배로 2시간을 가면 모로코의 항구도시 탕헤르에 닿는다. 


모로코를 가기로 결정하는 데는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그때는 1994년.  이슬람 문화에 대한 오해가 편견이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던 시기다. 실은, 지금도 그때보다 많이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이슬람 하면 떠오르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선뜻 모로코 여행을 결정하기 어려웠다.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종교, 여성차별적인 문화, 안전과 치안에 대한 염려가 나를 주저하게 했다. 


 모로코에 가도 될까? 고민하던 중, 92년 태국 치앙마이 트레킹에서 만난 인도네시아 무슬림 부부가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슬림이라고 소개하며 무슬림은 평화를 사랑한다고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힘든 산악 트레킹 과정에서 늘 뒷처진 다른 여행자들을 챙겼다. 치앙마이 원주민들을 도와 음식을 나르고, 여행자들이 먹은 자리를 치웠다. 허드렛일을 솔선수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 인도네시아 국민 중 다수가 이슬람교도임을 알았다. 타인을 배려하는 무슬림 부부의 모습에서 내가 알고 있는 이슬람 문화가 전부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내려놓는 출발이었다.


내가 가진 이슬람 종교와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가? 이슬람은 생소한 종교이고 문화이다. 영화나 미디어를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종교와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했다. 


이슬람 국가 하면 떠오르는 첫 이미지는 히잡을 쓴 여성이다. 자신의 전신을 천으로 둘러싸고 머리와 얼굴을 다 가린 채, 히잡이 허용한 작은 공간으로 세상을 본다. 그 세상은 여성의 인권이 전혀 존중되지 않는 나라이고 여성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문화가 지배하는 남존여비가 사회의 기본 가치인 곳이다.  이 문화에서는 여성은 남성의 도구이고, 인격이 전혀 없는 존재로 알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자유롭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이슬람 여성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뿐인가. 무슬림은  무자비하고 폭력적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내가 어려부터 봤던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이슬람교도들은 기독교를 모독하는 불경한 사람들로 묘사되었다. 초등학교 때 이미 나의 머릿속에는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내가 접한 수많은 영화와 영상에서 그려진 그들의 종교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이슬람인들은 살상을 위해 사람을 마구 죽이는 무리들이었다. 그들에게 생명에 대한 존중은 전혀 없었다. 이슬람인들은 언제나 잔인한 이교도였다. 


브룩 쉴즈 주연의 영화 사하라(Sahara 1983년작)에서 본 무슬림들의 모습이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무슬림 남성들이 백인 여주인공 브룩 쉴즈를 위협하고 납치한다. 그들은 괴한이고 폭력배다.  폴 뉴먼 주연의 영화 영광의 탈출(Exodus, 1960년작)은 이스라엘의 건국과정을 그리며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묘사한다.  우리는 서구에 의한 만들어진 수많은 영화를 통해  서구인들의 눈으로 아랍국가와 이슬람 문화를 본 것이다. 


 내 눈에 쓰인 이슬람에 대한 색안경이 벗기로 했다. 이슬람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편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전과 치안은 괜찮을까?  호주 여행자들에게 재차 확인했다. 호주 여행자들은 상식적인 안전 수칙만 지킨다면 여행하는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치앙마이에서 만난 무슬림에 대한 따뜻한 기억과 그라나다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호주인들의 정보에 힘입어 모로코를 가기로 결정했다. 그라나다에서 기차를 타고 타리파로 이동했다. 


배를 타고 지브롤터를 건너 모로코의 항구도시 탕헤르에 도착했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 모로코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였다. 2주일의 여정을 통해 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슬람 문화에 대해 가졌던 편견이 산산이 깨진다. 나의 무지를 절감하게 된다. 인간과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소중한 체험을 한다. 가장 가슴 뛰는 일은 마음을 나누는 가족과도 같은 모로코 친구가 생겼다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모로코 여행을 함께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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