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 역사의 현장에서 배우다
나의 20대, 진실을 말하다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고 한다. 그때는 사람마다 달리 찾아오는 것 같다. 나는 그때가 늦게 찾아온 경우다. 40이 넘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보통은 청년기에 학업에 매진에 학문적 성취를 이룬다. 한창 공부할 청년기의 나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소위 잘 나가는 전도유망한 골든 애플이 아니었다.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렸던 불효 막심한 장녀였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선생님이 되고 싶어 교대에 갔다. 넉넉하지 않은 집 오 남매의 장녀에게는 대학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졸업 후 100% 취업이 보장되는 전공에, 차비도 거의 안 드는 가까이에 있는 국립대학인 인천교육대학에 가는 것이 부모님의 권고였다. 나 역시 교단에 서는 것이 이 꿈이었고 가정형편을 고려했기에 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교대 진학을 결정했다.
대학시절 나는 교사의 꿈을 키우며 학업에 충실할 수 없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80년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자가 대통령으로 앉아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강의실에서 수업에 열중하는 대신 거리에 섰다. 광주의 진실을 말했다. 학살자를 향해 물러나라고 외쳤다. 진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활동을 했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실상을 알리는 전단지를 만들어 몰래 가가호호 돌리기도 했다. 거리 시위를 하다가 전경에 쫓겨 어느 집 다락방에 은신하기도 했다.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나에게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다. 21살의 나는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시간을 겪게 되었다. 가두 투쟁을 하다가 연행되어 구타와 매질을 당했다. 유치장에 갇혀 곤욕을 치렀고 구류를 살았다.
1986년 초부터 직선제 개헌 논의가 나라를 뜨겁게 달구었다. 지금은 5년마다 선거를 통해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택한다. 그 당시에는 대통령 선거방식이 간선제였다. 광주 민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군사 독재에게 대통령 간선제는 자신의 장기집권을 보장하는 법적 장치였다. 전두환 군사 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 민주세력의 한결같은 목소리였다.
1986년 3월 1일 개강을 하루 앞두고 나는 “직선제 쟁취를 통한 전두환 군사정권 퇴진’를 요구하는 가두시위에 참여했다. 시위에 나갈 때마다 나는 항상 긴장했다. 그날도 시위에 나서기 위해 운동화 끈을 동여매는 내 손은 긴장으로 떨렸다.
가슴은 두 방망이 치듯 쿵쾅거렸다. 혹시라도 연행되면, 경찰에 의한 폭행, 감금… 최악의 상황이 연상되었다. 학교에서 제적당할 수도 있다. 그 당시, 거리 시위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였다. 나를 온전히 내놓는 일이었다. 1985년에도 기습 가두시위에 몇 번 참여했다. 매번 시위에 참여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리는 위험한 상황을 경험했다. 쫒아오는 전경이나 의경를 피해 운 좋게 붙잡히지 않았다. 그날도 잡히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리고, 거리에 나섰다.
드디어 시위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떴다. 흩어져 있던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50여 명이 금세 스크럼을 짜고 달리기 시작했다. 구호를 외쳤다. “광주학살 주범 전두환은 퇴진하라!” “직선제로 독재타도!” 도로 한가운데를 달린다. 우리의 구호가 시민들의 가슴에 닿기를 바라며 목청 높여 외쳤다. 가던 길을 멈추고 시민들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예정된 지점에서 우리는 멈추었다. 거리의 시민들에게 무고한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의 실체를 알리고 직선제 개헌을 통해 군부독재를 몰아내자는 내용의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해산하라”는 시위 주동자의 말이 떨어졌다. 우리는 각자 미리 봐 둔 퇴각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전경차가 출동했다. 전경과 의경이 우리를 뒤쫓았다. 군홧발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헉헉거리며 전력질주를 했다. 숨이 차올랐다. 오로지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오르막길에 들어섰다.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누군가가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사복 경찰에게 붙잡힌 것이다. 아스팔트 위를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나는 그 순간 마치 내가 짐승처럼 취급당하는 느낌이었다. 그에게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거리 한복판에서 발길질이 이어졌다. 구둣발에 짓이겨진 듯한 고통보다 짐승처럼 취급당하는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더 괴로웠다.
경찰서로 넘겨지는 과정에서 형사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다. 정보과 형사들이 돌아가며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고 다리를 구둣발로 걷어찼다. 나는 경찰서 바닥에 고꾸라졌다. 허리춤을 들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또다시 주먹이 귀를 가격했다. 귀가 멍멍했다.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청력이 많이 안 좋아졌다.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폭력을 당했다. 공권력에 의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폭행을 당한 것이다. 그날 나의 인격과 인권은 형사들에 의해 경찰서 콘코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것이 86년 3월의 대한민국의 인권 상황이었다.
유치장에서 보낸 10일
경찰서 지하 유치장에 갇혀 일주일을 조사를 받았다. 주동자를 불라는 종용과 협박이 계속되었다. 첫날과 이튿날, 구타와 매질이 계속되었다. 나는 주동자를 알지 못했다. 나와 함께 하는 동료나 선후배의 이름을 말하라는 협박이 이어졌다. 나는 끝내 그 누구의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해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다. 약식 재판에 넘겨져 구류 3일을 받았다.
태어나서 내가 경험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35년 전의 일이지만 너무도 생생히 기억난다. 어두컴컴한 지하 유치장. 차거운 마룻바닥 위에서 국방색 얇은 군용 담요 한 장을 덮고 자야 했다. 3월 초여서 아직은 쌀쌀한 날씨였다. 새벽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열흘 밤을 차디찬 지하 유치장에서 이를 덜덜 부딪히며 추위에 떨었다.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던 것은 화장실 문제였다. 유치장 화장실은 반개방형이었다. 내가 용변을 보는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화장실을 이용하는 순간까지도 감시당했다. 21살의 나에게는 너무도 수치스러운 상황이었다. 열흘 동안 제대로 화장실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정말 끔찍한 시간들이었다.
나를 면회 온 엄마를 마주했던 순간도 내게는 고통이었다. 조사가 끝나고 구류를 사는 동안 경찰서 유치장으로 엄마가 찾아오셨다. 내 손을 잡고 그저 눈물만 흘리셨다. 엄마의 손에는 분홍색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일주일 내내 옷을 갈아입지 못 한 나를 위해 옷가지를 챙겨 오셨다. 영치금도 넣어주셨다. 낡은 노란 양은 도시락에 담긴 누런밥과 짠무 대신 , 어머니가 사주신 흰쌀밥이 나오는 백반을 먹을 수 있었다. 유치장에서 열흘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하얀 쌀밥에 소고기 뭇국으로 상을 차려주셨다.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개강 후 2주를 결석하고 학교에 나갔을 때, 수강하고 있던 교수들로부터 강의시간에 노골적인 모욕과 괴롭힘을 당했다. 데모 나하고 다니는 교대생은 학교에 수치라고 했다. 과학교육 관련 모 교수로부터는 자신의 수업에 들어오지 말라며 나를 강의실에서 쫓아냈다. 공권력의 폭력에 이어 진리의 전당인 대학에서 조차도 교수들의 언어폭력과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었다. 데모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3년 반을 더 학교를 다녔다.
교사가 되었다. 내 생계를 내가 책임지는 독립적인 생활인이 된 것이다. 불의에 저항하며 내 생계를 책임졌다. 89년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도, 진실과 정의를 외면하지 않는 교육자가 되려고 전교조에 참여했다. 그 당시 전교조는 불법단체였다. 불법 단체인 전교조에 참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학교 관리자들과 교육청으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불이익을 당했다. 타협하거나 굴하지 않았다. 그저 신념을 지키며 살고자 했다.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참 교육 실천을 위한 다양한 전교조 모임과 연수에 참여했다. 글쓰기, 사진, 풍물, 전통악기, 레크리에이션 등 초등교사로 필요한 다양한 지식과 기능을 익혔다.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며, 20대의 중후반을 살았다.
어두운 폭압의 시대, 불의한 정권에 저항하며 정의로운 세상을 꿈꿨다. 그 삶의 한가운데서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에 눈을 떴다. 인식의 지평을 넓였고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배웠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큰 공부를 한 것이다.
역사의 현장에서 공부하다
나의 20대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공부를 했다. 공부는 학교나 책에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하는 것이라고 나름의 소신이 있었다. 80년대 관통하는 시대의 아픔은 나의 것이었다. 80년 광주는 나에게는 일종의 부채였다. 역사가 나에게 주는 과제라고 생각했다. 시대의 슬픔과 고통을 공감하며 그 안에서 배우고 성장했다. 사회와 역사를 바로 보고자 공부했다. 정치, 경제, 역사, 사회,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독서로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인간과 삶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가 항상 내 고민의 중심이었다.
실제로 뜻을 함께 하는 이들과 책을 읽고 토론하고, 나의 인식을 실천했다. 이러한 모든 경험은 20대인 나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고 이후 나의 삶의 큰 정신적, 지적 자산이 되었다. 이 시기의 치열했던 삶의 체험은 30대, 40대를 거쳐 50대의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내게는 생의 소중한 공부였다. 20대에 그 어느 학교에서도 할 수 없는 진정 가장 값진 공부를 한 것이다.
그 시기 내가 쏟았던 열정과 노력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개인적 성공과 성취라는 면에서는 희생과 불이익을 감수하는 과정이었다. 대학시절 내내 내 평점은 2.7 미만이었다. 시위에 참여하느라고 기말시험을 못 봐서 1학기를 더 다녀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삶에 매 순간 최선을 다했기에 단 한 번도 공부 못한 대학시절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을 수 있는, 미래의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을 기회를 잃을 수도 있었다.
87년 6월 항쟁 이전의 정치상황은 매우 폭압적이었다. 거리 시위로 연행되어도 구타와 고문이 가해졌고 구류형을 받거나 심지어는 구속되어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연행과 경찰폭력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나는 시위에 참여하였다. 나의 인식과 신념에 대한 실천이었다.
나의 세상과 삶에 대한 인식과 통찰을 바탕으로 한 실천은 오늘 이곳 보스턴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의 손을 잡아주며 다시는 그런 참사가 고국에 일어나지 않도록 그 진실 규명을 위한 작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반도의 모든 고통과 악의 근원인 분단체제를 끝내고 고국에 영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한국전쟁 종식 결의안을 공동 발의하도록 미 의원들을 설득하고 있다. 미동포 사회와 미대 중들에게 강연, 집회, 시위 등을 통해 한반도 평화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대의 가슴 가득했던 진실과 정의에 대한 열정은 어느새 시간이 흘러 50대의 가슴에도 살아 있다. 미국 보스턴에 이주민으로 살면서 세월호 참사는 다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함께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불의에 짓눌러 고통받는 이웃의 고통이 나의 것으로 다가왔다. 결국, 타인이 아닌 우리의 고통, 나의 고통이다. 70년 전쟁과 분단으로 우리 민족은 고통받고 있다. 분단 체제는 우리 사회, 우리 모두의 삶을 옭아맨다. 우리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다.
나와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작은 일을 실천한다. 나는 오늘도 세월호 인권 시민 운동가, 평화운동가로서 거듭나고 있다. 늘 부족하지만, 그 부족함을 알기에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오늘도 쉬지 않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