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발견한 하버드
하버드에서 스승을 만나다
하버드 교수는 다양하다. 물론 보수적인 학자도 있고 진보적인 학자도 있다. 그렇다면, 내게 ‘진보적’ 이란 무슨 의미일까?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사회 구조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문제로 여겨 함께 연대해 정의와 평등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태도와 지향을 지녔다면, 나는 그를 진보적이라고 할 것이다.
진보적인 학자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Bruno Della Chiesa. 그는 그의 첫 강의에서 자신을 소개했다. 교육 신경과학자이며 언어학자인 그의 이력은 내게는 색달라 보였다. 그의 전직은 프랑스 정부의 외교부 관료와 OECD 교육 연구 및 혁신 센터 OECD Centre for Educational Research and Innovation (CERI)의 프로젝트 매니저였다. 그 이후 하버드에서 글로벌 세계의 학습: 언어 습득, 문화 인식, 인지적 정의 “Learning in a Globalizing World: Language Acquisition, Cultural Awareness, and Cognitive Justice”를 수년간 가르쳤다.
첫 수업에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배어 나오는 진보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감지했다. 현실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정신이 번뜩였다. 그는 나와 같은 과의 사람이란 걸 느꼈다. 일종의 동류의식이라고 할까. 그 교수의 진보성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백인우월주의, 서구 중심주의의 허구성과 부당함을 비판했다. 그는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를 고무시키고 촉진했다. 다양한 학생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았다. 학생들 스스로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학생들은 사고의 폭을 넓히고 자신에게 내재된 비판정신의 칼날을 갈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토론 수업은 늘 열기와 열정에 가득 찼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각자의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배경지식과 경험을 토론과 수업에 가져와 우리의 인식과 지식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며 함께 성장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한 예를 들겠다. 우리는 새뮤엘 헌팅턴 Samuel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 Clash of Civilizations을 읽고 토론했다. 헌팅턴은 미국 보수학계를 대표하는 정치학자로 손꼽힌다. 문명의 충돌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와 미국의 군사주의를 합리화하는 논리의 허구를 꼬집었다. 그의 세계 분할은 지극히 서구 중심적이다. "서양의 이익, 가치, 권력에 도전하기 위해 유교와 이슬람의 연결고리가 출현했다"는 표현은 서구 중심적 세계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표현은 서구의 이익, 가치, 권력에 도전하는 어떤 권력이나 집단이 세계의 적이라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지성과 비판이 함께 하는 토론에 참여하며 나를 재발견하는 희열을 느꼈다. 다음은 수업 중 토론에서 밝힌 나의 견해다. 나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자유과 인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헌팅턴의 글에서 어떤 긍정적인 가치도 찾지 못했습니다. 내가 발견한 것은 다른 나라와 문화에 대한 무지, 오만, 그리고 서구 중심적인 사고입니다.. 특히, 그는 세계가 "서양과 나머지" 사이의 갈등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이 결함과 한계를 드러냅니다...
한국의 현대사는 그의 관점이 얼마나 오만한지 보여줍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 한국인들은 두 명의 군사 독재자를 포함한 독재 정부를 겪었고,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를 위해, 그리고 정의와 인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희생하거나 투옥과 고문을 견뎌야 했습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 민주화 운동이 좋은 예입니다. 이 기간 동안 시민들은 전두환의 군사 독재에 대항하여 일어섰지만, 그들은 결국 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수백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하버드에서 만난 교수 중 가장 잘 소통하고 교류했던 교수. 나는 그에게 조금은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당신과 같이 진보적인 인사가 OECD에서 일할 수 있었는지? 내가 알기로는 OECD는 상당히 보수적인데 어떻게 당신의 진보성이 OECD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실현되었는지 궁금하다. 그 안에서 당신의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느라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나의 말에 브루노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한 누군가를 찾았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자신에게 같은 질문과 말을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촘스키 교수라고 했다. 단 두 사람만이 그의 고유성을 알아보고 그가 OECD에서 겪었을 도전과 고군분투에 대해 물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촘스키 교수와 나는 브루노 교수에게서 자신과의 닮음을 발견했는지 모른다. 이 일화가 인연이 되어, 브루노는 촘스키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다.
10년 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꼼수 3인방 중 정봉주 전 국회의원이 위기에 처했다. 지금은 형을 살고 있는 이명박의 BBK 주가조작 및 사기에 대한 진실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실형을 살게 되었다. 그런 김봉주 전 의원 구명 운동을 하기 위해, 가장 영향력 있는 진보적 인사인 촘스키의 도움을 얻고자 만남을 가졌다. 전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서다. 이 만남이 가능하도록 주선한 이가 바로 브루노였다. 그와 촘스키 교수는 막역한 학문적 친구 사이라고 했다. 10분 단위로 스케줄을 짜 생활하는 촘스키 교수와 20분 정도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브루노가 나를 그의 학생이자 동료, 친구라고 소개해 주었다.
부루노는 하버드에서 만난 나의 멘토다. 말이 가장 잘 통했던 스승이자 친구였다. 나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그에게서 발견하고 그의 천재적 식견과 통찰력을 통해 배우는 기쁨을 맛보았다. 진리 탐구의 길에서 만난 진보적 지식인 브루노는 가장 기억에 남는 하버드에서 만난 사람이다.
다음은 수업 마지막 날, 온라인 디스커션 보드에 남긴 나의 말이다.
One of the greatest gains from this course is that I rediscovered the joy of learning and of interacting with intelligent people. Also, I obtained an understanding of crucial notions closely related to language learning including doxa and habitus, and I gained insight into language and identity, cultural awareness, and global awareness.
I am so glad that I took this course. Bruno’s wonderful lectures not only provoke critical thinking, but they also inspired us to be true educators. The course made me feel proud of being part of Harvard, and part of us: I felt a sense of community among our class at the end.
이 수업에서 얻은 가장 큰 것은 배움의 즐거움을 재발견하고 지적인 사람들과 교류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저는 독사, 하비투스 등 언어 학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요한 개념에 대한 이해하게 되었고, 언어와 정체성, 문화적 인식, 세계적인 인식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습니다.
이 강좌를 수강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B의 훌륭한 강의는 비판적인 사고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진정한 교육자가 되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 과정은 제가 하버드의 일원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일부가 된 것을요. 저는 마지막에 우리 클래스에서 공동체 의식을 느꼈습니다.
하버드의 교수들
하버드 교수에서 공부하는 이점 중 하나는 해당 분야의 최고의 석학과 교수진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드 교수는 단순히 학생의 지적 욕구만을 충족시켜주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전문
영역에서의 깊이 있는 지식 그 이상을 얻었다. 가르치는 이의 참모습은 보여주었다. 학생과 소통하는 태도와 방식, 탐구하고 도전하도록 영감을 주고 격려하는 모습에서 큰 가르침을 얻었다.
내가 경험한 하버드 교수 대부분은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하지 않았다. 틀린 답을 하거나 논지 어긋나는 발언을 해도 무안을 주거나 당혹감을 느끼게 하지 않았다. 학생의 용기 있는 발언을 경청하며 토론 참여에 감사함을 표한다. 심지어 교수의 강의를 논박해도 수용하고 토론을 활기를 불어넣는 참여자로 대한다. 그들은 학생을 교수-학생의 상하관계가 아닌 대등한 학문적 동료로 대하며 수업을 이끌어 간다. 교수는 항상 학생의 발표 의욕을 고치시고 자신감을 불러 넣었다. 내가 이 수업에 기여하는 소중한 존재임을 느끼게 하였다. 이 점이 하버드 학생을 하버드 학생 갖게 하는 하버드 교수의 지도력이다. 이런 교수의 모습을 보며 교사로서의 내 모습을 반성하기도 했다.
종종 수업 시간에 교수와 논쟁하는 학생을 보게 된다. 그 분야의 대가인 교수 앞에서 배우는 학생이 자신의 견해와 논리를 피력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요하는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한 용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 또한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수업 분위기를 조성하는 교수의 지도력일 것이다. 권위로 눌러 내리지 않는 태도, 학생의 미숙한 사고일지도 존중하며 수용하는 자세가 교수와 학생의 토론, 심지어 논쟁까지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학생의 성장과 성취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교수의 모습은 실로 본받을 만하다. 과제나 페이퍼에 궁금한 점이 있으면 미리 약속을 정해 교수의 도움과 조언을 구할 수 있다. 이렇게 교수실의 문을 두으리고 조언을 청하는 학생들을 전혀 귀찮아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한다. 교수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제자들이다. 박사과정 진학이나 취업을 위해 추천서를 부탁해도 얼굴 찡그리지 않고 기꺼이 응한다. 제자의 발전을 위해 정성을 기울여 추천서를 써 준다. 제자의 성공과 자아실현을 통해 교수 자신의 성취를 발견해서일까.
사회적 불평등에 주목하는 하버드
하버드라는 이름이 특권과 오만을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버드의 교수와 학생은 결코 특권과 오만을 대표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 민주, 평등, 인권과 같은 인류가 추구하는 가치를 인정하고 함께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하버드는 엘리트 학교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하버드 교육대학원은 학문의 본질은 ‘진리 추구’라는 측면에서는 자기 본연의 의무를 다 하면서 교육이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 해야 하는 곳인지 가르쳐 준 곳이었다. 이런 면모는 하버드 교육대학원의 연구 영역과 전체 교육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버드는 ‘언어’와 ‘교육’이 갖는 사회경제, 문화적 특성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학문과 교육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노력한다. 하버드 교육대학원은 빈곤계층, 소수민족, 이주민 가정 어린이의 언어발달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를 많이 수행한다. 이런 점이 학문과 교육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하버드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내가 속한 프로그램인 응용언어학과는 미국의 이중언어 교육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다. 그 중심에는 미국 사회의 언어 교육 현실에 대한 인식과 개선 의지가 있다. 소외된 계층, 특히 소수민족이나 이주민의 언어 교육 여건 개선에 관심을 가지고 언어 발달의 사회, 경제, 문화적 측면에 주목한다.
균등한 기회를 누리지 못하고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들의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다. 아동 언어 발달에 대한 수업에서 보조교재로 택해 다룬 불평등한 어린 시절 Unequal Childhood by Annette Lareau. 사회 구조속에서 교육과 언어발달을 바라본다. 우리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계급과 그로 인한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직시한다. 수업에서 교수는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불평등의 재생산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교육적 대안을 고민하도록 학생들을 독려한다. 교육자는 변혁가이기도 함을 학생 스스로 느끼게 한다.
학생들 중에는 애팔래치안 산맥의 산골 마을 출신도 있다. 온 동네가 가난한 마을이다. 이 학생은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이 마을의 빈곤의 사슬을 끊기 위해 하버드에 왔다고 했다. 그녀는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는 교육을 연구하고 만들어 내겠다고 했다.
칠레 출신의 교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고 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자신을 성취하라 힘주어 말했다.
하버드의 강의실은 개인의 가치관과 삶이 공유되는 공간이었다. 함께 호흡하고 서로 격려하며 힘이 되어 주었다.
하버드 교육대학원의 교육과정에는 인종과 계층에 기반한 교육의 불평등과 차별 문제를 진단하고 일을 해서 하고자 하는 노력이 깃들어 있다. 사회정의와 인권, 민주주의 교육, 사회경제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소외된 계층에 대한 교육의 기회균등 실현, 학교개혁, 도시지역 저소득층의 교육여건 개선을 위한 노력, 인종적 언어적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 교육을 통한 사회 변화에 대한 의지 등이 커리큘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교육을 통해 어떻게 인권 회복에 참여하고 어떻게 사회정의에 기여하고자 하는지를 볼 수 있다.
내가 들었던 대부분의 수업이 사회경제적인 환경으로 인해 혹은 문화적 차별로 인해 혹은 장애로 인해 교육의 혜택에서 배제되거나 학업이 성과를 내는데 불리 한 이들을 위한 교육 이론과 교육 방법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교육이, 교육자가 먼저 관심을 쏟아할 것 먼저 보듬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일깨우는 하버드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는 하버드가 가진 진보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적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진정한 보수는 민주, 인권, 자유, 평등과 같은 사회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한 사회의 엘리트 집단이 누리는 특권에는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가 함께한다. 내가 본 하버드는 특권만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함께 지는 엘리트를 육성하고자 한다. 학문의 전당으로서, 진리탐구의 장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다 하려는 모습이 하버드를 하버드 답게 하는 모습이었다.
최고의 지성으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모습이 하버드 하버드 갖게 하는 특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