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과의 대화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바로 노엄 촘스키다. 2012년 2월 어느 날. 내게 이 엄청난 행운이 찾아왔다. 놀랍게도, 그가 먼저 지인을 통해 나를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했다. 세상에나! 이 무명의 한국 아줌마를 저명한 촘스키가 만나자고 했다니! 돌이켜보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조차 신기할 정도다. 이금주라는 한 개인으로 그를 만났다. 그 당시 나는 시민운동단체의 대표도 아니었고 사회운동과 관련된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다. 고국을 사랑하는 한국인으로 그를 만났다.
촘스키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내가 40대 중반에 하버드에서 석사 프로그램을 할 때 만난 교수 Bruno Della Chiesa다. 그는 나의 멘토이자 스승이면서 친구이기도 하다. 그가 나를 촘스키에게 소개해주었고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촘스키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평생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극히 평범한 한국 아줌마가 촘스키와 연결될 기회를 갖기란 정말 하늘의 별따기다.
하버드에서 만난 그와의 인연이 촘스키로 이어졌다. 관계는 관계를 낳고 인연은 또 다른 인연을 낳는다. 나는 브루노와의 첫 대면에서 그의 진보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았다. 그와의 첫 수업이었다. 권력과 자본에 맞서 당당하게 진실과 정의의 편에 서는 지성의 모습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의 진면모를 알아차린 나는 그에 대한 솔직한 인상을 말했다.
“당신과 같이 진보적인 인사가 OECD에서 어떻게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지켜내며 일 할 수 있었는지 알려 달라” 는 나의 요청에 그는 “자신은 마치 그 안(OECD)에서 링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권투선수와 같았다"라고 답했다.
나는 브루노에게서 나와 닮은 세계관과 삶의 태도를 발견했고 그 역시 나에게서 동류의식을 느낀 듯했다.
내가 “그가 불의에 맞서는 지성인임”을 바로 알아봤다는 것이 또 다른 연상을 불러왔다. 그것은 촘스키였다. 내가 그를 알아본 것처럼 촘스키도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와 똑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브루노를 통해 나는 촘스키와 연결이 되었다. 그의 진면모를 발견한 나와의 일화를 촘스키에게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그 당시 상황이 자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촘스키와의 만남은 9년 전 일이서서 그 만남이 성사된 구체적인 과정이 기억의 저편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나와 촘스키를 연결해준 나의 멘토이자 스승이자 친구인 브루노와 주고받은 이메일을 확인하고 나서야, 촘스키가 먼저 만남을 내게 청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촘스키가 먼저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이를 브루노를 통해 이메일로 전해 들었다. 세계의 지성, 촘스키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
촘스키는 누구인가?
“미국의 양심”,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 “진보적 지성의 거봉” 등 촘스키를 일컫는 말은 수없이 많다. 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관통하는 핵심은 그가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시카고 트리뷴지는 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자주 인용되는 여덟 번째 저자'로 보도했다. 뉴욕 타임스는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이라고 일컬었다.
촘스키는 1000여 편의 논문, 150여 권의 저서, 수많은 강연을 통해 진보적 지식인, 언어학자, 철학자, 정치사상가로 우뚝 선 세계적 석학이다. 그는 70년 가깝게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으로 한길을 걸어왔다. 그것은 자유, 진실, 그리고 정의의 길이다.
2017년 보스턴을 떠나 애리조나로 이주해 정착한 촘스키는 그곳에서도 정의와 평화를 향한 변화의 노력을 멈추고 않고 있다. 그는 놀랍다. 93세를 맞은 지금도 세상과 사람들과 소통하며 지식인의 책무를 다 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늘도 그는 기후변화를 초래한 자본의 끝없는 욕망 추구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전쟁위협에 반대하며 날카로운 지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며칠 전 (2021년 1월 14일), 보스턴 지역에서 함께 평화운동을 하고 있는 MA Peace Action의 반전 평화행사에서 사전 녹화된 그의 연설을 접할 수 있었다.
촘스키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언어학계를 평정하는 대가로 등장한다. 1955년 변형생성문법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같은 해 27세에 MIT 조교수로 임명받았다. 32세에 정교수, 37세에는 석좌교수직에 올라 학자로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의 언어와 언어 습득에 대한 통찰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에 경도되어 인간과 인간의 언어 습득을 단순히 환경과 훈련에 의해 지배받는 것으로 보던 언어학계에 획기적인 이론을 던진 것이다. 그는 언어 습득에 대한 인간의 선천적 능력을 주장하며 언어활동을 인간 정신의 창조적 영역으로 보았다. 언어가 가진 보편성과 그 언어를 습득하는 인간의 창조성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는 생성문법 이론과 보편 문법 이론으로 1960년대 이후 학계로부터 폭넓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그가 이룬 학문적 업적과 명예에 만족하며 중산층으로서의 안락한 삶을 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평탄한 길을 거부했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이 될 수 있음을 알았음에도, 60년대 베트남전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저항운동에 나선다. 1967년 2월 23일 뉴욕타임스 서평란에 지식인의 책무 The Responsibility of Intellectuals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베트남 전쟁에서 행해진 미국의 인권유린을 폭로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협조한 사회 과학자와 엘리트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미국 정부의 거짓말을 알리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고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67년 10월, 그는 국방성 앞에서 있었던 반전 시위에 참여했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투옥되기도 했다.
촘스키는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미국의 개입주의적 대외정책을 비판했다. 파워엘리트 집단의 선전 도구로 전락한 미국 주류 언론의 이중성을 폭로했다. 특히, 뉴욕타임스에 대해 권력과 금력 엘리트들의 이익에 공생하는 신문이라며 신랄히 비판했다. 이로 인해 그는 1960년대 이후부터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언론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굽히지 않고 지식인의 책무를 다해 왔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와 신자유주의의 횡포를 끊임없이 질타하고 경고해 왔다. “지식인의 책무”라는 글에서 그가 밝힌 신념 그대로다. “지식인의 책무는 진실을 찾아내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의 말을 삶 속에서 실천으로 보여준 그였다. 인류에게 촘스키가 있어 다행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내가 촘스키를 직접 만나기 전부터 그는 내게 각별한 인물이었다. 진보적 철학자, 사상가, 언어학자로서의 촘스키의 명성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의 실천적인 지식인의 모습은 나의 20대부터 존경의 대상이었다. 언어학을 공부했던 나는 언어학 서적을 통해서도 그를 만났다. 언어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접한 책이 그의 변형생성문법이었다. 그의 언어학자로서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통사론을 공부했다. 그 이후 언어 습득 이론을 공부하면서 그의 생득적 언어습득론을 접했다. 게다가, 나는 촘스키와 같은 보스턴 지역에 사는 살았기에 운 좋게 그가 하는 대중 강연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존경하고 추앙하는 세계의 지성을 멀찌감치 나마 연단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만나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고국의 민주주의를 구출하자
내가 촘스키 교수를 만나게 된 데는 그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2011년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비참했다. 지금은 감옥에서 자신의 죄과를 치르고 있는 이명박. BBK, 위장전입, 선거법 위반 유죄 판결, 도곡동 땅 등 '전과 13범'이란 꼬리표를 단 그가 대통령이 된 지 4년 차가 되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10년 이상을 퇴행해 마치 유신 또는 5공 시대로 회귀한 듯했다. 정권의 비리, 부정, 부패를 비판하는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평화적인 촛불시위를 탄압했고 민주적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벌금과 소송에 시달렸다. 4대 강은 파괴되었고 재벌기업에 각종 특혜가 주워졌고 민생은 파탄의 일로에 있었다. 검찰을 동원한 정치보복으로 전임 대통령을 잃었다. 용산참사의 비극을 겪었고, 쌍용차 노동자의 인권은 무참히 짓밟혔다. 탐욕에 찬 부패한 정권은 고국의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했다.
미국에 살며, 고국의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는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대다수의 주류 언론은 현실을 제대로 알리고 진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의 등장은 나의, 우리 모두의 숨통을 트여주었다. 대안 언론으로서의 나꼼수는 상식과 정의를 갈망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다. 김어준, 주진우, 정봉주, 김용민. 나꼼수 4인방은 기성 언론이 침묵하는 정권의 비리와 부패를 용기 있게 폭로했다. 그들에 대한 인기와 지지는 굉장했다.
그런 나꼼수가 하버드에 와서 강연을 했다. 하버드 졸업생으로 한인학생회와 계속 연결되어 있던 나는 나꼼수 일행을 도와 행사를 준비하면서, 나꼼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2011년 12월 하버드 강연에 후, 뒤풀이 자리에서 나꼼수 일행과 대화를 나누며 정봉주 전 의원은 상황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이명박이 BBK의 실소유주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 당시 정봉주는 진실을 말한 것에 대한 대가로 수인의 몸이 되어야 했다. 그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1심에서 대법원까지 그대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고국의 상황이 우려되었다. 부패하고 부도덕한 정권하에서 검찰과 사법부도 모두 정의의 편이 아니었다. 하버드 졸업 후에도 계속 연락을 하고 있던 나의 멘토이자 친구인 B를 만나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전했다. 나꼼수가 처해 있는 상황, 정봉주가 진실을 말했기에 당하는 불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도 프랑스 언론을 통해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판단하고, 나의 우려와 한국의 상황을 촘스키에 에 전했다.
B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촘스키의 정치적 입장을 감안할 때, 한국의 상황이 그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그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하고 나를 통해 한국의 상황을 듣고 싶어 한다.”
B는 나를 촘스키에 세 자신의 학생이자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내가 80년대 학생운동과 전교조에 참여했던 사회운동가였다는 점도 언급했다고 했다.
너무도 당연히 그와의 만남은 내게는 큰 영광이었다. 그리고, 그와의 만남이 진실을 말한 죄로 고난 중에 있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흔쾌히 그와의 만남을 수락했다.
“촘스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세계 언론과 여론에 호소할 수 있다면?”
이런 바람으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여러 차례의 이메일을 촘스키의 비서와 주고받고 나서 어렵게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이미 그의 스케줄은 두 달 후까지 꽉 채워져 있었다. 나 역시 가족 상황으로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당시, 시어머니가 암투병 끝에 임종을 앞두고 계신 와중이었다. 너무 감사하게도, 나의 어려운 개인적인 상황을 고려해 내 편의에 맞춰 시간을 내주었다. 결국, 시어머님의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른 후 그를 만났다.
촘스키와의 대화
캠브리지에 위치한 MIT 공과대학교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10분이었다. 그는 10분 단위로 일정을 짜고 사람을 만난다. 그 소중한 그의 10분을 받은 것이다. 설렘과 기대로 부푼 가슴을 안고 그를 방문했다.
바사르 거리를 따라 걷자 바로 그의 사무실이 있는 스타타센터에 닿았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붉은 벽돌과 회색 외관이 잘 어우러진 건물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의 건축물로 MIT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명소이기도 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의 사무실이 있는 8층에 내렸다.
“이제 곧 세계적인 지성과 마주한다. 직접 만나 일대일로 바로 눈앞에서 대화를 나누게 된다.”
나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비서가 촘스키의 연구실로 안내했다. 커다란 책상 앞에 그가 앉아 있었다. 온화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그의 연구실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책 속에 둘러싸인 그. 세계적인 석학인 그에게 잘 어울리는 연구실 풍경이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했다. 나를 브루노의 학생이고 친구라고 소개했다. 부르노의 권유에 따라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고자 촘스키 교수를 방문하게 되었다고 오늘 만남의 목적을 말했다.
그는 B를 통해 나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다고 하며 내가 한국에서 어떤 일을 했으며 이곳 미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바로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 물을 줄 알았는데, 나에 대한 질문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나: “나는 한국에서 8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졸업 이후에는 공립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전교조 활동을 했다…. 2003년, 미국으로 이주해 작년(2011년) 5월에 하버드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지금은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
그의 질문이 이어진다.
촘스키: 한국 공립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쳤나요?
나: 초등학교 교사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촘스키: 한국에서는 영어를 미국에서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네요. 멋진 직업입니다!
지금도 그의 목소리, 그의 온화한 표정, 그의 말이 그대로 기억 속에서 살아 나온다. 세계의 지성으로 불리는 그에 대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인상을 받았다. 그는 인자하고 따뜻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시종일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날카롭고 차가울 것 같다고 선입견과는 달리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대화를 이끌었다. 그의 푸근한 분위기에 처음에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대화를 하면서 점차 편안해졌다.
나의 사회운동 경험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했다.
나의 학생운동과 전교조 활동에 대해서도 소개하며 민주주의를 위한 모두의 노력에 대해 말했다.
“그 당시 군사독재의 엄혹한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이루려고 헌신했습니다. 교사들은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교육을 위해 정권에 저항했습니다.…. 우리는 투옥되고 고문을 받기도 했다. 정부는 전교조를 불법단체로 규정했기에 큰 어려움과 탄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꿋꿋이 투쟁하고 견뎌내어 한국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지금, 그렇게 이룬 민주주의가 부패하고 부도덕한 정권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
촘스키는 나의 말에 공감했다. 이명박 정권 4년 차, 민주주의의 퇴행, 신자유주의 산물인 민영화, 용산참사, 쌍용차 노동자 해고, 촛불시위 탄압 등 한국이 직면한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 당시 한국의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의 지성이 번뜩였다. 전 세계 수많은 나라 중 하나인 한국에 대해서 그는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한국에 각별한 애정이 느껴졌다.
그의 질문은 퇴조한 학생운동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어졌다.
촘스키: 이선생님은 8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고 했지요. 현재 학생운동이 과거처럼 활발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그에게서 예상치 못한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순간 고민되었다. 과거 학생운동과 교사운동에 참여했지만, 운동을 떠나 살아온 지 오래다. 소시민으로 살고 있는 코리언 아메리칸인 나에게는 어려운 질문이었다. 고국의 중요한 정치 사안이나 사회문제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학생운동의 쇠퇴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솔직히 나의 생각을 말했다.
“제 경우, 민주주의가 숨 쉴 수 없는 폭압적 상황에서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 예비 지식인인 대학생에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이해관계를 떠나 제가 정의라 믿는 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제 신념의 실천이 학생운동이었습니다. 학생운동이 퇴조한 이유를 면밀히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직선제 쟁취로 한국의 민주주주의는 한걸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학생운동이 사회운동에서 차지하는 주도적인 역할이 약해졌습니다. 97년 금융위기 이후에 한국사회는 비정규직 양산 등으로 대학 졸업 후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학생들은 생존과 취업이라는 현실의 문제로 인해 학생운동은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나의 견해에 동의한다는 표현이었다.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였다. 나의 사고의 확장을 도우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촘스키: 대학생들의 학자금 조달 상황은 어떤가요? 학자금 대출과 이로 인해 경제적 부담이 학생운동 참여를 떨어뜨리는 요인은 아닌가요? 한편, 학생들 사이에 과도한 학자금에 대한 저항은 없는가요?
한국 상황에 대해 모든 것을 소상히 알 수 없는 그다. 아주 예리한 지적이었다. 촘스키는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대학교육정책과 등록금에 대해 말했다.
"신자유주의는 대학교육을 시장적 질서, 사적 영역으로만 내맡깁니다. 그래서, 등록금이 오르고, 학생들은 과도한 부담을 집니다. 아르바이트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학생들을 개별화시켜 조직화된 행동을 어렵게 하지요. 하지만, 이런 문제를 통해 공동행동이 필요하다는 학생들이 인식하지 않나요?"
내가 답했다.
"네, 그런 인식의 확산이 학생들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한국 대학생들의 반값 등록금 투쟁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약속된 10분이 훌쩍 넘어갔다. 정봉주 구명을 위한 나꼼수 얘기는 꺼내지도 못 했는데 말이다. 예정된 시간이 이미 지났는데, 조금 더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지 양해를 구했다. 그가 정작 우리의 주된 관심사인 한국의 독립언론에 대한 얘기를 하지 못 했다면 시간이 조금 더 있으니 대화를 계속하자고 했다. 우리는 한국의 언론 상황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갔다. 이 대화는 나꼼수의 멤버인 정봉주에 대한 부당한 사법적 판결에 대한 논의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나: “한국의 주류 언론은 정권의 부정과 부패를 보도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언론이 권력과 한편이 되어 진실을 외면하고 정론보도라는 언론의 제기능을 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팟캐스트 나꼼수는 독립언론, 대안언론으로서 부패한 정부가 은폐하려고 하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에서 나꼼수는 현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습니다…” 촘스키에게 정봉주가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촘스키의 대답이 이어졌다.
“독립언론으로 불의한 정권과 맞서는 나꼼수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들의 활동과 정봉주에 대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연대하고 지원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가 역행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 그에게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명했다.
“권력에 맞서 싸워라! 조직하고 연대하라!”
그는 꼭 다시 연락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메일로 팔로우업 할 것을 약속하며 악수를 하고 미팅을 마무리를 했다.
촘스키와의 대화가 끝났다. 마치 꿈속에서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시간을 보았다. 10분이 아닌 20분을 그와 대화한 것이었다. 미국의 양심, 현존하는 절대 지성과의 인터뷰는 그와 나꼼수를 연결하는 시작이 되었다. 그 이후, 정봉주, 김어준, 주진우의 용감한 투쟁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나의 주선으로 그해 9월에 나꼼수 일행과 촘스키는 만남을 가졌다. 하나의 인연이 또 다른 큰 인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촘스키와의 함께 한 20분. 진정 나의 삶을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만든 시간이었다.
촘스키는 오늘도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를 위한 종전과 평화협정 체결을 지지하며 미국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평화를 위한 역사적인 노력을 지지하는 것이 미국 시민들의 의무다.”
“It is the task of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to support them [Koreans] in this historic endeavor.”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명백한 교훈 중 하나는, 권리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
촘스키 <우리가 모르는 미국 그리고 세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