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립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한국 아줌마 II
49살 초짜 교사 고군분투의 첫 학기
첫 학기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1학년부터 8학년까지 30명 정도의 학생을 가르쳤다. 1학년에서 8학년까지 골고루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해서 내 발전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각 학년의 교육과정을 다 꿰뚫어야 했다. 미국 초중학교, 8개 학년의 교육과정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ESL 프로그램이 체계화되어 있지 않고 커리큘럼이 없었기에 커리큘럼 짜느라고 매일 머리 싸맸다.
계약서 상으로는 8시간 근무이지만, 실제로 학교에서 근무하는 시간은 8시간 30분 정도였다. 내게 주어진 하루 수업시간은 6시간 45분이었다. 일일 수업시수 6시간 45분. 교사생활을 하며 가장 긴 일일 수업시수를 경험했다.
퇴근 후에도 학교 일을 싸들고 와서 집에서 하기가 일수였다. 교육과정을 만들고 수업 안을 짜느라 새벽 2시까지 일하는 날이 허다했다. 심지어 주말에도 학교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완전 초짜 햇병아리 교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 수업의 30% 정도는 푸시인 수업모형 Push-In Model이다. 일반 교실에서 교과 담당교사와 공동으로 수업을 하는 형태다. 수업의 70%는 풀아웃 모형 Pull-Out Model으로, 소그룹으로 가르친다. 소그룹 티칭은 한 그룹에 대개 4명~7명 정도의 학생들을 가르친다. 공동수업을 하려면, 미리 교과교사와 협의도 해야 하고 교육과정도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다. 공동수업을 하기 전에 교과교사의 수업 안을 숙지하고 내가 맡아야 할 역할을 의논하고 정한다. 소그룹 수업에서는 학생들의 필요와 요구에 맞는 맞춤형 수업으로 진행된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들의 영어능력 수준과 특성에 맞는 커리큘럼을 고안하고 자료를 찾거나 만들어야 한다.
교육과정, 수업안과 교재, 학습지를 만드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미국의 많은 학교에는 교과서가 없다. 교과서는 교사의 선택이다.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채택 여부는 전적으로 교사의 결정 사항이다. 교사 자체가 교육과정이고 교과서인 셈이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창조해야 하는 교사는 큰 책임과 노력을 부여받는다. 반면, 자유롭게 교육과정을 짜고 교재를 선택할 수 있기에 교사의 재량이 발휘될 여지가 많다. 교육과정을 짜야하는 책임이 있는 만큼 교사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특권 또한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수업을 재미있게 할 수 있다는 장점도 크다. 커리큘럼을 자유롭게 구성해 나만의 수업을 만들어 가면서 느끼는 보람과 기쁨은 고된 노력 뒤에 맛보는 달콤한 열매와도 같았다.
영화 볼 시간도 보스턴 레드삭스 야구경기를 보러 갈 시간도 없을 정도 학교 일에 열정과 정성을 쏟았다. 먹고 자고 집안일을 하는 것 이외에는 오로지 학교일이었다. 생존을 위해 내 프로페셔널을 세우기 위한 분투의 날들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다 보면 노하우가 쌓이고, 언젠가는 좀 더 수월하게 가르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축복의 교실
아이들 가르치면서 매일 축복받는 느낌이었다. 한국에서도 수년간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첫 미국 교단에서 이곳 학생들 가르치면서 매일 새롭게 배웠다.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들과 호흡하는 게 무엇인지. 가르치며 배웠고성장했다. 매일매일 나의 부족함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한국에서 15년을 가르쳤고 미국 대학에서도 가르쳤지만, 미국 초중학교에서의 교사생활은 전혀 새로운 것이 이었다. 학생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미국 교단에 다시 교사로서 태어났다.
나의 학생들 대부분은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아주 어렸을 때 이주한 경우다. 그들의 말하기 능력은 좋은 편이었다. 네이티브의 발음으로 일상생활영어의 구사는 아주 우수했다. 내가 수업을 하는 장면을 본다면 어떤 점에서는 특이하다. 한국어 악센트가 있는 영어를 구사하는 교사가 네이티브 발음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광경이다. 그들은 나의 학생이고 나를 통해 영어를 배우고 영어능력을 높인다.
학생들은 아카데믹 영어가 많이 부족했다. 아카데믹 어휘, 독해와 글쓰기 지도가 수업의 중심이었다. 아이들의 요구를 파악하고 그들의 읽기와 쓰기 능력 Literacy을 높이기 위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매일 고민했다. 정답을 알려주는 교과서는 없다. 학생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파악을 바탕으로 내가 쌓은 언어 습득과 언어교육 이론을 적용하는 길 뿐이다. 어떤 학생은 말하기는 유창하지만 책을 유창하게 읽지 못한다. 어떤 학생은 말하기와 낭독은 유창하지만 책을 읽고 맥락을 파악하고 텍스트와 텍스트를 연결하는 고등 사고능력이 부족하다. 독해는 잘 하지만, 논리적인 글쓰기가 부족한 경우도 있다. 학생들의 강점을 살리고 취약점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이끌어 갔다.
교직의 가장 큰 보람은 뭐니 뭐니 해도 함께 부대끼며 호흡하고 소통하는 아이들이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흑인 학생들! 그들은 유난히 정이 많았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나를 볼 때마다 달려와 내 품에 안긴다. 두 팔을 벌려 안기며 내게 얼굴을 비빈다. 중학교 여학생들도 내게 허그를 하며 애정을 표현한다. 나보다 체구가 큰 7,8학년 여학생들이 나를 꼭 안으면 아침 인사를 한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 시절 90년대 초 20대의 풋풋한 교사로 아이들에게서 느꼈던 그런 정감을 흑인 학생들에게서 느꼈다. 흑인 학생들은 많은 면에서 한국인들의 정서와 닮았다. 기쁘거나 슬픈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 흑인 아이들과 생활하며 가슴과 가슴이 만나는 순간을 매일 체험했다. 아이들이 순하고 착했다. 가을학기가 지나고 봄학기를 맞이할 즈음, 나와 정이 많이 들어 잘 따랐다.
이 차터스쿨 학생들 대부분은 저소득층 가정의 자녀들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가정 형편이 어렵고 부모의 관심을 많이 못 받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사정을 잘 알기에, 학생들을 대하는 내 마음은 각별했다. 정말 내 아이를 대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사랑과 정성으로 학생들을 만났지만, 때로는 나의 진심과 노력이 어려움을 마주하기도 했다.
학생들과의 관계가 항상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간혹, 수업 중에 말썽 피우는 학생도 있었고 내 속을 태우는 아이도 있었다. 실은, 열심히 잘하는 학생들보다는 실은 삐딱하고 말 안 듣는 학생들이 더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 소위 문제아 때문에 속 썩는 경우, 나만의 방법이 있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가 내 나름의 방식이다. 말이 쉽지, 내 말 안 듣고 애간장 태우는 애들 예쁘게 보기가 쉽지는 않다. 근데, 그 애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원인을 잘 살펴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 학생들의 그런 행동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이해한다면 그들이 문제아로 보이지 않고 나의 특별 애정 대상으로 바뀌었다.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보이는 많은 아이들이 부모에게조차 관심과 애정을 못 받는 애들이 많았다. 그러기에 더 잘해 주려고 했다. 간식을 싸다가 아침에 일찍 교실 책상에 놓아두기도 하고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 때 예쁜 카드와 선물도 주기도 했다. 말 한마디라도 다정하게 건네려고 했다. 그러면, 아이도 서서히 내게 호감을 보였다.
내 수업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수업에서도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소란을 피워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은 가정 형편이 극도로 안 좋았다. 그의 형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갱단에 연루되었다가 총을 맞아 사망했다. 그 트라우마로 이 아이도 많이 힘들어했다. 싱글맘인 엄마는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 해야 했다. 학교에 아이 간식을 못 챙겨 보낼 정도로 엄마는 생활고에 힘겨워했다.
아침마다 내 아이의 간식을 싸면서 이 학생의 간식을 같이 챙겼다. 아침에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 그 아이의 책상 위에 간식을 놓아두었다. 집에 과일이 없다는 말을 듣고 과일을 준비해 수업 중에 함께 나누어 먹기도 했다. 아이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말했다. 그를 가르치거나 훈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말을 들어주고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수업을 거부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점차 수업태도도 좋아졌다. 그렇게 조금씩 변화를 발견했다. 가끔 수업시간에 수업을 안 따라오고 속을 태울 때도 있지만, 그럴만한 사연이 있는 아이라 그리 밉게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민이 느껴져 살살 달래 가며 가르쳤다.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학생들과 함께 했다.
계속 전진만 할 수 없을 때, 쉬어가자.
첫 미국 학교에서의 교사생활 1년 6개월 만에 사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49살 난 나의 능력을 인정해 주고 나를 잘 봐준 학교를 만나, 이 곳에서 교직을 시작했다. 1년 반을 매일 기도하면 부족한 자신을 채찍하고 격려하며 열심히 가르쳤다. 다음날 가르칠 내용을 준비하기 위해 2-3시간 이상을 준비했다, 수업 안을 짜고, 아침에 1시간 넘게 운전을 하며 머릿속으로 그날 가르칠 내용을 연습했다. 주말에도 학교 일을 하느라 제대로 놀지도 쉬지도 못 하고 살았다.
아이들의 환한 미소가 가장 큰 힘이었고 보람이었다. 나를 믿고 지원해 준 슈퍼바이저인 ESL 디렉터 덕분에 1년 6개월을 잘 버티어 왔다. 첫해 내 근무성적은 모두 우수였다. 내가 가르친 이후로 학생들의 영어능력과 학업성적이 많이 향상되었다는 과분한 평가와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계점에 도달했음을 알았다. 몇 주를 곰곰이 생각하다 결심했다. 12월 크리스마스 휴가를 앞두고 슈퍼바이저인 초등 교장에게 사임한다고 말했다. 내가 처음 채용되었을 때는 ESL 디렉터였는데 그 사이에 초등 교장으로 승진하였다. 새 교사 뽑을 때까지 계속 근무하고 인수인계가 원활하게 잘 되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했다. 필요하면, 가을학기 끝나는 1월 말까지 근무하겠다고 했다. 다행히 내 사정을 잘 이해했다. 그녀는 슬프지만 보낼 수밖에 없다고 이후에 추천서 필요하면 꼭 연락하라고 했다.
“교육의 기회균등”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학교이니만큼 교사들도 착하고 교사 사이의 유대와 결속력도 좋았다. 아이들도 사랑스럽고 더구나 사회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학구여서 아이들 가르치는 보람도 컸다. 나를 처음 교직으로 발을 딛게 해 준 곳이다. 어떻게 보면 이 학교, 특히 내 슈퍼바이저가 아주 고마운 존재다. 미국 교사 경력이 전혀 없는, 그것도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나에게 교직의 기회를 주었다. 더구나 처음에는 교사 자격증을 면제해 주어 교사로 시작할 수 있었다. 교사자격증은 이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첫 해에 시험을 다 통과해서 받았다.
이 학교가 여러 가지로 장점이 많긴 하지만, 업무강도가 매우 높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미국의 대부분의 공립학교는 하루 7시간 근무다. 이 학교는 하루에 8시간을 근무한다. 수업 외에도 점심시간, 버스 등하교, 놀이시간 등 학생들을 돌보는 업무가 많았다. 이런 (런치, 버스 리세스) duty 업무가 많다 보니 노동의 강도를 가중시켰다. 통근 시간이 왕복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오는 보스턴. 겨울에는 2시간 30분이 걸리기도 했다. 매일 두 시간 이상을 운전해야 하는 통근길은 추간판 협착증을 앓았던 나에게는 건강에 무리가 되었다.
매일 6시간의 수업을 해야 하는 힘든 스케줄을 감당해야 했다. 수업 시간 사이에 쉬는 시간이 없었다. 화장실을 참아가며 다음 수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과로와 높은 업무강도 때문인지 방광염이 걸려 여러 번 고생했다. 이 차터스쿨은 교사를 정말 초단위로 일을 시킨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업무의 분담과 이에 대한 감독이 철저하다. 일분, 일초의 시간 낭비도 없도록 일을 잘 시키고 효율적으로 교사들을 관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학교에 근무하며 다른 교사들로부터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봉급체계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나는 학교가 제안한 연봉을 협상 없이 그대로 수용했다. 이 연봉에는 한국에서의 교직경력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미국의 대학원 과정에서 이수한 학점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는 첫 직장을 구했다는 기쁨에 심취해 나를 너무 평가절하 해 연봉계약서에 사인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봉은 학교를 그만두는 데는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나중에 학교를 옮기면서, 내 연봉이 적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늦게 알게 되었다.
나와 친하게 지냈던 아이티 출신의 언어치료교사는 이 학교에서 남녀 교사 간의 연봉이 불공정하게 책정된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학기 중간에 이 학교에 채용되었다. 남자 언어치료교사가 갑자기 그만 두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의 컴퓨터를 인계받아 쓰고 있던 그녀는 컴퓨터에서 그 남자 언어치료 교사의 연봉 계약서를 발견했다. 그는 그녀보다 수천 불 많은 연봉으로 계약했다. 그와 그녀는 같은 대학원 출신이고 경력도 동일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남자와 여자라는 점이다. 그녀는 미국 사회에, 특히 교직에도 여전히 남녀차별이 존재함을 말했다. 그녀는 한 학기를 마치고 몇 달 만에 이 학교를 떠났다.
이런 과도한 수업 시수, 런치, 버스, 리세스 업무에 대한 부담, 연봉체계의 문제, 연봉 인상 동결 등이 문제가 있음에도 이러한 교사들의 처우개선에 대한 요구는 관리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듯했다. 차터스쿨의 특성상 교원노조가 존재하지 않았다.
강도 높은 업무, 과로, 장시간의 통근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대로 계속 근무하다가는 건강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나의 건강과 행복, 웰빙을 위해 이젠 그만 쉬어야 할 때다. 그렇게 사직을 하게 되었다. 슈퍼바이저가 나를 위해 조촐한 송별회를 마련해 주었다. 많은 교사들 앞에서 내가 학교에 있는 동안 ESL 학생들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으며 나의 헌신은 오래 기억될 것이라라는 송별사를 했다. 1년 반 만에 그만두기는 하지만 그래도 작으나마 뭔가를 기여하고 떠나는 것 같아 마음이 덜 무거웠다.
기회는 앞으로도 다시 있을 것이라 믿었다. 내가 행복하게 가르칠 수 있는 곳에서 계속 도전하고 노력할 것이다. 인생에는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가 있는 것 같다. 인생은 무조건 직진을 한다고 다 능사는 아닌 듯하다. 요즘 자기 계발서들이 많이 나와 있다. 돈을 더 벌고 자신의 능력을 높여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는데 지나치게 열중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결국, 삶이란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이 아닐까. 삶의 길에서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나의 건강을 지킬 수 없다면 그것은 나의 길이 아닐 것이다. 삶이란 나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나의 낙관적인 태도 덕분일까? 사직 의사를 표하고 며칠 뒤에 집에서 25분 거리의 공립학교에서 ESL 교사를 구한다는 채용공고를 보았다. 더구나, 주 4일 근무도 가능한 조건이었다. 나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