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여름 개성 여행의 추억
작년 여름에 북한을 다시 찾을 계획이었다. 코로나 상황으로 북한 방문을 실행할 수 없었다. 2021년 올여름도 북한 방문이 어려워 보인다. 작년 1월부터 북한의 국경이 봉쇄된 이후, 외부인은 북한에 들어갈 수 없다. 대북제재에 팬데믹까지 겹친 상황에서 국경이 봉쇄되어 북한의 내부 사정이 여러 가지로 어렵다는 말이 들린다. 전 세계가 팬데믹의 영향으로 경제난과 생활난을 겪고 있는데, 북녘 동포들의 사정은 어떨지 멀리서 걱정이 많다. 우리 동포들이 어려움을 잘 견디고 이겨내길 바랄 뿐이다.
재작년에 다녀온 북녘 땅의 모습이 궁금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최근 평양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찾았다.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핀 4월의 평양을 거리를 보았다. 마스크를 쓰고 나들이 나온 가족, 놀이터에서 세발자전거를 타는 사내아이, 봄의 기운이 가득한 평양 거리의 풍경을 보니 반가웠다. 팬데믹 상황이 좋아져서, 다시 북녘땅을 밟을 수 있기를 소망했다. 사진을 보노라니, 나의 마음은 단박에 공간을 넘어 북녘 땅으로 달려간다. 2019년 여름 여행의 추억이 머릿속에서 하나 둘 되살아 난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자연 풍광이나 관광 명소, 역사 유적지를 탐방하고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나에게 여행의 묘미란 뭐니 뭐니 해도 현지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사람들과의 대화와 교류,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교감과 공감은 여행의 진정한 기쁨이고 재미다. 북한 방문 중 만난 사람 중 가장 강렬하게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이가 있다. 그녀는 개성에서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꽃다운 나이의 고등학생들의 죽음을 가슴으로 아파하고 희생자들의 부모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꼭 밝혀지기를 바랐다. 그녀도 자식을 키우는 엄마의 마음으로 함께 아파했다.
개성에서도 세월호를 잊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알았다. 세월호를 잊지 않은 보스턴 사람이 세월호를 잊지 않은 개성 사람을 만난 것이다. 우리는 서로 가슴을 마주하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빌었다. 세월호 아이들을 이야기하며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을 기억한다. 세월호를 잊지 않은 개성 사람을 추억하며 2019년 여름 뜨거웠던 개성으로 다시 여행을 떠난다.
개성 입성!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2시간 20분 정도 달려 개성에 도착했다. 황해북도 개성 특급 시. 인구 30만의 도시. 휴전선과 개성공단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고려의 500년 도읍에 드디어 입성! 개성의 이곳저곳에서 고려의 숨결을 느끼리라!
우리의 평화자동차는 첫 목적지인 선죽교로 향한다. 개성 시내를 가로지른다. 도시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한적하고 조용하다. 8층의 건물과 5-6층 정도의 살림집(아파트)이 연이어 늘어서 있다. 버스 정류장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보행자의 모습이 보인다. 높지 않은 건물과 기와집이 늘어선 거리가 이어진다. 자전거를 탄 일군의 남녀가 줄지어 거리를 달린다. 중국인 관광단을 태운 버스가 지나간다. 자동차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고층빌딩이 높이 솟은 화려하고 현대적인 평양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아담하고 소박한 도시. 개성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주택가를 지난다. 수십 채의 한옥이 서로 맞대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 옆에 시냇물이 흐른다. 시냇물 위로 고풍스러운 돌다리가 운치 있게 자리를 잡고 있다. “콸콸” 시원하고 경쾌한 물소리를 내며 흐른다. 바닥이 보일 정도로 물이 맑다. 파란 하늘, 맑은 공기, 시원한 시냇물. 고즈넉한 한옥마을. 500년 고도, 개성과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차창 너머로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농부의 모습이 나의 눈길을 끈다.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정겨운 풍경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인천에도 버스와 자동차 사이로 소달구지가 다녔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물씬 느껴지는 정경이다. 옛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묘한 개성의 매력에 어느새 흠뻑 빠져들었다.
나는 몇 분 안 되어 차창 밖 풍경 만으로 개성의 매력을 느꼈다. 소박하고 수수하지만 포근하게 나를 맞아주는 듯한 그런 분위기다. 번화함과 번잡함이 없는 작은 도시 개성. 역사를 간직하고 우리의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500년 고도의 기개를 여전히 품고 있고 있으리라. 이런 기대감으로 나의 개성 탐방은 시작되었다.
나의 첫 개성 문화유산 탐방지는 선죽교다. 북측의 국보 문화유물 제36호, 선죽교.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최후를 맞은 돌다리다. 충절과 절개의 상징인 정몽주의 선죽교. 선죽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분홍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입은 안내원이 환하게 웃으면 맞는다. 선죽교로 안내한다. 회색 화강암의 돌다리, 선죽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3m가 조금 넘는 너비에 8m 정도의 길이의 아담한 돌다리에 돌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수백 년의 세월의 흔적이 돌다리에 그대로 드러난다. 비와 바람을 견뎌내고 견고히 버틴 돌다리. 다리 중간중간 화강암이 변색되어 검게 된 부분이 보인다.
안내원이 선죽교에 얽힌 역사이야기를 구수하게 풀어낸다.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철퇴를 맞고 피를 흘리며 최후를 맞은 바로 그 자리를 손으로 가리킨다. 정몽주의 핏자국이 남아 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찾았다! 다리 위에 붉은 흔적이 보인다. 바로 이것이다! 정몽주의 절개의 핏자국이다. 붉은 핏자국이 5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니! 정말 신기했다.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역사 유적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정몽주의 선죽교에서의 피살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함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안내원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안내원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확신에 찬 대답에 나도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안내원에게 확실히 전했다. 나의 주장이 아니라 남측의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으로 알고 있다고 확실히 했다. 안내원은 북에서 한 번도 그런 내용을 들은 바 없다고 한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남북의 사학자들이 공동연구를 통해 확실히 밝힐 수 있는 있기를 기대해 본다. 남과 북이 함께 손잡고 해야 할 일은 정말 끝이 없는 듯하다.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며 한석봉이 썼다는 선죽 교비 앞에서 안내원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선죽교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선죽교 아래로 수로가 흐른다. 초록빛 개천에 물고기의 움직임이 보인다. 물이 깨끗하다. 적당히 우거진 수목 아래 선죽교가 개천을 가로지른다.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온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빠른 시일 안에 북녘 관광이 가능해져 남측 동포와 해외동포들도 이 귀중한 유적을 방문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도덕과 충정의 고장, 개성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 표충비로 안내원과 함께 이동했다. 표충비가 있는 표충각은 선죽교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수목이 우거져 그늘이 드리운 길을 건너 표충각으로 향한다.
표충비의 기원에 대해 안내원의 절도 있는 설명이 이어진다.
“표충비는 고려 충신으로서의 절개를 지켜 선죽교에서 피살당한 정몽주의 절개를 찬양하여 이조의 왕들이 세운 것입니다”
1740년, 영조 16년 가을, 영조가 개성에 행차하였다. 당시 영조는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선죽교에 어가를 멈추고 그를 찬양하는 시를 짓고 글씨를 썼다. 자신이 쓴 글씨를 비석에 새겨 세우게 하였는데, 그것이 표충비다. 오래전 국사시간에 들은 듯하지만 오래되어 가물가물해진 역사 지식이다. 북의 역사유적 안내원을 통해 다시금 배운다. 유적 탐방을 통해 생생한 역사교육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활짝 열린 표충각 안에 거북이 형상의 조각이 보인다. 화강암으로 된 암수 거북이 위에 각각 표충비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비는 1740년 영조가 세운 것이고 왼쪽 비는 1872년 고종이 세운 것이라고 했다. 이 표충비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비문이 보인다. 영조가 세운 표충비에는 해서체로 쓰인 14자의 시구가 있다. 안내원의 시구 풀이가 구성지다.
“도덕과 충정이 만고에 뻗치니(道德精忠亘萬古), 높은 절개가 태산북두처럼 우뚝하다(泰山高節圃隱公)”
두 마리의 거북이가 고개를 쑥 내밀고 육중하게 버티고 있다. 거북이의 코를 유심히 보게 되었다. 코가 반질반질했다. 예로부터 거북이가 자식을 낳는데 효험이 있다고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코를 문질러 거북이의 코가 반질반질하다고 안내원이 전했다. 안내원이 나에게 코를 문질러 보라고 권한다. 나는 이미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있어, 안 문질러도 된다고 답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문지르다 보면 정말 다 달아버릴까 하는 염려도 되었다.
안내원의 우리 문화유적에 대한 긍지에 찬 해설은 계속된다. “표충비는 우리 선조의 발전된 예술적 재능과 문화 수준이 깃들어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남과 북의 동질성은 역사에 대한 이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임금에 대한 충절, 선비의 지조와 절개는 남이나 북이나 높이 사고 우러르는 가치임이 분명하다. 또한 우리 선조가 남긴 찬란한 문화유산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남이나 북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는 70년간 떨어져 살았어도, 여전히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의 평화자동차는 다음 탐방지인 고려성균관으로 향했다. 고려성균관은 개성 문화유적지구에 속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이기도 하다. 고려성균관은 고려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으로, 992년 국자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가 이후 성균관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 성균관과 구분하기 위해 고려성균관으로 부르고 있다.
고려성균관이라고 쓰인 돌기둥 앞에 안내원이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겼다. 해외동포 방문자에 대한 북녘 동포의 애정은 각별함을 느낀다. 옆에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이 보인다. 중국인 관광객을 대하는 다른 안내원의 태도와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있다. 안내원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뜨겁게 환대받고 있다는 이 느낌은 정말 좋다.
안내원과 함께 고려성균관 입구를 지나 정원을 조금 걷자 정문이 나타난다. 개성인민위원회가 세운 고려성균관 안내문이 보인다.
“고려성균관은 세계 최초의 최고 교육기관이다. 고려성균관은 당시의 건축양식과 교육제도를 이해하는 귀중한 역사유적이다”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시야에 들어온다. 성균관 앞 뜰에 육중해 서 있는 이 나무는 천년이 넘었다고 한다. 천년이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21세기를 살고 있는 이 나무는 오늘은 보스턴에서 온 나를 맞는구나. 성균관 은행나무다. 높이가 30m가 넘고 둘레가 5m가 넘는다. 은행나무 옆에 오랜 세월을 버텨온 듯한 다른 나무가 보였다. 성균관 느티나무다. 이 나무 역시 천년이 넘었다고 했다. 천년 된 성균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모두 북의 천연기념물이다. 천년을 고려성균관을 지키고 있다.
은행나무를 지나니 고려성균관의 여러 건물 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개의 문과 다른 건물들도 보였다. 고려성균관 건물 일부가 고려시대 유물 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고분에서 발굴된 벽화와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고려성균관의 이름을 따서 설립된 대학 고려성균관 대학의 외관도 둘러보았다. 방학 중이어서 일반인에게 개방이 안 된다고 했다. 고려성균관 대학 방문은 빡빡한 일정에 무리가 있어서 계획에 없었다. 외관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 상냥하고 친절하게 맞아준 안내원과 사진을 찍는 것으로 고려성균관 탐방을 마무리했다. 개성의 여러 유적지를 둘러보며 개성이 한국전쟁 당시 정전협정이 맺어진 지역이기에 전쟁의 화마를 피해 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었다.
잊지못 할 개성 안내원
개성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뭐니 뭐니 해도 찰진 입담의 고려 왕건릉 안내원과의 만남이다. 이 여행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된다. 시종일관 재미난 말솜씨로 나를 웃게 하고 어느새 금세 친해져 편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던 그다. 그에게서 정말 진한 동포의 정을 느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동포로서 엄마로서 많은 것들을 교감하고 교류했던 시간이었다.
고려 왕건릉이 개성에 있다는 것도 북한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다. 아는 것만큼 보이기에 여행 전에 개성의 유적에 대해 공부를 해 두었고 여러 유적지 중 왕건릉을 방문지에 포함시켰다.
작열하는 8월의 태양 아래 개성도 작열하듯 뜨거운 오후를 맞이하고 있다. 분홍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의 한복을 입은 안내원이 능 입구에서 나를 기다린다. 긴소매의 한복. 이 여름 날씨에 무척 더울 텐데. 철저한 직업의식의 발로인가. 역사유적의 안내원다운 복장을 갖추려는 그의 자세에서 프로페셔널리즘이 느껴진다.
“리 선생님, 반갑습니다! 멀리 미국에서 조선까지 정말 먼 걸음 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안내할 안내원 OOO입니다”
안내원은 콧등에 땀방울을 송골송골 맺혀가면 열정적인 인사말을 전한다.
개성이 서울과 더 가까이 있어서인가? 평양에서 들었던 억양과 사투리와는 다른 서울 말씨에 가까운 방언이 느껴진다. 만나자마자 우리는 두 손을 덥석 잡고 첫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모두 손에 땀방울이 맺혀있다. 서로의 땀과 땀이 뜨거운 손의 열기와 함께 느껴진다. 뜨거운 동포의 인사다.
왕건릉에 대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왕건릉 주변의 수호신에 대해 설명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설명하기에 귀에 쏙쏙 들어온다. 그의 묘사와 해설 솜씨는 진정 뛰어나다. 들으면 들을수록 귀에 착착 감긴다. 귀를 쫑긋 세우게 한다.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야기는 점점 더 재미있어진다.
일방적으로 유적에 대해 설명만 하지 않았다. 종종 내게 질문을 던진다. 마치 교사가 수업을 하듯 흥미 있는 발문으로 듣는 사람을 안내원 해설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문화재 탐방의 적극적 참여자로 변화시킨다.
호랑이 석상을 보고 암컷과 수컷을 구분하라는 질문을 한다.
“ 리 선생님, 여기 범의 형상이 있는데 어느 것이 암컷이고 어느 것이 수컷인지 알아맞혀 보시겠습니까? “
“동물세계에서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게 수컷이라고 들었는데, 수려한 모양인 이게 수컷이 아닐까요?” 내가 답한다.
“맞습니다. 리 선생님. 역시 선생님 눈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안내원 선생께 칭찬도 듣고 기분이 좋습니다!”
“하하.. 호호..”
안내원의 후한 칭찬에 우리는 모두 깔깔 웃었다.
“개성 사람은 죽어서도 송악산을 베고 죽는다”
감동적인 연설과 재미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안내원의 입담에 왕건릉 탐방 내내 큰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의 깍쟁이 유래에 대한 설명에 감탄을 자아냈다. 인색하고 이기적인 사람을 깍쟁이라고 한다. 북에서도 같은 의미로 통한다. 깍쟁이란 말이 개성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안내원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의 개성 사람으로서의 긍지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좋은 소리 하면서도 자기 이익을 똑똑하게 실현하는 것이 수준 높은 개성 사람들입니다…. 개성 깍쟁이란 소리 처음 들어 보셨습니까?.” 하며 안내원은 개성 깍쟁이, 해주 깍쟁이, 서울깍쟁이 이야기를 그 특유의 말솜씨로 술술 풀어낸다.
“해주 깍쟁이가 개성 깍쟁이를 이겼다지 않습니까?” 그의 찰진 입담이 쏟아진다.
추운 날 개성 사람과 해주 사람이 동행하게 되었다. 첫날은 개성 사람이 자신의 쌈짓돈을 털어 땔감을 사 아궁에 불을 지펴 하룻밤을 그럭저럭 지냈다. 다음날 해주 사람이 불을 지필 차례가 되자, 개성 사람은 방 안에서 이제나 저제나 방이 덥혀지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지나도 방이 덥혀지지 않자, 아궁이로 가 보았다. 아궁이에서 붉게 불이 타오르는 듯해 들여다보니 강설 불(송진)을 지피고 있었다. 땔깜 살 돈이 아까웠던 해주 사람은 불 때는 시늉은 해야겠고 해서 대신 송진을 지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주 깍쟁이는 개성 깍쟁이를 이겼다. 해주 깍쟁이 승!
이번에는 서울깍쟁이와 개성 깍쟁이의 대결이다. 안내원은 서울깍쟁이야말로 진짜 깍쟁이이라고 한다.
“개성 사람들은 고춧가루를 아주 곱게 곱게 뽛(빻)습니다. 혹시 씨라도 들어갈까 봐서 채로 치고 또 친다 하지 않습니까. 서울 사람들은 고춧가루를 아주 굵게 굵게 뽛습니다. “
궁금해서 물었다. “왜요?”
“곱게곱게 좋게 되면, 구멍구멍마다 고춧가루가 다 들어가서 아무리 많이 담아도 담은 것 같지 않고, 굵게 굵게 좋게 되면 큰 구멍 작은 구멍 가리지 않고 똑똑 막아주는지라 조금 담아도 많이 담은 것 같고….’야아, 우리가 깍쟁이가 아니라 너희가 깍쟁이라’ 해서 서울깍쟁이가 생겨났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구수한 개성 사투리와 억양이 그 재담의 감칠맛을 한결 더해 주었다.
“우리 개성 사람들은 경우가 있는데, 자꾸 깍쟁이 깍쟁이 하니까 속상합니다.”
그의 귀여운 넋두리가 이어진다. 우리는 내내 깔깔거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유쾌한 그는 정말 뛰어난 재담꾼이다.
깍쟁이도 이성계 때문에 얻은 별명이라 한다. 이성계가 서울로 도읍을 옮기면서 개성 사람들의 벼슬길을 막으라고 명했다. 호구지책을 궁리하던 개성 양반들이 땅이 없어서 농사는 못 짓고 장사를 하게 되었다. 각 집을 지어 장사를 하게 된 개성 양반들을 각 쟁이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각 쟁이를 깍쟁이로 발음하게 되었다.
개성 각 쟁이에서 유래되었다는 “깍쟁이”의 어원을 설명하던 카랑카랑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안내원의 목소리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세월호를 잊지 않은 개성 사람
그녀는 개성 사람으로서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향토에 대한 긍지도 넘친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 땅을 떠나지 마라. 이것이 우리 조상님들의 유언입니다. 이 땅을 지키면서 여기서 살라하지 않습니까. 개성 사람은 죽어서도 송악산을 베고 죽는다.”
안내원이 개성 사람들의 기개와 절개를 이야기하면서 한 말이다.
개성 사람은 죽어서도 송악산을 베고 죽는다.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그의 말이다.
안내원의 찰진 입담에 내내 깔깔 웃었다. 나와 케미가 잘 통해 금세 친해져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우리는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안내원으로는 처음으로 나의 명함을 주었다. 하나 된 한반도가 새겨진 내 명함에는’ 매사추세츠 코리아 평화운동 공동의장’이라는 타이틀 말고도 ‘세월호를 잊지 않는 보스턴 사람들의 모임 대표’라는 타이틀도 새겨져 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와 세월호를 잊지 않는 보스턴 사람들의 모임에 대해 이야기했다.
2014년 4월 16일. 304명의 생명이 바닷속에 스러져갔다. 보스턴에서도 그저 눈물을 흘리며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봐야 했다. “가만히 있으라”라고 했다.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다. 승객이 바닷속에 잠기고 있는 상황에서 해양경찰은 선장과 선원만 구했다. 그곳에 정부의 구조활동은 없었다. 언론은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생산하고 전 국민에게 배포했다. 304명의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속수무책 늦장 대응 청와대는 해경에게 사진자료를 요구했다. 너무도 비상식적인 상황이다. 그날 그 바다에 국가는 없었다.
7년의 세월 동안 그날의 참사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새겨져 있다. 세월호 참사 7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왜 승객들을 구하지 않았는지 알지 못한다. 참사의 책임자는 처벌받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졌다. 이런 현실이 우리를 더욱 슬프고 분노하게 한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지난 7년간 가슴에 자식을 묻고 피울음을 토해낸 부모님들. 단식을 하고 삭발을 하고 엄동설한 풍찬노숙을 견뎌낸 유가족들이다. 그런 부모님들을 바라보며 멀리서나마 마음으로 함께하고 응원했던 이들, 유가족들의 손을 놓지 않고 아픈 가슴으로 함께 눈물 흘린 이들이 있다. 세월호를 잊지 않은 보스턴 사람들이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 큰 기적을”을 일으킬 수 있기를 소망하며 작은 걸음을 내디뎠다.
2014년 5월 18일. 세월호 참사 후 한 달여의 시간을 비통함과 분노 속에서 보내던 보스턴 사람들이 모였다.
5월 18일 2시 보스턴 하버드대학교 앞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와 진실규명을 위한 시위가 있었다. 엄마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여 이루어 낸 집회였다. 자식을 저 깊고 차디찬 물속에 두고 온 엄마의 마음으로 그들이 꽁꽁 숨기려는 진실을 밝히고 그 책임에 중심에 있는 자에게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음을 알리고자 엄마들이 모였다. 100여 명의 보스턴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자녀들과 함께 거리에 나왔다. 어린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모여 자발적인 참여로 아름다운 집회를 이뤄냈다. 멀리 보스턴에서도 늘 함께 하고 있음을 유가족들에게 전했다.
“마지막까지 불렀을 이름 엄마, 이제 우리 엄마들이 대답합니다!” 이렇게 모인 보스턴 한인 엄마들과 아빠들이 세월호를 잊지 않은 보스턴 사람들의 모임을 이루었다.
“세월호 유가족의 눈물, 바로 보스턴 엄마들의 눈물입니다.”
“지겹다는 소리 하지 마세요. 자식이 어떻게 지겨울 수 있습니까!”
“안전한 나라, 내 조국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세월호를 잊지 않은 보스턴 사람들의 마음과 활동을 그녀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리 선생님이 이런 좋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존경합니다. 저도 세월호 참사를 텔레비죤에서 보았습니다. 같은 엄마로서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자식들을 잃은 부모님들의 속은 오죽하겠습니까! "
카랑카랑한 그녀의 목소리에 그녀의 안타까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억울하게 숨져간 아이들의 넋이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랐다. '남측에 가서 세월호 유가족 부모님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북녘 동포들도 함께 마음 아파하며 진실이 규명되길 바란다'는 자신의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했다.
세월호를 잊지 않는 개성 사람이 있다. 우리는 또 남과 북이 엄마의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부모 앞에서 우리는 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위로하고 함께 아파한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개성에서도 보스턴에서도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세월호의 진실과 정의가 이루어지길 바랬다. 진실이 밝혀지고 책임자가 처벌되는 날, 이런 비극은 풀이되지 않을 것이며 고국은 안전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남녘동포와 해외동포들에게 한반도 통일에 대한 메시지도 전했다.
"조선이 하나로 뚝딱 뭉쳐가지고 세계 1위 국가로 이렇게 나가면 좋은 일이지 나쁜 게 뭐가 있습니까. 뭉쳐야 됩니다. 뭉치면 큰 힘이 나고 흩어지면 모래알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서로서로 힘을 합쳐가지고 너도 합치고 나도 합치고 해 가지고 조선사람이라면 모두가 힘을 합쳐가지고 세계를 앞서 나가는 투쟁의 첫자리에 모두가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조용하지만 기품 있는 도시, 개성. 마치 절개 곧은 정몽주와 같은 선비의 모습을 개성의 이곳저곳에서 발견하였다. 또한 지조와 자존감 높은 개성 동포의 매력에 푹 빠졌다. 짧은 방문,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는 어느새 개성의 모습에 매료되었고 개성 동포와 정이 들었다. 다음에 북에 가면 꼭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그의 카랑카랑한 음성, 찰진 입담이 그립다. 다시 한번 두 손을 마주 잡고 동포의 진한 정을 나누고 싶다. 그녀가 보고 싶다. 세월호를 잊지 않는 보스턴 사람은 세월호를 잊지 않은 개성 사람을 그리워한다.
세월호 참사 7주기가 다가온다. 7년의 세월 동안 눈물과 고통 속에 상처투성이 가슴으로 살아온 부모들은 오늘도 그 아픈 가슴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며칠 전 온라인으로 추모식을 하며 부모의 절규와 눈물을 다시 마주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의 손을 잡아 주는 것,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전부였다. 지난 7년간 세월호를 잊지 않는 보스턴 사람들은 멀리서나마 그렇게 유가족 부모님들과 함께 하고자 했다. 7년을 한결같이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외친다. 자식의 죽음의 이유도 모른 채 절규하는 부모가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올해도 7주기를 맞는다.
2021년 4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