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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Apr 13. 2021

Black Lives Matter: 모두의 눈물

한국아줌마에게 주어진 기회의 의미

#BlackLivesMatter


49살에 초짜 교사로 시작한 나의 미국 교사 생활은 이제 7년 차를 접어든다. 내 나이 56살. 미국 교직은 정년이 없기에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교단에서 계속 가르칠 수 있다. 50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주어진 기회였다. 오랜 경력 단절을 끝에 갖게 된 미국에서의 나의 커리어. 내게는 너무도 소중하고 고마운 일이다.


49살의 외국인에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에게 공립 교사라는 기회를 준 사회, 미국. 50을 바라보는 한국인 아줌마에게 주어진 이 기회는 개인의 행운, 능력의 문제 이상의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다. 내가 잡은, 나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역사와 사회 변화의 산물이며 지금도 변화하고 역동하는 미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의 이 소중한 교직과 작년 고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촉발된 Black Lives Matter 운동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한국 아줌마가 교사로 취직한 것이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인권 운동과 어떤 관계있다는 건지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할까?


2020년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거리에서 한 흑인이 울부짖었다. 그는 수갑에 채워진 채 아스팔트 위에서 백인 경찰의 무릎에 뒷목이 눌려 질식해 죽어갔다. 이 흑인은 조지 플로이드 George Floyd였다. 그가 마지막 숨을 쉬는 모습을 여러 목격자들이 비디오로 촬영했다. 이 비디오는 미디어를 통해  전 미국과 전 세계에 퍼졌다. 많은 사람들이 비디오를 보고 분노했고 안타까운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플로이드의 슬픔을 기억하고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왔다.


미국 전역에서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는 물결이 일었다. 미니애폴리스뿐만 아니라 애틀랜타,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뉴욕, 보스턴 등 다른 많은 미국 도시에서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숨을 쉴 수 없다”는 구호가 미국을 뒤덮었다. 플로이드가 죽어가며 남긴 마지막 말이다. 플로이드가 죽어가며 이 말을 한 최초의 흑인이 아니었다. 2014년에 Eric Garner 에릭 가너는 "숨을 쉴 수 없다"라고 11번을 외쳤다. 그도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린 채 애원했다.  그는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플로이드 이전에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거나 위협받는 일이 계속 있었다.


한 흑인의 죽음이 #BlackLivesMatter 운동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플로이드의 죽음을 추모하며 거리로 나선 미국인들은 “구조적인 인종차별을 끝내야 한다”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숨을 쉴 수 없어요" 플로이드와 가너가 죽어가며 했던 말을 외친다.  #BlackLivesMatter 운동은 플로이드와 가드너와 같은 흑인 피해자의 정의를 위해 싸운다. 다시는 또 다른 플로이드와 가너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인종 차별과 경찰 폭력의 종식을 촉구한다.


가해자 처벌을 넘어 사회 구조 변화까지 나아가야 안타까운 죽음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이다. 플로이드의 아픔은 현재 진행형이고 구조적이며 역사적이다. 흑인의 눈물이 되풀이되는 구조적인 원인과 역사를 알게 되면 플로이드의 아픔은 흑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플로이드의 눈물은 흑인만의 눈물이 아니었다. 흑인, 라티노, 동양인, 아랍인 등 미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유색인종의 눈물이었다.



#BlackLivesMatter는 역사적이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나의 일, 교직을 사랑한다. 나이, 성별, 인종, 문화, 언어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 없었기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다양성을 추구하는 미국.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이민자들이 가진 문화적, 사회적, 언어적 배경을 약점으로 보지 않고 이 사회를 보다 풍부하게 하는 강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와 사고가 미국 사회 전체를 일관되게 지배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고 그들이 목소리를 계속 내기에 이 사회는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목소리는 법과 제도, 정책의 형태로 실현되었다. 이것이 바로 고용에 있어서의 차별금지법이다.


고용에 있어서의 차별 금지는 법제화되어 있다. 채용공고 시 이 차별금지법은 항상 명시되어 있다. 또한 이 차별금지법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사용주가 이를 어길 시에는 처벌을 받는다. 그러하기에, 49살 난 한국 아줌마가 공립학교 교사로 채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래는 최근 보스턴 공립학교 교사 채용공고의 일부이다. 차별금지가 명시되어 있다.


보스턴 공립학교는 차별금지 정책에 따라 인종, 피부색, 연령, 범죄 기록 (문의하는 경우만 해당), 장애, 노숙자, 성별, 성 정체성, 종교, 국적, 조상, 성적 지향 등을 근거로  프로그램, 시설, 고용, 교육 기회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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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ston Public Schools, in accordance with its nondiscrimination policies, does not discriminate in its programs, facilities, or employment or educational opportunities on the basis of race, color, age, criminal record (inquiries only), disability, homelessness, sex/gender, gender identity, religion, national origin, ancestry, or sexual orientation.



차별금지에 대한 법제화의 힘이다.  오늘의 차별금지법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지난한 인권 투쟁의 산물이다. 미국이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로 가는 긴 여정에  소수인종, 소수민족이었던 흑인, 라티노, 아시안들의 피와 눈물이 배인 고난과 희생이 있었다.


1월 셋째 월요일은 마틴 루터 킹 데이로 국경일이다. 미국인들은 만인의 자유를 위해 싸운 위대한 흑인 지도자를 기억하며 이 날을 기념한다. 자신의 이름으로 국경일을 가진 유일한 인물, 마틴 루터 킹이 남긴 유산은 실로 위대하다. 그의 유산은 한국에서 건너온 49살의 아줌마에게도 인종, 문화, 언어, 성별 등에 대한 차별 없이 취업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바탕을 둔 평화적 인권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은 미국 인권 운동의 중심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1963년 6월,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흑인에 대한 모든 정치적, 사회적 차별 철폐를 골자로 하는 민권법안을 의회 제출한다. 이에 힘입어 1963년 8월 28일에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 March on Washington for Jobs and Freedom이 열리게 되었다. 이 행진의 목적은 흑인들의 시민적, 경제적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흑인과  유색인종, 백인이 워싱턴 기념비에서 링컨 기념관까지 평화의 행진을 했다. 모든 사람들의 자유, 권리, 존엄을 되찾기 위한 행진이었다.


킹은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을 공유했다. 킹은 이날 워싱턴 D.C. 링컨 기념비 앞에서 연설을 한다. 250만 명의 관중은 뜨거운 환호를 하며 이 흑인 지도자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연설, "I Have a Dream"이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나의 어린아이들이 언젠가는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킹의 꿈, 핍박받고 멸시받던 흑인과 유색인종의 꿈을 이루기 위한 투쟁은 계속되었다. 많은 이들이 이 투쟁에 나섰다. 평화로운 시위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부터 젊은이, 남녀노소의 흑인과 백인이 함께 했다.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시위 참여자들이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투옥되기도 했다. 평화적인 시위를 이끌었던 킹도 여러 차례 투옥되고 백인우월주의 극우세력들에게 살해 위협과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마틴 루터 킹으로 대표되는 1950년대와 60년대 인종 차별반대 투쟁은 미국 사회의 인권사에 큰 획을 그었다. 1960년대 이전과 이후의 인종에 미국의 상황은 확연히 다르다.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의 투쟁으로 인종차별과 인종분리를 합법화했던 남부의 법이 폐지되었다. 인종차별을 정당화했던 법들은 대법원의 위헌 판결로 무력화되었다.


1970년대 이전까지의 미국의 상황은 실로 불의 그 자체였다 었다. 1861년에 시작되어 1865년에 북군의 승리로 끝난 남북전쟁은 노예신분이었던 많은 흑인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1865년 미국 수정헌법 제13조가 비준됨으로써 흑인의 노예해방은 법적인 효력을 갖게 되었다. 흑인들은 노예제에서 해방되었지만, 남부의 의회에서는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을 백인과 분리하는 인종분리 segregation 정책을 가능하게 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일명, 짐 크로 법 Jim Crow Laws라고 불리는 인종차별법은 유색인종의 권리를 앗아갔다. 백인과 유색인종은 모든 공공장소에서 분리되었다. 예를 들어, 공립학교, 대중교통, 화장실, 식당, 식수대 등에서 백인 전용과 유색인종 전용으로 나누어졌다. 미국 군대에서도 백인과 유색인종은 분리되었다.


백인이 다니는 학교와 유색인종이 다니는 학교가 따로 있었다.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은 백인들에 비해 열악한 환경의 학교에 다녔다. 좋은 시설의 좋은 학교는 백인 학생들의 차지였다. 버스에서도 유색인종은 뒷자리에 앉아야 했고 그나마 뒷좌석도 백인이 요구하면 양보해야 했다. 열차도 백인 전용칸과 유색인종 전용칸이 따로 있었다. 이것이 남부 주들의 법이었다.


매사추세츠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응용언어학과 학과장이었던 교수로부터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케이프 버디 Cape Verde라는 아프리카 국가 출신이다. 1970년대 중반 그가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유학 왔을 때, 남부에서는 여전히 버스에서의 인종분리가 지속되었다고 했다. 버스의 뒷좌석은 유색인종 지정석이었고 유색인종은 앞 좌석에는 앉을 수 없었다고 했다. 2003년에 들은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불과 30년 전 미국의 모습이었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인종분리와 차별은 1970년대도 계속되고 있었다.


인종차별을 지지하는 법으로 흑인뿐만 아니라 동양인, 라티노를 포함한 모든 유색인종들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 부당한 법으로 인해 유색인종들은 동등한 교육 기회도 박탈당하고 고용에 있어서도 차별대우를 받았다. 주거지 선택의 제약을 받았다. 국한된 지역에 한하여 유색인종의 거주가 허용되었다. 유색인종 거주 지역에는 부동산 투자, 주택융자, 그리고 각종의 경제개발 기회를 제한하였다. 사회 진출과 개인의 자기실현, 재산 취득 등 모든 영역에서 부당하게 차별받았다. 짐크로 법은 1887년부터 1965년까지 그 맹위를 떨쳤다.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한 역사는 그 뿌리가 깊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인종차별을 제도화했다. 17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이 인종차별을 어떻게 합법화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1783년 영국과의 독립 전쟁에 승리한 미국은 국가 건립의 주요한 법을 제정해 나간다. 1790년에 의회는  귀화 법 Naturalization Act을 제정한다. 소위, 1790년 귀화 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은 귀화를 통해 미국의 시민권자를 취득할 수 있는 자격을 재산을 가진 자유로운 미국 남성으로 제한했다. 백인이 아닌 인종 즉, 동양인, 흑인, 라티노를 포함한 유색인종, 계약 농노나 하인 등은 배제되었다. 백인이더라도 여성이면 시민권 취득이 제한되었다. 재산을 가진 백인 남성만이 귀화를 통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인종차별에 근거한 이 국적법을 통해 미국이라는 사회가 어떤 정신과 가치로 건립되었는지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백인우월주의는 건국 초기부터 법으로 지지받고 있었다.


이 귀화에 대한  인종차별법은 1952 년까지 위력을 떨쳤다. 특히, 이 법은 아시안 이민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국적법은 아시아 이민자들의 시민권 취득을 막아 권리를 재산 소유권, 법정에서의 대표, 공공 고용 및 투표와 같은 미국의 주요 생활 영역으로 제한했다.



인종차별 앞에 눈물을 흘렸던 코리언 아메리칸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제도적, 관습적, 사회적 인종 차별의 벽에 좌절했던 코리언 아메리칸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앨리스 현이다. 앨리스 현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한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의 딸이다. 그녀는 한국인 최초 미국 시민권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어내며,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비극적인 운명의 길을 걸었다. 남한에서는 한국판 마타하리로, 북한에서의 미제의 간첩으로, 미국에게는 북한의 간첩으로 불려졌다. 그녀는 북한에서 미국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박헌영과 함께 처형되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분단된 조국 남과 북, 그리고 미국에게도 버림받은 현 앨리스의 생애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바랬고 하나 된 조국을 염원했던 그녀의 삶 앞에 숙연해진다.


나는 앨리스 현의 미국 이민자로서 삶에 주목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녀가 직면했던 비극 중 하나가 꿈이 좌절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출중한 재능을 지닌 여성이었다. 1929년 아버지 현순 목사의  권유에 따라 뉴욕의 헌터 컬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다. 가정부까지 해 가며 학비를 조달해 힘겹게 졸업을 했다. 교사의 꿈을 키우며 열심히 공부해 영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 교사로 취업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앨리스 현은 동양계 미국인으로 교사 일자리를 구하는데 인종차별이라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아시안 아메리칸인 그녀를 교사로 채용하는 학교는 없었다.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인해 그녀는 교사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다. 미국 주류사회에 속할 수 없었던 그녀는 소수인종, 소수민족으로서의 동양계 아메리칸, 코리언 아메리칸의 존재를 느꼈으리라. 때는 1930년대다.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미국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에 살았던 최초의 코리언 아메리칸 앨리스 현의 좌절과 절망이 2021년을 사는 나의 가슴에 닿는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또 다른 코리안 아메리칸의 삶이 있다. 인종차별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모든 인간은 피부색이나 인종과는 상관없이 존중받아야 함을 보여준 이가 있다. 바로 새미 리 Sammy Lee다. 그는 1920년에 캘리포니아 프레즈노에서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2 년 여름날, 12 살의 새미 리는 작렬하는 캘리포니아의 태양 아래 서서 부러운 눈빛으로 한 무리의 백인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공공 수영장에서 물장구를 치는 백인 아이들에게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새미는 저 아이들처럼 풀 속에 첨벙 뛰어들어 다이빙을 해보고 싶었다.


유색 인종 한인 소년은 일주일에 단 하루만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수요일은 유색인종들에게 수영장이 개방되는 날이다. 유색인종이 수영장을 사용하고 난 후, 수영장의 물을 빼고 새로운 물로 교체되었다. 다음날 사용할 백인들을 위해서다.


인종분리가 지배 질서였던 1930년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유색인종은 백인과 함께 수영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새미 리도 수영장 물을 갈기 전날에만 연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차별이 새미의 다이빙에 대한 열정을 약화시키지는 않았다. 이미 의사가 된 새미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한다. 올림픽 챔피언이 된 최초의 아시안 아메리칸이 되었다. 그는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다이빙 10m 플랫폼 금메달 2연패를 달성했다. 올림픽 챔피언이 되고자 하는 그의 꿈과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을 다 이루었다.


이 세계적인 다이빙 영웅에게도 인종 차별의 그림자는 수영장 안에서도, 밖에서도, 사회 곳곳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그가 살고 싶은 곳에 집을 살 수가 없었다. 1955 년 육군 군의관에서 제대한 후, 그는  중국계 미국인 아내 로즈와 함께 살 집을 가든 그로브에 사려고 했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백인이 아닌 사람에게 팔지 말라고 지시를 받았다. 인종차별의 벽에 다시 부딪히게 된 것이다. 이어지는 언론 보도는 지역 사회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여론의 힘입어 새미 리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 수영장이 있는 집을 살 수 있었다.


앨리스 현과 새미 리. 수십 년 전 인종차별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분투했던 두 코리안 아메리칸의 삶은 80년을 뛰어넘어 나에게 울림을 준다.  얼마나 어둡고 절망적이었을까. 두 코리안 아메리칸이 흘렸을 눈물을 생각해 본다. 그들의 눈물은 조지 플로이드가 죽어가며 흘린 눈물과 다르지 않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씌워지는 편견과  인종차별의 굴레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을 본다. 사회와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 80년 전 앨리스 현이나 새미 리가 겪었던 인종차별과 인종분리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조차 할 수 없다. 과거의 인종분리과 차별은 정말 터무니없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미국의 인종차별적 상황은 80년간 많이 개선되었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교직을 구할 수 없는 현실은 아니다. 유색인종이기에 수영장을 백인과 함께 사용할 수 없는 미국은 아니다. 이런 오늘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제도적, 법적, 관습적 인종차별을 깨뜨리기 위한 많은 이들의 고난과 투쟁은 보다 나은 오늘을 가져왔다.


49살의 한국 경단녀가 새로운 나라에 정착하기 위한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고 노력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개인이 겪고 있는 경험과 성취도 결국 역사의 진보와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다. 그 어떤 것도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사회적 조건과 시스템이 불편부당했다면 이룰 수 없는 성취였을 것이다. 인종, 문화, 언어, 나이,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취업에 있어서 차별금지가 작동하는 시스템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나와 같은 코리안 아메리칸이었던 80년 전의 앨리스 현과 새미 리의 눈물과 고난이 말해 준다. 인종차별과 인종분리의 시대를 살았던 많은 유색인종의 고통과 분투가 말해준다. 50년대 60년대의 흑인의 인권투쟁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미국은 여전히 인종차별이 현존하는 곳이다. 어떤 인종적 배경이나 계급적 배경에 상관없이 아메리칸드림을 이룰  있는 나라는 아니다.  교육의 기회, 자아실현의 기회, 경제적 계급 상승의 기회가 모든 이들에게 균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이를 이루기 위해, 아직  길이 멀다.   길을 이제 모두 함께 가야 한다. 나도  대열에 함께 한다. 내가 받은 것을 이제  사회를 위해, 모든 이들을 위해 돌려줄  있는 길이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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