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겪은 코로나와의 한판 승부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오늘을 살아낸 작은 반짝이는 순간들이며 그걸 기억하는 힘에 있을지 모른다.
-소설가 조정란
2020년 닥쳐온 팬데믹 상황. 지난 16개월간 코로나에 대응했던 나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 보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버티고 이겨냈던 반짝이던 순간들을 기억하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내는 희망과 힘을 얻고자 한다.
내가 미국에서 겪은 코로나
미국 보스턴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의 영향과 코로나가 가져온 변화 속에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현재를 살며 변화하는 내일을 맞아야 한다. 어쩌면 어제의 우리의 모습에서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코로나는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코로나에 대응하는 나의 모습, 주변의 모습, 내가 속한 공동체의 모습은 어떠했나? 질문이 우수수 쏟아진다.
한마디로, 잘 버텨냈다. 지난 16개월은 코로나와 싸우며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해 왔던 시간이었다. 큰 파도를 몇 번 넘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에서 마주해 본 적이 없는 위험과 위협의 파도가 밀려왔다. 코로나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미국의 모습을 보았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민낯을 보았다. 코로나에 대처하는 미국의 모습을 마주했다. 위기와 위협은 단지 코로나로 인한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코로나 시대, 위기와 위협의 파고를 넘나들며 미국 사회가 작동하는 시스템과 원리를 체험했다.
2020년 3월 12일 목요일 저녁 8시 12분. 학구 교육청에서 한통의 이메일이 왔다. 내일부터 학구의 모든 학교가 Covid 19으로 인해 문을 닫는다는 내용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발표였다. 오늘까지 학교에서 아무 이야기도 들은 바가 없었다. 코로나 상황에 대한 우려나 대책을 학구나 학교 측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듣지 못했다. 삼삼오오 친한 교사들끼리 학구 당국이나 주 당국이 팬데믹 상황에 대해 빠르게 대처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근심 섞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몇몇 학생들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는 상황에서 계속 학교에 나오는 것이 안전한지 걱정 어린 질문을 했다. 나는 명쾌한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2월부터 팬데믹의 공포가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빠르게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한국은 이미 발 빠르게 대응했다. 정부는 신속하게 방역체계를 세우고 시민들은 마스크를 썼다. 2020년 2월, 마스크 착용은 한국에서는 이미 일상이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의 상황은 사뭇 달랐다. 3월까지 모든 일상이 평소와 똑같이 이어졌다. 학교, 관공서, 공공시설은 여느 때처럼 운영되었고, 사람들은 모임을 갖고 파티를 하며 일상을 즐겼다. 2월 말에 보스턴의 제약회사가 개최한 컨퍼런스에서 코로나 환자가 여러 명 나왔다는 보도를 접하고 불안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지속되었다. 나는 학교에 출근해 학생들을 가르쳤고 학교의 일상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 누구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이때, 이미 한국에서는 학교와 공공시설이 문을 닫았고 코로나 방역에 돌입했다. 나는 마스크를 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스크를 썼을 때의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두려웠다. 그 당시 미국에서 마스크를 쓴다는 것은 아프다는 것을 의미했다. 코로나 환자로 의심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정부에서는 마스크 착용을 권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착용을 권유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팬데믹에 대처하는 미국의 모습이었다. 그 사이 코로나는 빠르게 미국 전역에 퍼지고 있었다.
2020년 3월 13일 금요일.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추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 한 새로운 삶의 모습이 펼쳐졌다. 학교가 문을 닫았다. 수업은 구글 클래스와 구글 미트라는 플랫폼을 이용해 온라인으로 이루어졌다. 교실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컴퓨터 스크린에서 아이들을 만났다. 스크린의 작은 사각형 공간이 아이들과 나를 이어주었다. 스크린의 공간은 또 다른 교실을 창출해 냈다. 사각형안의 아이들의 표정과 동작을 통해 그들의 반응을 읽어 내고 소통했다. 새로운 교실의 모습이었다.
2020년 3월 13일 금요일. 집 근처 마트에 갔다. 생필품을 사기 위해서다. 화장지, 종이타월, 계란, 우유 등이 필요했다. 마트에 들어서자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화장지, 종이타월, 계란, 우유가 있는 섹션이 텅텅 비어있었다. 소위, ‘화장지 대란’을 마주했다. 이미 주요 생필품이 바닥이 난 것이었다. 손세정제나 세정 용품도 칸도 다 비어 있었다. 내가 한발 늦은 것이다. 그야말로 싹쓸이를 한 듯했다.
텅텅 비어 있었던 주요 생필품 섹션의 모습은 팬데믹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반응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대책, 무대응으로 일관하던 트럼프 행정부를 신뢰할 수 없었던 미국인들. 내일을 보장하지 못하는 미국 시스템에 대한 불안감과 생존 본능은 일단 생필품을 쌓아 재어 놓게 했다.
나 역시, 팬데믹 내내 나를 공포에 밀어 넣었던 것은 만약 코로나에 걸리게 된 경우 그 이후에 전개될 상황이었다. 팬데믹 초기, 코로나 검사를 받기는 하늘에 별 따기였다. 검사조차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의료 현실이었다. 코로나 증상이 나타나 병원에 전화하면, 타이레놀 먹고 집에서 버티라는 말이 전부였다. 2020년 4월, 지인의 남편도 코로나에 걸렸다. 병원에서 치료도 못 받은 채 타이레놀을 먹고 집에서 있다가 호흡곤란이 왔다. 앰뷸런스를 불러서 병원에 갔으나,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었다. 지인 남편의 죽음은 나에게 큰 공포로 다가왔다.
미국의 부실한 건강보험과 의료체계는 코로나의 공포를 가중시켰다. 미국 의료체계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의료보험의 80% 이상은 사보험이다. 한가족이 부담해야 하는 의료보험료는 내가 사는 매사추세츠 주의 경우 연간 19000-24000달러(약 2000-2500만 원) 정도다. 직장에 다니는 경우, 직장에서 60-80% 정도 매치를 해주기에 개인이 부담하는 액수는 적어진다. 직장이 없거나 건강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소규모 직장에 다니는 경우, 건강보험료는 다 개인의 몫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 전체 인구의 대략 10%가 건강보험 미가입자다.
작년 4월 미국 CNBC 방송은 미국에서 의료보험 미가입자가 코로나 19 치료를 받을 경우 병원비가 4만 2500달러(약 5200만 원)에서 최대 7만 5000달러까지 청구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어마어마한 액수다. 설사, 운이 좋아 치료를 받게 되더라도 천문학적인 의료비를 감당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미국이 전염병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연일 확진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같은 시기 인구 대비 가장 많은 확진자가 발생한 데다 허점 많은 의료체계의 민낯이 드러났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강한 나라, 미국의 모습은 없었다.
미국에서 팬데믹과 싸우다: 계속되는 도전
학교는 문을 닫았고 모든 수업이 원격화상으로 이루어졌다. 컴퓨터의 화면을 통해 학생들을 만났고 그들과 소통하며 가르쳤다. 전혀 새로운 수업방식이 나도 학생들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도 아이들도 낯선 수업 형태에 적응하느라 한동안 고전했다. 나는 제일 먼저 온라인 수업에 필요한 새로운 플랫폼의 사용법을 배우고 익히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였다.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느라 테크놀로지와 밤늦게까지 씨름했다.
화상수업은 물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수업과 달리 교사와 학생이 만나 서로를 생생하게 느끼며 소통할 수 없다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화상수업은 현장감이 떨어지기에 학생들이 집중도가 떨어졌다. “Can you hear me OK? Are you with us?” 수업 중 여러 번 반복하는 말이었다. 새로운 방식의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운 아이들. 꼼질꼼질. 들썩들썩. 왔다 갔다. 작은 스크린 앞에 앉은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책상 앞에 놓인 컴퓨터 스크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10분 이상을 버티기가 힘들어 보였다.
몸을 꼼지락거리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아이들도 있다. 계속 앉아있기가 힘든지 서서 왔다 갔다 하는 아이도 있다. 콧등을 쉴 새 없이 긁는 아이. 한 아이는 아예 화면을 꺼놓고 화상 수업에 참여한다. 집안의 모습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아이도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카메라를 켜라고 강제할 수 없다. 개인과 가정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자 했다. 중학교 6,7, 8학년 아이들을 스크린을 통해 이렇게 만났다.
화상수업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도전적이다. 물리적 공간에서 내 앞에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에, 수업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활용해야 했다. 또한, 구글 미트, 구글 클래스, 구글 슬라이드, 구글닥을 사용해 학습지, 읽기, 쓰기 자료를 온라인 환경에 맞게 만들어야 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보통 교실수업에서 필요한 자료를 만들 때 보다 2배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팬데믹 상황에서의 온라인 수업은 많은 교사의 수고를 요했다. 수업 시간과 화상수업 로긴 정보를 매일, 매주 이메일로 알리고 구글 클래스와 학교 웹사이트에 공지했다. 아이들의 출석률이 낮았다. 늦게 수업에 나타나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 아이들이 집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출석 여부도 이메일로 학부모에게 알리고 결석이나 지각의 경우 학부모와 직접 통화했다. 일일이 학생과 학부모에게 연락해 왜 수업에 출석 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아이들의 학습 참여를 꼼꼼히 살피고 정서적 어려움이 있는지도 보살폈다. 코로나로 우리 아이들은 많은 것을 잃어 가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의 박탈, 학교와 친구의 상실, 감금.. 코로나 시대의 아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이런 고민 속에 아이들과 함께 하며 팬데믹의 일상을 살아갔다.
전혀 새로운 팬데믹의 일상은 새로운 노르멀이 되었다. 그렇게 3월, 4월, 5월을 버텼다. 코로나가 가져온 도전과 어려움은 수업에만 있지 않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 한 새로운 도전이 삶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했다. 식료품은 장을 보러 가지 않고 배달시켰다. 위험을 무릅쓰고 배달하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에 팁도 넉넉하게 드렸다. 배달된 식료품은 하나하나 다 비눗물로 씻었다. 식료품과 생필품을 소독하는데 꼬박 1-2시간이 걸렸다.
온라인 수업에 적응하느라 고전하며 코로나 감염의 위험과 불안 속에서 팬데믹 일상을 버텨내고 있을 무렵,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그것은 정리해고라는 한 번도 맞닥뜨려 본 적이 없는 높은 파도였다. 내 앞에 밀려오는 저 거세고 높은 파도를 헤쳐갈 수 있을까? 실직에 대한 불안과 염려로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5월 말, 소위 핑크 슬립 pink slip의 공포가 찾아왔다. 핑크 슬립이란 고용을 종료한다는 내용을 담은 일종의 해고통지서다. 핑크색의 종이에 쓰인 통지서여서 핑크 슬립이라고 부른다. 시의 세수가 줄었다고 했다. 팬데믹으로 시의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아 세금이 제대로 거치지 않아서, 교육재정을 삭감한다고 했다. 이 학구에 근무한 3년 미만의 교사들은 다 정리해고 대상이 되었다. 나도 정리해고 대상 중 한 명이었다. 이 학구에서 첫 해를 근무하던 중 팬데믹이 닥쳤다.
한국에서 교사를 하면서 교사를 대상으로 정리해고를 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는 교사하면 안정적인 직업의 대명사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역시, 자본주의의 종주국답게 교육분야도 자유시장 경제의 원리에 충실했다. 언제든지 교사의 수를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고용계약서를 체결할 때, 이 독소조항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가치는 미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리라고 믿었다. 교사를 쉽게 해고하는 미국 교육을 생각하지 못했다.
미국은 교육계는 테뉴어 제도가 있다. 테뉴어란 종신 고용직을 의미한다. 테뉴어가 되면 해고의 위험 없이 평생 고용이 보장된다. 내가 근무하는 학구는 만 3년이 되면 테뉴어를 얻게 된다. 첫 번째 정리해고 대상은 테뉴어가 아닌 3년 미만의 교사였다. 그리고 정리해고 대상이 일부 테뉴어 교사들에게도 확대되었다.
340여 명의 교사가 정리해고 대상자로 핑크 슬립을 받았다. 교사들 사이에 저항이 일었다. 자신의 생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학습권과도 직결된 사안이었다. 교사 수가 줄면 교사 1인당 가르치는 학생수가 줄기에 교육의 질의 저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조의 발표를 통해 이 교육구는 비상사태에 대비한 예비비가 있음을 알았다. 이 예비비를 지출하면 교사의 급료를 충당할 수 있기에 대대적인 정리해고가 불필요하다. 그럼에도 교육구는 예비비를 지출하지 않고 재정상의 이유로 340명의 정리해고를 단행하려고 했다.
우리는 교원노조의 깃발 아래 교사들이 단결했다. Blcak Lives Matter 캠페인과 결합해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Racial Justice = Racial Justice” “교육의 정의는 인종적 정의! “ “Fund Our Future!” “우리의 미래를 위해 재정 삭감을 반대한다.” 200여 명의 교사가 시위에 참여했다. 성명서를 만들어 학부모와 일반 시민의 연대와 지지를 호소했다. 일주일도 안 돼서 1만 명의 지지 서명을 받았다. 6만 명의 도시 인구 중 1/6이 참여한 것이다. 교사들의 단결, 학부모와 시민의 지지로 정리해고의 벽을 넘어 우리는 살아남았다.
교사도 노동을 팔아 살아가야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자이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교육 부분에도 어김없이 작동했다. 고용의 유연화. 학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교사를 해고할 수 있다. 교육노동자의 자리는 팬데믹의 상황에서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팬데믹은 상황은 신자유주의의 신봉자 미국 교육의 민낯을 드러냈다. 정리해고라는 벼랑 끝에서 노동자라는 각성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단결만이 살 길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용기와 끈기" "단결과 연대" 라는 백신이 생기다
지난 16개월을 잘 버텨냈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살아냈다. 특히, 2020년 9월 새 학년이 시작된 이후, 학교에 확진자가 계속 나오는 상황에서 잘 견뎌냈다. 개학 후, 처음 한 달은 온라인으로만 수업했다. 그 다음 5개월은 하이브리드 모형을 적용해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번갈아 가며 학교에 등교하게 했다. 그리고 올 3월 중순부터는 전교생 모두가 등교했다. 나는 10월 말부터 매일 학교에 나가 대면 수업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교에 확진자가 매주 한두 명씩 나왔다. 미국의 전체 확진자 수는 계속 증가하는 시기였다. 확진자가 나와도 학교는 문을 닫지 않고 대면 수업을 강행했다. 학교에 소독이나 방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의 기준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방역조치였다.
살얼음 판을 걷는 심정으로 매일 등교했다. 코로나에 걸릴 수도 있다는 위험을 안고 근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국과는 달리, 미국, 특히 학구의 방역 기준은 철저하지 않았다. 확진자에 대한 동선 파악을 근거로 한 격리나 방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층의 교사가 무증상 확진자로 판명되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같은 화장실을 사용하는 나를 포함한 다수의 교사들은 학구 측의 기준에 의하면 접촉자가 아니었다. 확진자인 그 교사만 자가 격리하고 다른 교사와 학생들은 모두 정상 등교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 확진자로 검사 결과가 나왔다. 자가격리 대상자는 그 학생과 그 학생의 여동생뿐이었다. 나도 그 학생과 같이 나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계속 학교에 나왔다. 이것이 미국 학교가 코로나에 대응하는 모습이었다.
방학이 이제 4주 정도 남았다. 한 학년도가 마무리되는 시점이다. 다시 학구에 핑크 슬립의 공포가 몰아쳤다. 교사 인원 감축을 위해, 새로운 학년 운영 모형을 적용한다는 말이 들렸다. 교사의 인건비 절약과 학교경영 방식의 상관관계가 묘하게 작동했다. 우리 학교에서 3명의 교사가 핑크 슬립을 받았다. 정리해고를 의미한다. 교조와 함께 모두가 최선을 다 했지만, 모두를 지켜내지 못 했다. 함께 했던 동료 교사가 떠난다고 생각하니 슬프고 마음이 심란하다. 쉽게 정리해고하는 교육노동시장의 탄력성을 눈 앞에서 체험했다. 그리고 지켜주지 못 했다는 미안함이 남아있는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누른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팬데믹 속에서 내가 경험한 미국과 미국학교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지난 16개월의 경험에서 희망의 시작을 본다. 코로나 감염의 위험이 최고조로 치달았을 때도 나는 계속 나의 일터인 교단을 지켰다. 그리고 생존해 냈다. 생활을 위한, 삶을 향한 치열한 고군분투의 나날이었다. 코로나와 코로나가 가져온 상황과의 한판 싸움에서 지지치 않고 버텨냈다. 대량 정리해고의 위협도 단결과 연대이 힘으로 물리쳤다.
코로나와의 싸움, 끝이 보인다. 백신의 등장과 빠른 접종으로 코로나에 대한 공포에서 이제는 한숨 돌릴 수 있다.최근, 미국의 코로나 상황은 점차 호전되고 있다. 5월 말 현재, 미국의 백신 접종률은 전체 인구의 50%가 넘었다. 코로나 확진자 증가율도 매일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집단면역이 형성되는 백신 접종률 70%까지 아직은 갈길이 멀지만, 그래도 상황은 희망적이다. 팬데믹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다.
기대와 희망을 품지만, 마냥 낙관적이지도 않다. 미국에서 맞닥뜨린 팬데믹이 가져온 예측 불허의 상황은 마치 높은 파도가 치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망망대해에서 ‘이주민으로서의 새로운 나라에 적응하고 있는 나’는 미국의 또 다른 모습을 매일 새롭게 발견한다. 그리고 ‘교육노동자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내 앞에는 어떤 또 다른 고난과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다음 학년에는 어떤 포스트 코로나의 삶과 도전이 전개될까?
그러나, 결코 비관하지 않는다, 앞으로의 일을 미리 걱정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싸워온 대로 버텨온 대로 하면 된다. 함께 힘을 모아 승리한 빛나는 순간도 있다. 코로나로 인해 맞닥뜨린 상황에서 내 안에는 “용기과 끈기”, 그리고 우리 안에는 "단결과 연대"라는 백신이 생긴 듯하다.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버텨냈던 순간들에서 오늘을 사는 힘을 얻는다. 함께 손 잡고 맞서서 서로를 지켜냈던 연대에서 내일을 여는 힘을 얻는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자가 강한 자다. 단결만이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