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보 Jun 05. 2021

87년 6월의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 사람의 바다 그리고 희망의 바다

영화보다 더 했던 1987년 여름


“우리가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어? 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야.”

영화 “1987”에 나오는 대사다. 20대 나의 청년 시절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영화 “1987”는 우리의 살아있는 이야기다. 모두가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이야기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었다. 어쩌면 계란에 비유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는 개개인. 그런 개개인이 모여 사람의 바다를 이루자 우리가 역사를 새로 썼다.


거리마다 태극기를 흔들고 호헌철폐를 외쳤던 그해 6월. 1987년 6월, 역사의 현장은 1987년의 엔딩 장면 그대로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정의의 바다에서 희망의 깃발이 나부꼈던 6월의 거리를 잊을 수 없다. 6월 내내 펼쳐진 역사의 대장정은 그 어떤 영화보다 극적이고 감동적이었다. 시민 모두가 주연이었던 영화가 바로 1987년 6월의 역사다.


"탕탕탕" 공중에서 굉음을 내며  하얀 가루가 터져 부서진다.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른다. … 쿨럭쿨럭.. 웩... 여기저기서 기침소리가 터진다. 구토가 쏟아진다. 어느새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줄줄 흐르는 눈물과 콧물. 눈이 아리고 매캐함이 코를 찌른다. 나는 최루탄과 지랄탄의 특유한 화학적인 냄새가 채워진 거리 한가운데 서 있었다. 손으로 두 눈을 비볐다. 눈이 아려왔다. 몇 초 동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과 눈의 통증을 참아가며 힘들게 눈을 떴다.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최루가스가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이번엔 지랄탄이 여기저기 길바닥에 구른다. 이름이 말해 주듯, 이리저리 춤추는 지랄탄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흰 연기를 뿜어낸다. 본능적으로 지랄탄을 피해 달렸다. 뿌연 연기가 시야를 가로 가로막는다. 연기 사이로 하얀 헬멧을 쓴 이들이 달려온다. 백골단이다. 그들의 모습은 하얀 해골을 연상케 한다. 청자켓과 청바지를 입은 그들은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진압한다. 백골단은 시위대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백골단을 피해 골목으로 들었다. 몇몇의 대학생과 시민도 함께 골목길을 달렸다. 이번에는 백골단이 골목으로 사과탄을 투척했다. 연한 녹색의 사과탄이 길바닥에 구른다. 골목은 다시 매캐한 화학적 독을 뿜어내는 연기로 자욱했다. 우리는 백골단과 사과탄을 피해 달리고 달렸다.


큰 도로에 섰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 대열을 만든다. 주먹을 쥐고 하늘로 쳐든다. 구호가 울려 퍼진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독재타도! 4천만이 단결했다! 군사독재 타도 내자! 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 살인정권 몰아내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저들은 계속 화학 무기를 우리를 향해 쏘아댄다. 최루탄, 지랄탄, 사과탄이 터지는 거리에서 우리의 함성은  울려 퍼졌다.


1987년 6월의 거리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함성과 그리고 시민의 목소리를 틀어막으려는 군부독재와의 한판 승부가 이루어졌던 공간이었다.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한 목소리로 외쳤던 대한민국 국민!  시민과 학생을 제압하려는 독재자! 서울에서, 부산에서, 광주에서, 인천에서 온 국민은 하나가 되어 폭정에 맞섰다. 독재와의 투쟁은 전국으로 번져갔다. 대한민국의 거리는 뿌연 최루 가스로 가득했다. 그 독한 가루는 우리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전두환 군부독재의 폭압은 지독한 최루가스가 되어 시민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저들은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저들의 물리적인 힘은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선 이들 길을 가로막지 못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은 끝없이 터져왔다. 시민과 학생의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물결이 6월의 거리에서 넘실 거렸다. 1987년 6월. 나는 그 역사의 현장에서 서 있었다. 최루탄과 지랄탄, 그리고 공권력의 폭력에 맞선 용감한 무명의 투사들 중 하나였다. 수많은 무명의 투사들은 1987년 6월의 거리에서 한국의 역사를 바꾸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우리들의 가슴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여름의 태양처럼 불타올랐다. 그것은 고문 정권에 대한 분노의 불길이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학생을 죽인 살인 정권에 대한 응징의 불길이었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향한 불꽃은 모두의 가슴에 타올랐다. 우리 모두가 투사였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이름 없는 시대의 영웅들이 1987년의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다.


대학생, 노동자, 직장인, 상인, 아주머니, 아저씨,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 각계각층 다양한 연령대의 평범한 시민들이 1987년 6월 거리의 주인공이자 영웅이었다. 1987년 여름을 나는 영웅들과 함께 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그들과 여러 날을 보냈다. 거리에서 보낸 가장 뜨거운 여름으로 기억된다.



민주주의를 향한 운명의 시작, 6.10 대회


1987년 6월 6일 토요일, 인천 답동 가톨릭 회관에 인천지역 대학생들이 모여 집회를 가졌다. 고 박종철 열사를 고문 살해한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을 규탄하며 며칠 뒤에 있을 6.10 대회를 앞두고 결의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인천 가톨릭 대학생회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300여 명의 인천 지역 대학생들이 모였다.  


6월 10일은 우리의 항일 독립운동사에 의미 깊은 날이기도 하다. 1926년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6.10 만세 운동을 기리며 군부독재의 군홧발 밑에 신음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구하는 날임을 선언했다. 59년 전 일본의 압제에서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투쟁에 나섰던 학생들의 불타는 구국의 마음은 1987년 6월 다시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났다.  


6월 10일은 결전의 날이었다. 광주학살의 주범, 종철이를 고문으로 죽인 전두환 독재정권과의 한판 승부의 날이다. 인천 지역의 대학생들의 각오는 비장했다. 이제 저들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0여 석의 가톨릭 회관 강당의 좌석은 이미 꽉 채워졌다. 계단과 통로에도 학생들이 뺵뺵히 앉아있다. 수십 명의 학생들은 강당 뒤쪽에 서있다. 비집고 지나갈 작은 공간도 없이 강당은 빼곡히 학생들로 채워졌다.


학생들이 뿜어내는 군부독재에 대한 분노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가톨릭 회관 강당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몇몇 학생들의 현 정부에 대한 비판과 투쟁의 방향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시국토론이 이어졌다. 학살정권, 살인정권을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은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통해 선거로 물러나게 하는 것이다. 다음의 구호로 투쟁의 목표가 집약되었다.


”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독재타도!”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다. 광주의 진실은 보도지침과 언론통제에도 불구하고 일반 시민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문으로 대학생이 죽는 나라,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 만으로 끌려가 감옥에 가는 나라에서 살고 있었다. 국민들은 자신이 직접 대통령을 뽑음으로써 이 독재정권을 끝내고 민주주의가 숨을 쉬는 나라로 만들기를 갈망했다.


이 날 집회의 마지막은 내가 장식했다. 노래를 잘해서도 무대체질이어서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마지막에 노래를 부르며, 부평역에서 있을 6.10 대회를 알리면 좋겠다는 제안이 나왔다. 함께 하던 운동권 모임에서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누군가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내가 한다”라는 심정으로 나섰다. 나는 무대에 올라 들국화의 행진을 열창하고 6월 10일 부평역 광장에서 모여 군부독재를 끝장내자고 했다. 1986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들국화. 독재와의 한판 결전을 각오하는 그날의 집회와 딱 맞아떨어지는 가사였다. 가사를 일부를 약간 변형해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우리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우리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그러나 사천만이 함께 힘을 모은다면


우리 모두가 살인정권에 결사항전으로 싸운다면


행진 행진 행진하는 거야


행진 행진 행진하는 거야


행진 행진 행진하는 거야


행진 행진 행진하는 거야


우리는 민주주의를 향해 행진할 거야


군사독재 끝장낼 때까지



6월 10일 수요일 오후 6시. 부평역 광장과 그 앞의 도로는 인파로 가득 찼다. 6.10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에 참여한 학생, 노동자, 시민들은 도로를 가득 메웠다. 애국가를 부르며 국민대회가 시작되었다. 지나가던 택시들이 경적을 울리며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었다.


집회 사회자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진다. 함께 한 수천의 집회 참여자는 한 목소리로 독재타도의 함성을 질렀다. “학살정권 고문 정권 전두환은 물러가라! 장기집권 획잭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독재타도의 함성은 물결로 넘실거렸다. 연좌 시위로 시작한 우리의 집회에는 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였다. 시위 참여자는 점차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다.


저쪽에서 천여 명의 인하대생들이 대열을 짜서 손뼉을 치며 우리 쪽을 향하고 있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젊은이들의 구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천명의 대학생들이 만들어 내는 함성과 대열을 맞추어 행진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나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시위를 하면서 볼 수 없었던 광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찰랑찰랑 귀걸이를 하고 곱게 화장을 한 여학생들이 손뼉을 치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학생, 하이힐을 신은 여학생, 하이힐을 두 손에 들고 맨발로 걷고 있는 여학생, 화사하고 세련된 여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위 대열에는 많은 여학생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하이힐을 신고, 혹은 들고  인하대에서 부평까지 10km 거리를 뛰어 온 것이었다.


80년대 중반 대학은 운동권과 비운동권으로 구분되는 분위기였다. 너무도 확연히 다른 삶의 모습에 다른 두 부류는 물과 기름처럼 잘 어울리지 못했다. 6월의 거리는, 6월의 대학은 이런 구분이 무색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구분 없이 모두가 스크럼을 짜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우리는 이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길에 하나가 된 것이다.


수천 명이 행진을 하며 한 목소리로 독재타도를 외친다! 1987년 6월 이전까지의 거리 시위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참여한 가두투쟁에는 50-60명 정도의 인원이 참가했다. 거리 시위에서 100명을 넘은 참여자를 보기 어려웠다. 소수가 참여하다 보니 시위 참여자는 경찰에게 연행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보통 경찰의 수가 시위 참여자 수의 몇 배가 되었다. 시위 참여자 열명 중 두세 명은 연행되어 곤욕을 치렀다.


위험을 감수하고 참여해야 하는 거리 시위에 참여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긴장했다. 86년 3월에 거리 시위를 하다가 연행되어 열흘간 유치장에 갇힌 적이 있다. 차디찬 지하 유치장의 냉기를 견디며 경찰의 구타를 참아내야 했다. 시위를 나갈 때마다 연행, 구타, 고문 그리고 감옥살이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연행될 것을 각오하고 시위에 참여하는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공포심을 억눌러야 했다. 겁이 많았던 나에게는 거리 시위는 언제나 공포의 공간이었다.


이제 더 이상 소수의 학생들이 거리 가운데서 구호를 외치고 얼마 안 되어 연행되는 투쟁이 아니었다. 1987년 6월 항쟁은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이들의 투쟁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그야말로 대중 시위, 대중 투쟁의 시대가 온 것이다.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과 함께 하는 시위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대중이 뿜어내는 힘과 위력은 대단했다. 수십만, 수백만이 시위와 행진에 참여하니, 경찰은 이 수많은 시위 참여자들을 다 연행하지 못했다. 우리가 다수가 저들이 소수였다. 저들에게는 최루탄, 지랄탄, 사과탄, 진압용 곤봉과 방패가 있었지만 절대적 다수인 시위 참여자들과 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막을 수 없었다.


우리가 다수인 싸움은 정말 할 만했다. 6월의 거리에서 시위 도중 여러 번 연행당할 뻔했다. 그럴 때마다 번번이 시위에 함께 하던 혹은 시위를 지켜보던 시민들이 경찰의 손에서 구해주었다. 시민들은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시위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을 보호했다. 시민들이 학생들의 방패막이되어 주었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모두에게 용기를 주었다. 불의에 저항하는데 주저함을 버리게 하였다. 수만, 수십만의 시민들이 하나의 대오를 이룰 때 우리는 저들을 맞설 만큼 강할 수 있음을 확신했다.


수천 명의 학생, 노동자, 시민이 대오를 만들어 부평역 앞 왕복 6차선 도로를 행진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만으로도 죽음과 맞바꾸어여야 하는 엄혹한 상황이었다. 내가, 나의 친구가 종철이나 한열이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음에 모두의 가슴속에 슬픔과 분노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거리의 시민들은 구경을 하면서 박수를 쳤다. 민주주의를 향한 행진에 만여 명이 함께 했다.


이제 함께 하니 두렵지 않았다. 지난 2년 반 동안 큰 위험을 감수하며 시위에 참여해야 했던 상황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85년 5월 광주 민주항쟁 5주기 가두투쟁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쫓겨 어느 집 다락방에서 밤을 새운 적이 있다. 86년 노동자 연대 투쟁을 하다 백골단에게 쫓겨 부평 백마장 갈대밭에서 하루 종일 숨어있기도 했다.


6월의 거리, 마력에 빠지다


이제 우리는 두렵지 않았다. 87년 6월의 거리는 뜨거운 태양 아래 민주주의의 열망과 독재타도의 함성이 큰 물결이 되어 넘실거렸다. 시민의 힘을 매일 거리에서 체험했다.  몇 날 며칠을 거리에서 보냈다. 얼굴이 새까맣게 햇볕에 그을렸다. 민주주의와 시민의 힘의 마력에 빠져 여러 날을 그러고 다녔는데도 힘든 줄 몰랐다. 동인천, 제물포, 석바위, 부평 인천의 거리는 독재타도와 민주쟁취의 열기로 가득했다.


인천의 도심을 다니며 시위와 행진을 벌였다. 가는 곳마다, 정권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비판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죄 없는 학생 잡아다가 고문으로 죽이고, 바른말하는 학생에게 최루탄을 쏴 사경을 헤매게 하는 정권 끝장내야 해! “


우리가 구호를 외칠 때마다, 들려오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목소리.


“그래! 학생들이 잘한다! 학생들 장하다!”


거리의 시민들은 구경꾼에서 점차 시위 참여자로 변화하고 있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함께 외쳤다.


“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 시민들과 학생들은 어느새 한 목소리가 되어 구호를 외쳤다.


남녀노소가 모두 한 목소리 한마음으로 고문 정권 폭력정권을 규탄하고 민주주의 만세를 불렀다. 거리에 앉아 연좌 시위를 할 때면, 구경하던 시민들은 어느새 우리의 시위에 동참한다.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주머니를 털어 김밥, 떡, 음료수 등을 사다가 시위대 학생들에게 나누어 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음식을 사 오고 나누었다. 점심과 저녁을 이렇게 거리에서 해결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시위를 주도하는 학생들이 모금을 전개했다. 모금함에는 십 원짜리 동전에서, 백 원, 천 원, 만 원권 지폐까지 수북이 담겼다. 아낌없이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가진 것을 모금함에 넣었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 모금함에는 금반지, 금목걸이와 같은 장신구들도 있었다. 현금이 없었던 어느 아주머니는 자신이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서 모금함에 넣었다. 20대 여성 직장인이 걸고 있던 목걸이를 뺴 모금함에 넣으며, “시위 준비하는데 보태세요”라고 했다. 모금함에 담긴 것은 시민들의 마음이었다. 우리는 그 돈으로 유인물을 만들고 깃발을 만들고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시위에 필요한 물질적인 지원은 시민들이 해 주었다.


1987년 6월의 거리에서 독재타도의 구호와 행진은 단지 데모꾼 대학생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6월의 거리는 평범한 시민 모두가 역사의 주인으로 서서 당당히 민주주의를 외치는 공간이었다. 평범한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아주머니, 아저씨로 칭하는 평범한 시민들이 1987년 6월의 거리의 주인공이었다.


아주머니, 아저씨는 경찰의 폭행으로부터 학생들을 지켜주었다. 우리와 한편이 되어주는 어머니, 아버지 연세의 어르신들이 계셨다. 대학생들이 경찰들에게 연행될까 싶으면, 아주머니들이 나서서 막아주셨다. 용감한 어머니들은 자신의 자식뻘 되는 학생들을 경찰로부터 보호해 주셨다.


“학생들, 잡아가지 마라. 차라리 우리를 잡아가!”

“학생들 다 바른 소리 하는데, 무슨 죄를 졌다고 잡아가.”


6월의 거리에서 부모님 연세의 아주머니, 아저씨들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시위를 하던 도중 최루탄이 바로 머리 위에서 터진 적이 있다. 최루탄을 완전히 뒤집어쓴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근처에서 상점에서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물을 떠 와 내 머리와 얼굴을 씻겨주셨다. 눈이 아프다고 우는 나에게 수건을 가져와 내 눈에 대어 주셨다.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들을 자신의 자신처럼 자식처럼 챙겨주셨던 시민들. 87년 6월의 거리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또 다른 아름다운 경험이 있다. 6월 18일로 기억된다. 어떤 아저씨로부터 받은 도움이 34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석바위에서 밤늦게까지 시위를 했다. 하루 종일 최루탄을 뒤집어쓰고 살았다. 그날 밤도 최루탄 세례를 받았다. 최루탄에 면역이 생겼는지, 눈물도 콧물도 나오지 않았다. 12시가 다 되어서야 시위가 끝났다. 최루탄과 지랄탄이 여기저기 흩어진 늦은 밤거리에서 시위를 마친 사람들은 하나 둘 흩어진다. 버스는 끊긴 지 오래다. 택시도 보이지 않는다. 택시가 다닌다 해도 내게는 택시비가 없었다.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걸어서 가자면 밤새 몇 시간을 걸어야 한다. 집에 어떻게 갈지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때 트럭 한 대가 내 앞에 멈추었다. 40대 초반의 아저씨가 열린 차장 너머로 운전석에서 나에게 말을 건넸다.


“학생, 시위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에요?  차도 다 끊겼는데, 내가 데려다 줄게요.” 너무도 반가운 호의에 흔쾌히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차에 올랐다.


용달 트럭을 운전하던 그는 시위에 참여했었다. 내가 차에 오르자마자 아저씨는 재채기를 쏟아냈다. 하루 종일 시위를 하며 최루탄을 뒤집어쓴 나 때문이었다. 짧은 스포츠머리의 아저씨. 눈물이 줄줄 흐르는 매운 눈을 비벼가며 힘겹게 운전을 하던 그는 내게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는 빨간 신호등을 보지 못 하고 그냥 통과했다. 내 옷에서 풀풀 날리는 최루탄 가루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던 그는 신호를 보지 못 했다. 사고가 날 뻔했다. 사고를 간신히 피한 상대편 차가 클랙슨을 울리며 트럭을 막아섰다.


그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트럭 쪽으로 다가왔다. 30대 중반의 넥타이를 맨 남성이었다. 그는 몹시 화가 나 보였다.

“이 보세요. 운전을 그 따위로 하면 어떡합니까? 사고 날 뻔했잖아요!”

나를 태워준 트럭 운전자는 계속 재채기를 하며 대답했다.


“에이취! 죄송합니다. 시위 대학생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길인데... 에이취! 최루 가루가 차 안에 가득해서 눈물이 나오고 재채기가 나와서 신호등을 못 봤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대학생 좀 도와주려다가 이리된 거니 이해해 주세요.”


“아, 그러세요! 좋은 일 하시네요. 저는 일이 바빠 데모에는 참여 못 하지만, 마음은 데모하는 학생들 편입니다. 박종철도 죽이고 이번에는 한열이까지… 이 정권해도 너무 합니다.  수고 많으세요.”


데모하는 대학생을 집까지 태워준다는 말 한마디에 그들의 싸움은 바로 평정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87년 6월 거리의 모습이었다.


6월의 거리에서 받았던 시민들의 친절과 보살핌은 잊을 수 없다. 상인들의 자신의 가게나 건물의 화장실을 개방해 시위대가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했다. 최루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거리에서 화장실은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최루탄을 뒤집어쓴 얼굴을 씻을 수 있는 곳이다. 최루탄, 지랄탄은 구토를 유발한다. 나는 시위 도중 여러 번 구토를 했다. 그럴 때마다 가까운 화장실을 이용했다. 주요 도로 상가의 화장실은 열려 있었다. 시위대에게 화장실을 개방한 상인들은 시위대에게는 진정 고마운 존재였다.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6월의 거리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가장 아름다운, 가장 열정적인 20대의 여름을 보내며 사람의 아름다움, 인간이 지닌 선함을 보고 느꼈다. 그곳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6월 10일부터 20일 가깝게 계속되었던 독재타도를 위한 시민의 투쟁은 6.29 선언이라는 승리를 이루어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은 거리를 흔들고, 철옹성 같은 군부독재를 흔들어 항복을 받아냈다. 호헌이 철폐되었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것이다.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 냈다.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 사람의 바다 그리고 희망의 바다


6월의 거리에서 함께 한 시민들은, 온 국민들은,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이한열 열사가 다시 일어나길  한마음으로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1987년 7월 5일.  이한열 열사가 27일간 사경을 헤매다 결국 숨을 거두었다.


7월 9일 7시에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이한열 열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려고 했던 사람들로 연대 교정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문익환 목사가 한 사람 한 사람 열사의 이름을 불렀다.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그는 목놓아 절규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산화해간 수많은 영령들! 문익환 목사가 열사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 모두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우리는 한열이를 보내러 길을 나섰다. 연대를 출발해, 신촌로터리, 여의도, 광화문, 시청까지 이한열 열사의 운구 행렬을 따르는 사람의 바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운집한 그들은 한열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며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염원했다. 180만이 모여 이루는 민주주의의 물결! 이 장관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심장이 요동쳤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백수천의 만장과 깃발이 휘날렸다, 붉은 만장, 파란만장, 흰 만장이 사람의 바다 위에 나부낀다.

사람의 바다, 사람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수천의 깃발과 만장이 사람의 바다 위에 휘날린다. 하늘에 닿을 듯한 민주주의의 함성! 끝이 안 보이는 사람의 바다!  그리고 희망을 보았다. 그 희망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


6월의 거리에서 타올랐던 민주주의의 열망은 20년 후 촛불 혁명의 촛불로 다시 타올랐다. 민주주의와 시민의 힘을 보았다. 87년 6월 항쟁을 밑거름으로 무혈의 촛불 혁명을 이룬 우리다. 우리에게는 승리의 경험이 있다. 6월의 함성은, 광화문의 촛불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가장 작고 힘없는 사람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사회를 향해 오늘도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