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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Jul 18. 2021

미국 이민 첫 해, 내가 배운 미국

살며 배우며 가르치며

미국에 17년째 살고 있다. 이민자로서의 미국 생활은 매일 배움의 연속이다. 이곳 사람들과 부대끼며 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지만 이곳의 문화는 여전히 학습의 대상이다. 미국은 내게는 매일 적응해야 하는 새로운 땅이다. 오늘도 미국에 살며 미국을 배운다.


인종의 모자이크라고도 불리는 미국 사회. 서로 다른 피부색과 생김새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지구 상의 모든 인종과 민족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다. 그들의 뿌리가 있는 민족과 문화의 배경도 다양하고 방대하다. 이 각색각양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도 미국을 ‘미국’이라고 묶을 수 있는 끈을 발견한다. 미국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은 이민자로서의 삶이 시작한 그날부터였다.


30대 후반에 보스턴으로 이주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그 다음 날부터 대학원을 다녔다. 이주민으로의 삶이 시작된 곳은 학교였다. 공부하며 새로운 나라 새로운 문화에 적응했다. 학교 생활을 통해 미국 사회의 종종색색의 면모를 보고 이 사회의 문화를 이해했다.


미국에 이민 오기 전에 미 동부를 40여 일 정도 여행한 적이 있었다. 여행자로서 내가 느낀 미국 사회는 “ 인종과 민족의 샐러드 볼”이라는 것과 대체로 사람들이 친절하다는 정도였다. 이러한 이해는 다분히 피상적이다. 이주민으로서, 생활인으로서 미국에 대한 발견은  보다 깊이 들어가  미국의 캐릭터를 탐구하고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미국에 대한 현상적인 이해에서 보다 본질적인 이해로 미국에 대한 배움이 확장됐다.


나의 첫 미국 사회, 대학원은 미국에 대한 나의 첫 배움이 시작된 곳이다. 대학원에서 전공지식뿐만 아니라 미국과 미국인들에 대해 배운 셈이다. 미국인들이 지닌 사고와 가치를 접했던 시간들. 미국에 대한 많은 이해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미국인들과 공부를 하면서 겪은 그들의 문화와 태도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한국에서 40년 가깝게 살았던 나에게는 한국 문화와는 다른 여러 가지 문화적 차이가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내가 발견한 미국의 첫 번째 캐릭터는 이 사회는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며 자신감 있게 표현하는 사람을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이 면모를 처음 학교를 방문한 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발견했다. 오리엔테이션은 그야말로 신입생에게 학교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리다. 이 행사에서 학교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를 배웠다.


나의 뇌리에 박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학생서비스 센터 직원이 연단에 서서 자기 소개를 하며 힘주어 말했다. “I know what I’m doing”. 그의 말인 즉, “나는 이 직책을 맡은 지 한 달 정도 됐지만 이미 업무의 모든 사항을 꿰고 있기에 여러분에게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할 능력이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비록 “신참이지만 능력이 있다”를 단호하고 확실하게 수백 명의 신입생들 앞에서 말했다.


한국에서 막 도착한 나에게는 그의 표현과 태도가 생소하지만 흥미로웠다. 새로 일을 시작한 직원이 많은 이들 앞에서 확신에 차 자신이 능력 있다고 말하는 모습은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보통 그런 자리에서는  “자신이 부족하니 잘 부탁한다”거나 아니며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 하겠다”는 식의 겸양을 드러내며 자신을 표현한다. 저렇게 대놓고 “나 능력 있으니 내 할 일을 잘할 거다"라고 자기를 소개하지는 않는다. 이런 모습은 신선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래도 그런 신참 직원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그는 자신감에 찬 자신의 존재를 많은 이들에게 각인시켰다. 그 효과는 실로 컸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나니 말이다.


이렇게 자신감 있게 자신의 능력과 장점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그 이후에도 자주 보았다. “아, 미국에서는 겸양의 미덕보다는 나의 능력을 자신감 있게 드러내는 태도가 필요하구나" “적어도 내가 부족하니 도와 달라"는 식의 표현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겸손해서 자신을 낮추어 표현하면 진짜 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오해받거나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렇다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라는 말은 아니다. “겸양의 미덕”이라는 도덕률에 매어 자신의 능력을 낮추어 표현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미국 사회는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아직도, 큰 키에 호리호리한 나이지리아 출신 여성 직원의 확신에 찬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카랑카랑한 목소리, 명료한 메시지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그런 당찬 직원의 모습에 참여했던 신입생들이 신뢰와 인정의 표정과 박수로 반응했다. 그 직원은 대다수가 미국인인 학생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대학원을 시작한 첫날 미국에서 환영받는 인간형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이 학교에서, 이 미국 사회에서 만들어갈 나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렸다. 그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나로 살자!


대학원에 다니며 발견한 미국 문화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함께 공부했던 클래스메이트들과 교수들의 수용적인 태도였다. 그들에게 나는 낯선 존재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40년 가깝게 살다 그들의 세계로 들어온 존재다.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인 배경에서 자라고 다른 문화적 경험을 한 사람이다. 그런 나를 그들은 온전히 안아주었다.


나의 전공인 응용언어학은 언어가 사용되는 사회환경에 주목한다. 언어의 사회 문화적인 측면도 깊게 다루기 때문에 내가 겪은 한국사회 이야기를 수업에서 할 기회가 많았다. 한국에서 내가 대학을 다녔던 시기는 80년대다. 역사적인 어려움 많은 시기였다. 87년 6월 민주화 투쟁을 경험했다. 89년 전교조 교사들의 대량해고 직후 교사로 발령이 났다. 그때는 교사들이 노조를 만드는 권리가 보장되지 않던 시기였다. 민주, 인권, 통일을 이야기하면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겪어야 하는 시대였다.  80년대와 90년대 초, 내가 겪은 이야기를 했다. 학생과 교수들이 이런 나의 경험을 진지한 표정으로 들어주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관심을 가져주고 공감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본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나를 통해 얻었다고  말해주곤 했다. 그들의 열린 자세가 참 고마웠다. 다른 문화에서 온 사람들의 경험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자신들의 삶 속에서 음미하려는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며 모든 것이 서툴렀던 나였다. 새로운 땅에서 생활하느라 늘 긴장됐다. 긴장감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처음 몇 주 강의실을 들어설 때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나를 그들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마음을 열고 귀를 쫑긋 세우며 나의 경험과 의견을 경청했다. 그들의 포용하는 자세는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실수를 하면 어쩌지? 이 말을 해서 망신당하는 것은 아니야?” 이런 불안과 공포감을 나 스스로 몰아내고 거리낌 없이 나의 생각을 발표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여러 사람 앞에 서면 얼굴이 빨개지고 목소리가 떨려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던 나였다. 그들은 그런 나를 용감한 토론 참여자로 변화시켰다.


자신감 있는 사람을 인정해 주는 문화, 다름을 수용하고 다양성을 가치 있게 여기는 문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온전히 포용하는 문화에서 나는 당당하게 나를, 내가 가진 문화적, 사회적 경험을 표현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에게 잠재되어 있는 면모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관용 어린 문화에서 표출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적극적이고 용기 있는 토론 참여자로 변모시켰던 또 다른 요인은 교수들의 권위의식 없는 태도였다. 대학원에서 만난 교수들은 학문의 권위자로 학생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학생들을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대우하며 소통했다. 마치 학문적 동료를 대하듯 학생들과 진지하게 토론에 임했다. 교수들은 그 분야를 오래 연구한 권위자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학생들과 함께 배운다는 자세로 강의를 하고 질문을 던지는 점이 새로웠다. 학생들이 토론하는 것들을 흥미로운 얼굴로 듣고 자연스럽게 논의를 발전시키는 모습은 부럽기도 했다.


교수들은 누군가가 맥락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발언을 하거나 논리적으로 엉성한 의견을 말해도 다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학생의 말에 실수나 논리적 비약이 있어도 핀잔을 주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교수의 말에 의문이나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에도 끝까지 들으며 최대한 학생의 의견을 존중했다.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토론문화였다. 교수들이 만들어내는 포용적인 토론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을 적극적인 토론 참여자와 수업의 기여자가 됐다.


가르치는 이로서의 교수들의 모습은 이후 나의 미국에서의 교직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박사과정과 교직에 지원하기 위해 여러 번 교수들에게 추천서를 요청했다. 그럴 때마다  교수들이 단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귀찮아하는 반응을 본 적이 없다. 항상 학생의 성장과 성공을 위해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해주는 교수들의 모습에서 참 스승의 귀감을 보았다. 미국에서 공부하며 “이게 정말 가르치는 사람의 태도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미국 첫 스승들을 거울삼아 내 학생들을 대할 때 그들의 성장과 성공을 위해서는 나의 최선을 다 하고 있다.


미국에서의 첫 학교, 대학원에서 미국인들이 가진 가치와 문화를 경험하며 배웠다. 미국 문화, 미국 사람을 정형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다양한 가치와 태도로 살고 있는 곳. 미국. 그런 다양함 속에서 내가 함께 공부했던 클래스메이트들과 교수들이 이민자로서의 내가 발견한 첫 미국이었다.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들이 나에게 미국의 첫인상을 심어주었고 나의 미국 생활에 첫 단추를 끼워주었다. 그때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몰랐다. 지금 돌이켜 보니, 미국에 막 발을 디딘 나를 포용하고 격려했던 그들 덕분에 나는 꽤 괜찮은 출발을 했다. 내 이민생활의 첫 단추를 잘 끼울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모양과 빛깔을 지닌 미국을 경험했다. 내가 다녔던 학교가 미국 사회 전체를 대표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곳에서 만난 해 미국인들을 통해 미국의 또 다른 면모를 보았다. 그것은 정복자로서의 백인이 원주민에게 행한 살육의 역사를 반성하는 모습이었다.  


첫 학기를 보내는 중 미국에서의 첫 추수감사절을 맞았다. 미국에서는 11월 넷째 목요일이 추수감사절이다. 추수감사절 전후의 수요일과 금요일을 포함해 5일간의 연휴에 들어간다. 사람들은 고향의 부모님을 방문하거나 가족들과 함께 모여 칠면조와 다른 음식들을 먹으며 명절을 지낸다. 우리나라의 추석과 비슷한 명절이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자연스럽게 나와 클래스메이트들의 화제는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보내느냐였다. 대부분 멀리 사는 부모님이나 가족들을 방문해 추수감사절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그중 몇몇 친구들은 자신들은 추수감사절을 쇠지 않는다고 했다. 미국 원주민의 학살 위에 세워진 명절을 기쁘게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명절로 보내는 대신 백인 이주자들에게 살육 당해 인종 말살의 지경까지 이른 미국 원주민들의 넋을 달래고 백인들의 역사적 과오를 참회하는 시간으로 보낸다고 했다.


클래스메이트들과 소통하며 미국의 인종, 계급, 구조적 불평등 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다양한 미국인들만큼이나 그들의 가치와 신념도 다양하다. 대학원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침략자로서의 자기반성적인 미국인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미국 사회의 원죄인 원주민 학살에 대한 자기반성은 양심적인 시민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원주민 학살에 대한 자기반성의 노력은 콜럼버스의 날을 폐지하고 원주민의 날을 세우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런 평범한 양심적인 시민들이 미국의 소금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첫 학교에서의 경험, 그곳에서 만났던 나의 친구들, 스승들은 이민자로서의 미국 생활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새로운 땅 미국에서의 삶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를 주었던 소중한 체험들. 나에게 자신감, 용기를 주어 끊임없이 도전하게 격려했던 사람들. 그들  덕분에 미국 사회를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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