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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민 Sep 12. 2020

이모, 가출의 공범

#중2병 #일탈

어제 지하철 역 안에서 ‘이모’를 봤다.

푸근하게 살집이 잡힌 둥그런 어깨와 풍성하지만 흰 머리가 섞인 단발머리. 고개를 살짝 돌렸을 때 엿보이는 동그란 뿔테 안경까지. 길 가다 흔히 볼 수 있는 50대 후반 여성의 모습이었지만 내 눈에는 틀림없는 ‘우리 이모’였다.

2년 전 이모는 세상을 떠났다. 이모의 몸을 장악한 암세포는 58년 동안 건강하던 이모의 호흡을 멈추게 했다. 낯선 이에게서 이모의 모습이 스칠 때, 나는 이모가 재작년 겨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이모를 데려간 그 겨울, 나는 첫 직장에서 수습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입사한지 한 달도 안 되어 외할아버지와 이모를 떠나보냈지만, 워낙 보수적인 회사 분위기에 나는 말 한 번 못 꺼내보고 두 분께 마지막 인사를 드릴 기회를 놓쳤다.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는 나의 죄책감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건지 문득 길을 걷다가 옛날 생각에 잠기곤 한다. 우연히 만난 낯선 이들의 얼굴 속에서 내 유년의 기억 되살아다.

나에게 이모는 두 번째 엄마였다. 어린 시절 함께 여행도 많이 다녔고 사춘기 때 엄마와 싸우고선 이모 댁으로 ‘가출’하기도 했었다. 홧김에 집을 나왔지만 딱히 갈 곳 없던 중학생은 겨우 지하철 역 10개 정거장 떨어진 이모 댁으로 향했다. 심호흡 후 누른 초인종에 인터폰 너머 이모는 ‘어머, A라고?’하며 놀랐지만, 이모께 나는 천연덕스럽게(이미 어른들 눈에는 다 들켰겠지만) ‘그냥 놀러왔다’고 거짓말을 술술 뱉어냈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 이모와 사촌언니, 나 이렇게 셋이 식탁에 앉아 함께 밥을 먹던 중, 저녁 때가 됐는데도 내가 돌아오지 않자 엄마는 속이 탔나보다. 엄마는 갑자기 연이어 나의 모토로라 레이저 폰을 울려댔고, ‘중2병’이었던 나는 단 한 통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제는 내 핸드폰이 아닌 이모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고, 이모는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안방으로 자리를 옮겨 전화를 받았다. 살짝 열린 안방 문틈 사이로 이모는 분명히 “응, A 우리 집에 있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모른 척 했고, 이모도 식탁에 다시 돌아와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 이모는 ‘나의 가출을 모른 척해준 공범’이 되어준 셈. 이모는 그날 밤하늘이 새카매질 때까지 나와 신나게 엄마 흉을 봐줬다.

슬금슬금 어른들의 세상에 발을 담그기 시작해, 세속의 물을 들이고 있는 나에게 이모가 갑자기 찾아온 이유는 뭘까. 하루하루 버텨내는 삶이 조금은 지겹고 힘겹다 느끼는 것을 저 위에서 이모가 알아챈 걸까. 15년 전 쯤 이모 댁으로 또 한 번 가출하고 싶은 마음을 저 위에 있는 이모한테 들켜버린 걸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다시 그리워지는 순간은 아마 떠난 이들에게서 받았던 사랑이 다시 필요할 때인 것 같다. ‘그 사람 가도 그 사랑 남는다’는 말이 있이, ‘그 사랑’으로 버텨냈던 과거의 그 순간이 지금의 어느 날과 비슷한 모양일 때. 다시금 그 사랑이 내게 필요한 순간일 때, 잠시 신이 내 눈을 멀게 해 낯선 이에게서 ‘그 사람’을 비추고 사라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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