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왜 사세요?
그냥 살아지니까 사는 걸까요?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왜 살까?’
‘내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행복하려고 사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걸까?’
결국, 우리는 왜 사는 걸까요?
그런 의미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본 적이 있을 거예요.
제가 구피를 키우게 된 계기가 있는데요.
제 사주에 물이 부족하다고 해서,
사무실에 작은 어항 하나를 들여놓고 그 안에 구피 12마리를 키우기 시작했어요.
물도 자주 갈아주고, 박테리아도 넣어주고, 수초도 심어주고,
어항 청소도 꼬박꼬박 해주며 정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구피가 죽어나가는 거예요.
지금은 두 마리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두 마리 중 한 마리조차 오늘은 상태가 심상치 않아요.
처음엔 12마리가 다 비슷해 보였는데,
한 마리씩 죽어나가면서부터는
“아, 저 아이는 이제 곧 죽겠구나.”
하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죽기 전에 구피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겠어요.
먼저 먹이를 잘 먹지 않아요.
그리고 어항 밑에서 조용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몸의 균형을 유지하려 애쓰죠.
가끔 수면 위로 올라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가고,
여기저기 헤엄치지도 않고,
그저 물속에서 ‘떠 있으려’ 하는 거예요.
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면서요.
오늘 남은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아침부터 밥을 먹지 않길래,
‘아, 이 친구도 곧 세상을 떠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죽기 전에는 물속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요.
몸이 뒤집히지 않게 버티며,
평형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다 결국, 그 움직임이 멈추죠.
그 마지막 꼬리의 떨림이,
저는 마치 ‘생존을 위한 마지막 투쟁’처럼 느껴졌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인간도 마지막 순간에
저런 사투를 벌이다 죽을까?
그런데,
죽기 직전에만 저런 힘을 내지 말고,
사는 내내 저 구피처럼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 과정 속에서
진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물속에서 뒤집히지 않으려
끝까지 꼬리를 흔드는 그 구피처럼,
우리도 매일매일
살아있기 위해,
살아가야 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요즘엔 그런 생각을 많이 해봐요.
그리고 저는 이제 나이가 50이다 보니까,
이상하게 ‘살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어쩌면 오래 살 수도 있겠죠.
그런데 만약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가정하면,
이런 생각이 먼저 들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어떻게 살아야 나에게 의미가 있을까?”
남에게 보여지는 삶 말고,
‘나에게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저는 요즘,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해보고 있어요.
죽기 전에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것들.
그래도 한 번쯤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해본다면 잘 해보고 싶어요.
‘이렇게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면,
그 자체로 삶의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그런데 종국에는,
내가 좋아하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덕을 쌓고 싶다.”
큰 덕이 아니더라도요.
그냥 따뜻한 말 한마디,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고,
기운이 떨어진 사람에게 작은 위로가 되는 말.
그리고 내가 하는 행동이
도움까지는 아니더라도
피해가 되지 않게,
조용하고 고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렇게 살려면,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면
제가 이걸 지키기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최근엔
제가 만나는 사람의 수를 조금 줄였어요.
그 대신,
나에게 의미 있는 일들로
남은 생을 채우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제가 떠올린 책이 하나 있어요.
바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입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배웠어요.
“삶의 의미는 어떤 상황에서도 존재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죠.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존재이고,
그 의미를 발견하면
아무리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그 고통을 이겨내고 견딜 수 있는 존재가 된다고요.
이 말을 읽고 나서,
저는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개념이 궁금해졌어요.
이게 무슨 뜻일까?
처음엔 ‘테라피’라는 말 때문에
피부 치료 같은 건가?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어요.
빅터 프랭클은 말합니다.
인간은 행복이나 쾌락보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본능적인 동기를 가진 존재라고요.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우울감, 공허함, 절망감이 생기지만,
반대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면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걸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인간은
‘주어진 상황’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그 상황에 대한 ‘나의 태도’는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해요.
고통 속에서도
“내 삶의 의미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이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에서는
세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첫째, 창조적인 가치.
무언가를 만들거나 성취함으로써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하거나, 예술 활동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둘째, 경험적인 가치.
사랑, 자연, 예술을 경험하면서
그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셋째, 태도적 가치.
피할 수 없는 고통이나 시련 속에서도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할지,
그 태도 속에서 의미를 찾는 거예요.
저는 인생을 살면서
이 세 가지 가치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때는 창조적인 일을 통해,
또 어떤 때는 사랑이나 예술, 자연을 통해,
그리고 어떤 때는
고통과 시련을 견디는 태도를 통해
우리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경험하죠.
그래서 삶이 힘들 때,
‘나는 왜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이 들 때,
그 이유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면
그 고통을 없앨 순 없어도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게 바로 로고테라피의 철학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면
이 철학을 깊이 느낄 수 있어요.
고등학생이 이 책을 읽고
이 내용을 탐구 보고서로 정리한다면
그것 자체로 큰 의미가 있을 거예요.
십대라 하더라도,
삶 속에서 창조적 활동을 하고,
사랑이나 예술을 경험하고,
도전과 시련 속에서 태도를 배우며 살아가잖아요.
그런 학생이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한다면
그건 단순한 독서 활동을 넘어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의대를 진학하려는 학생이라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다루는 이 책을 통해
‘타인의 생명’에 대한 무게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국어 시간에는 문학적 감상문으로,
윤리 시간에는 실존주의와 연결된 철학적 보고서로,
또 진로 시간에는
정신의학과 로고테라피 관점으로 탐구 보고서를 쓸 수도 있겠죠.
예를 들어,
또래 친구들이 느끼는 우울, 공허, 무기력 같은 감정을
조사하고 그걸 로고테라피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아주 의미 있는 탐구 보고서가 될 거예요.
이 책은 단지 어른들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
십대에게도 충분히 울림을 줄 수 있어요.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
진로와 연결되고,
또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의 방향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확장 독서로는
삶의 의미를 다룬 문학 작품들도 있어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등이 있죠.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어빈 얄롬의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