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여름앓이]
한 여름밤의 크리스마스 노래는 색다른 풍미를 가져온다. 그것은 아마 같은 거리의 그리움이고 곧 기대일 것이다. 나는 She & Him 의 The Christmas Song 을 반복해 들으며 hard to sleep tonight 부분에 감정을 싣고 있었다. 특별히 잠 못들어야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잠들고 싶지 않은 밤일 뿐이다. 비가 세차게 내렸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는 장마철이다. 그나마의 빗소리라도 투둑거려야 마음이 조금 기를 펴고 제 할말이 있다며 소심하게 문을 두드리는데, 어찌 그런 기회를 놓치겠는가? 삶을 갈수록 복잡해져만 가고 이성은 항상 제 잘났다며 떠들어대기에 여념이 없는 것을. 장마에 서정을 논하는게 다소 이질적이긴 하지만, 그 거침없는 떨어짐이나 빗줄기를 쉬이 잊을 순 없을 것이다. 나는 최근 3달가량 글을 쓰지 않았다. 쓸 시간이나 쓸 마음이나 쓸 거리가 없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많은 변화도 있었다. 만남과 이별도 있었고, 마음의 일렁임이나 지릿거리는 고뇌의 시간들도 존재했다. 내가 써오던 글들에 대해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날 문득 발견한 것은, 나의 인생 지금만한 순간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과거가 더 행복했던 현재는 어떨까? 그는 그래본 적이 있으니 다시 행복할 수 있을거야 하는 미련스런 희망을 품거나, 그 기억을 싹싹 지워 그나마 지금이 나아라는 합리를 택할지도 모른다. 혹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하루하루 과거가 현재를 추월해버리지 못함에 지쳐갈지도 모른다. 나 또한, 지금보다 행복했을 먼 옛날 어느 시절에 대한 기억은 잊었는지 지웠는지 모를 먼 곳에 묻혀버렸다.
내게는 독감보다 지독하게 앓아야하는 것이 매 해 여름이었다. 날씨가 좋아지고 바다에 놀러가고싶은 생각이 들 때 즈음, 내 삶에는 신호등이 들어선다. 노란불에 머무를 것인가, 초록불에 나아갈 것인가, 혹은 빨간불에. 그만둘 것인가 하는. 그것은 9월이 시작의 달이 되어버린 학교 생활때문이기도 하지만, 재정적 비수기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12년 여름, 나는 노란불을 켰다. 한국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그렇게 적었다. '1년후'라는 자막과 함께 돌아오는 나를 보게될 것이라고. 내 맘대로 킨 노란불이 올 여름, 1년이라는 시간을 지켜줄지 혹은, 멈추지도 나아가지도 못하겠다는 선언을 할지는 모를 일이다.
그래서 온전히 이어폰 음악만이 귓속을 가득 메우는 찰나를 즐긴다.
과연 부모의 존재여부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나이란 있을까? 애석하게도 그들의 부재란 감히 상상해보는 것이 아닌 듯 하다.
슬픔은 기억에서 오는 것일까?
도피와 극복이란 개념은 재미있고 어렵다. 도피가 극복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내가 저 사람 곁에 가면 더 쓸모있고 가치있는 사람이 되겠구나 싶은 것.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이란 어렵고도 재미있다. 오히려 먼 미래의 모습은 쉽다. 현실로부터의 영향이 (아니 현재) 크지 않을 것이므로. 설령, 아니 분명 크겠지만 그런 현재들이 수많게 모일 기회와 시간이 있으므로!
여행에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지만, 삶에선 가야하는 곳이 있다는 것만큼 불안한 일이 없다.
삶은 여행이라는 말은 무엇일까? 삶을 여행처럼 살아야하는 것일까?
어쩌면 지금 나는, 가야하는 곳이 있어도 불안해하지 않고 그 시간을 즐기고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법을 배우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10년후의 나는, 지금에 나에게 삶을 여행처럼 살아라.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돌아가는 곳은 나의 집, 그리고 그 영원한 삶이 펼쳐질 어딘가.
다시 없을 순간이라고 생각하면 아쉬운게 무엇이리요. 억울한게 무엇이리요.
모든게 다 아쉽거나 억울할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며 욕심이다.
나는 지금도 어김없이 '여름앓이'를 하고 있어.
도피가 아니라 지혜로운 극복을 해야하는데 나는 한번도 머무를 사람처럼, 혹은 떠나갈 사람처럼 살지못했다. 언제든 얼마이고 어디든 머무를 사람처럼 떠나갈 사람처럼 살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그래서 머무른단들 고통의 연장선이 될 것 같고, 떠난단들 나는 돌아온만큼 준비된게 없어서 너무 속상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머물수도 있고 언제든 머물수 있는 사람이 떠날 수도 있는 것 같더라. 이 시기가 지나고나면 나는 멋진 여행자가 될 것 같구나. 하지만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해야 여행자에 가깝게 여행자로 성장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나는 모른척하는 법을 배운 것 뿐이었다.
옛날 어느 글에 그런 말을 쓴 적이 있다. 사람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것이라고.
방법이나 시선, 고개의 방향을 조금만 바꿔봐도 조금 더 쉽거나 나은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 경험을 미루어 볼 때 마음이 힘들다는 것은 또 다른 성장의 고비를 의미한다.
내 마음은 아이다.
만일 내가 아는 누군가 나의 한 철 열병에도 호들갑스러운 관심과 걱정을 붓는다면 나는 그 앞에서 아프지 않은 사람이 될테다.
아플만큼 살았다는게 화가 났다. 갑자기 지난 일들이 몰려와 원망이 되었다.
내 모습이 맘에들지 않을때, 우리는 그 원인을 찾으려다 한없는 과거로 흘러간다. 그러다 마주치는 사건, 사람 등의 기억에 우리는 불쾌한 안정을 찾으며 그래 '이것때문이었어'로 시작하는 원망을 증폭시킨다.
젠장 브로콜리 맛이 너무 나잖아. 으... 브로콜리 맛이 너무 많이 난다.
좋은 것들은 말하는 것보다 듣고 보고 읽는게 더 효과가 있는데, 남의 덕담같은!! 빈말이나 가식아니고 덕담 잘하는 사람이고 싶다.
한여름밤에 듣는 캐롤은 너무 좋다.
좋은 일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상상을 한다. 그 속도는 엄청나다. 다만 다른 별에서 오는거라 시간이 좀 걸릴뿐이다. 이렇게 소녀스러운 멘트 오랫만이군. 좋은 것이 막 힘차게 달려와서 숨을 고르며 나를 마주치기 가장 좋은 장소에서 시간을 기다리며 숨어있는 것 같다. 설레여하며 다가오는 나를 흠칫흠칫 살펴보며 그리고서 우리는 부딪히고 뒤엉키고 하나가 될거야.
시간과 자리는 만들수록 생기는 것이다.
오랫동안 간절히 꿈꿔오던, 현실이 되길 바래오던 것들이 그 꿈꾸는 순간까지도 추억이 되어버린 것 같은 그런, 아쉽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한 그런 기분이다.
행복이란건 마치 맛본적 없는 새로운 맛인것 같다. 맛을 보아도 이게 뭔지 모르겠거나. 그런 것이다. 뭐랄까. 먹는 법을 모른다거나 참내, 어렵다. 사랑이나 행복같은 분홓거나 노오란 감정인지 뭔지 모르겠는 것들을 자각하거나 찾아나서고 흡수하거나 뭐 암튼 다 어렵다.
나는 생일이 지나고 쏠쏠한 외로움이 감도는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때부터 크리스마스를 기다릴 것이다.
나는 항상 바쁘고 일에 시달렸기에 이성의 크고 강한 목소리 앞에서 감히 제 할 말 한마디 뱉어보지 못하는 감정을 종종 지켜보았다. 간혹 여유가 생기어 '그래서 넌 어때?' 하며 감정에게 물어보아도, '아니야 괜찮아' 하며 쓴웃음만 짓던 그 아이가 참 안쓰럽고 걱정이 되었는데, 어제 그렇게 천둥처럼 울어버리는 모습에서 나는 미안함과 감사함을 또 느꼈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그냥 그 서러움과 버거움을 한번 크게 소리지르며 울어버리고 싶음이었다. 그렇게 게워내면 한번은 혹은 두번은 더 체해버릴 자신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노인이 된다면 인생의 경험 중 무엇을 제일로 꼽겠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나는 좋은 사람이 되어보았다는 경험이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갈등으로 말미암아, 많은 갈등이라는 경험을 말미암아 가능해질거라고 했다.
모든 마음의 고난은 욕심에서 시작된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시간이며 사람이며 감정이었고, 사건이었고, 미래였다. 그리고 또 현재였다.
1분 1분이 지나가는 순간에도 나는 끊임없이 내게 오기로 되어있는 것들을 기다리고 찾고있었다.
나는 내가 나조차 뭔지 모르겠는 것들을 왜 내게 오기로 되어있다고 표현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모르는 일일수도 있지만 다 아는 일일수도 있다.
무언가 두꺼운 딱지가 떨어져 속살이 아프다가 곧장 무뎌진 것 같아.
소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 관계에서마저도 크고 작은 오해들이 생겨난다.
대화의 부재는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엉킴을 풀어낼 때의 고통은 소중할수록 아프다.
귀로는 사실을 듣지만 눈으로는 마음을 듣는다.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예쁘거나 좋은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크고 작은 단점이나 나와의 다름이 그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도 하지만,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마저 인정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소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친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눈맞춤' 내가 상대의 눈을 보고 있지 않으면, 상대가 내 눈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상 글이 써지지 않는 30도가 넘어가기 시작한 여름날부터 지금까지의 끄적임 끝!
2013.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