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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치기

반항

[부제: 과거사의 통계학 혹은 열정빈곤층]

by 그믐

방학 후 꼬박 한주를 근육이 무르도록 누워있었다. 믿겨지지 않은 핸드폰 사용내역과 반비례하는 통장잔고에 몸서리치며. 깨어봤자 축내는 것은 식량뿐이라는 생각에 이불을 내 위에 잠재우며 스스로 침대가 되기를 자청했던. 그런 나를 무섭게 범하여 온 것은 지난 수개월간 미뤄왔던 수많은 고민의 해일이었다. 그것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우성을 치며 신속한 해결책을 요구했고, 나는 깨어있는게 맞는지 잠들어있는게 맞는지 모를 제멋대로의 시차 속에서 혼란으로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생각들은 서로 뭉쳐 더 커다란 눈덩이가 되어 나를 향해 날아드는데, 그것을 다 담아 풀어보겠다는 글 한장에서는, 눈싸래기같은 산발스러움에 배가 고프다.


이 곳에 돌아오기 전에 한 철학관을 찾았다, 뿐만아니라 매주마다 즐겨찾는 별자리운세를 통해 어쩌면 나는 지금같은 상황을 예상했으리라. 나쁜 것들을 마주했을 땐, 혹은 사주에서도 언급되었으나 일어날거라 예상하기 쉬웠던 일을 마주했을 땐, '이게 거기서 말한 그것인가보다, 용하네.' 하면서 스을쩍, 마음을 기대어보며, '그럼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일들도 정말 일어나겠구나' 희망을 품어보다가 막상. 그 일들이 예상처럼 일어나기 쉽지가 않아서 그렇게.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고있는 나를 발견한다거나, 그런 일들의 실마리를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쳐버릴 때, '그래, 그런것들은 역시 믿을만한게 못되' 하며 기댈 곳 없는 마음이 외로운 날들을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삶에 대한 그 작은 희망이, 궁금증을 낳고, 욕심으로 변질된 맘이 들여다보게한 과거사 통계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누가 그렇게 가르친건지 모를, 마치 바람에 묻어 하늘에 묻어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믿어버린 것 같은 그 사회라는 것에 대하여 나는 철저한 모범생이었다. 사실 그 누구도 '세상은 이런 곳이란다' 하고 가르친 적은 없었다. 다만 주변의 나같은 사람들을 보며 사회를 어림잡아 보았던게지. 더이상 자신 안의 맑디맑은 해저에서 서식하는 순수한 가치관이 선택의 잣대가 되지 않는 곳이라고, 우리는 수많은 것들에 현혹당하고 감시당하며 선택에 대한 강제적인 요구를 받기 시작했다. 이것은 불과 한주전 제출해야했던 디지털 문화에 대한 에세이의 실체이기도 했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 쓸모없는 아는 척으로 지껄여보자면, 산업혁명이후 팽배하기 시작한 자본주의는 소비에 대한 가치관의 확립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많은 것들을 '돈'이라는 단위로 가치매기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자기만의 기준을 통해 그 가치의 합리성을 말하며 개개인의 소비양식을 선택해왔다. 그리고 세기를 거슬러오며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디지털라이징으로 인하여 통제할 수 없게 된 수많은 '타'에 대하여 처음부터 정해진 선택을 강요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 강국이라 불리우는 대한민국이 이런 새로운 자본주의에 앞장서 있는 것은 불보듯 뻔한일이었다. 가령 미디어와 백화점에서는 누가 정한건지에 대한 사실에는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트랜드를 말하며, 소비를 현혹시키고. 개개인의 개성과 욕구는 길거리의 수많은 눈초리들에 의하여 변질된다. 어쩌면 우리들의 개성은, 도드라지는 것이 아닌 묻히는 것이었다. 싸이월드와 페이스북만 비교해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날 그날의 방문자 수가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비공개로 해놓자는 싸이월드사의 통제 속에 우리는 사진이며 글이며 크게 남눈치를 보지 않고, 가상공간에서의 나만의 공간을 꾸려갔다. 그리고 디지털 자본주의의 산물인 이 시대의 SNS에서, 우리는 포스트 버튼을 누르기 전에 예전보다 더 심한 번뇌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우리는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진정한 잣대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매순간의 선택에, 옳고 그름이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준을, 개인사와 세상사의 통계학에 맡겨왔다. 나와, 어른들과, 다른 사람들의 과거로부터의 경험들. 그리고 어느 한사람 빼놓지 않고 너무나 그 통계학에 박식한 사람들은 서로에게 대학 졸업은 물론이다, 대기업에 줄을 서라하며 항상 감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틀린 것이라고 현혹시키며. 나는 부자가 되고 싶었다, 잘 살려면 넓은 세계를 경험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엘레베이터처럼 나를 높은 플랫폼에 떨어뜨려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고 깨우칠수록, 엘레베이터 속의 수많은 숫자들에 대해 다 아는척 비전을 재어보아야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엘레베이터인지 아닌지도 모른채, 그 수많은 숫자들이 각기 다른 층을 나타내기 위해 있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채, 나는 내가 오래 전 고른 그 좁은 사각형에 들어앉아 매순간 내 앞에 떨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며 상상치도 못한 세상에 대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가. 그러다 문득 아는 것이다. 내가 그 사각형에 올라탄 것은 자기목소리에 대한 현혹이었는가, 아니면 그 사각형으로부터의 현혹이었는가에 대해서. 그러다 문득 아는 것이다. 애초의 나의 선택은 순수하지 않았음을. 세상사 통계학과 죽이 잘 맞아 떨어지는 스스로의 욕심에 현혹되고 감시당하며 나의 간절함은 가난해졌으며 나의 꿈은 빚이되었고, 나는 청춘계급 중 열정빈곤층으로 하등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나의 때늦은 반항은 잘난척하던 때이른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시 묻고 있다. 스스로의 욕심 앞에서 눈을 감아버리면, 그제서야 비로소 '자기목소리'라는 자본주의에 의해 통제당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사각형의 가치를 새로이 매기고, 번호가 적힌 수많은 버튼들을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간절함은 두둑해지고 꿈을 갚으며 열정을 충전한다. 그리고 다시, 선택할 기회를 얻는다. 우리의 선택은 생각보다 희망적일 때도, 혹은 절망적일 때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주나 운세에 대한 태도와 같은 이치로, 믿거나 말거나의 심리게임일 뿐이다. 그 누구도 사회를 정의내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세상사의 통계학이 바이블이되고, 누군가에게는 월간지 뒷부분의 소소한 웃음거리가 된다. 누군가는 남들이 재어둔 사회적 가치를 많이 누리는 것이 성공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스스로가 재어가는 가치의 행복을 많이 누리는 것이 성공이라 말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자란 이에게는 그렇지 않음이 그 아이가 보는 세상이었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는 먼훗날. 그렇지 않음이, 세상이란 걸, 사회라는 걸 알려줄 수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되고싶다는 추상적이고 고차원적인 광경도 조금은 꿈 꾸어본다고...


2013.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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