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들에 나와있었다. 들꽃도 구경하고 나비도 만나려했다. 산들바람을 맞으며 수많은 크로버 속 행운을 찾고도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저 먼 어딘가에서 붉은 홀씨가 날라와 발등에 떨어졌다. 소녀의 집에서 가까운 산에 산불이 난 모양이었다. 소녀는 한번도 정상까지 오른 적이 없었다. 다만 그녀가 뛰어놀던 산기슭의 갖가지 추억들과, 봄소풍을 떠났던 기억과, 그리고 여전히 삶의 터전이라는 것 외에는 그 산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더 올라가면 어여쁜 토끼도, 달콤한 산열매도 있겠지. 새벽녘 옹달샘에 비친 하늘 색은 파랗기만 할까. 이름모를 풀들과 악수할테고, 나무가 숨쉬는 공기에선 별냄새가 날거야. 그랬던 산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소녀는 집에 홀로 있을 어머니가 걱정이 되었다. 산불이 불어보낸 붉은 홀씨는 도와달라는 간청이었는지도 몰랐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홀씨는 소녀를 불쏘시개 삼기 시작했다. 제 발 등의 불이 커져가는 것보다도 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쌓아올린 산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게 더 걱정이 되었던 소녀의 마음에도 물끄러니 불이 났다. 하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그 해 산속에서의 겨울은 너무 추웠다. 소녀는 그 시림을 기억해냈다. 소녀는 가족을 기억해냈고, 꿈을 기억해냈고, 산기슭에서 넘어졌던 기억이나 절벽 끝에 매달릴 뻔한 기억도 끄집어내었다. 소녀는 있는 힘을 다해 걱정을 했다. 그러는 사이 소녀의 두 다리는 벌겋게 화상을 입었고, 붉을 홀씨는 그녀의 몸에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말했다. 네 몸에 불이 났어! 얼른 꺼버리지 않으면 너는 많이 아플거야. 빨리 산불을 끄러가야지! 하지만 그 누구도 찬물을 가져와 끼얹어주지는 않았다. 소녀는 그녀를 둘러싼채 등을 지고 외치는 표정들을 본 것만 같았다. 계중에는 아무 말 없이 슬픈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이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소녀는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산불을 끄러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들키면 자신이 너무 작아질까 겁이 났다. 소녀는 그저, 붉은 홀씨가 온 몸을 감싸고 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산불이 나서 넘어졌던 산기슭이, 봄소풍의 기억이, 그리고 머릿속으로만 그려오던 예쁜 옹달샘이 다 사라진대도 상관없이 그렇게 자신이 먼저 붉게 떠나버리길 바라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삶이었던 곳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로, 책임감으로, 그녀는 그렇게 물끄러미 산이 타오르는걸 걱정해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등을 보이지 않고 선 이는, 그런 소녀를 너무 사랑해서 마음이 아픈 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둘러싼 등들을 보고 외로워졌을 때, 조금의 오기가 생긴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니면 뒤돌아선 얼굴들은 결코 저 산불을 끄지 않겠구나, 그러면 나는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까맣게 잃어버리겠구나. 내가 재가 되어도 가슴이 많이 아프겠구나. 그제서야 도와달라고 불을 꺼보려고 애써보지만, 붉은 홀씨가 스쳐지나간 곳은 결코 성하지 않았다. 지체된 시간만큼 더 아팠고, 산불을 커져있었고, 그녀가 책임지지 않으려했음에 대한 책임만 무수히 늘어나있었다. 소녀는 많이 아프다. 그리고 소녀가 발등의 불을 끄기 시작했을 때, 산불도 조금은 타는 것을 멈추고 그녀를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녀가 늦은 책임을 다 갚고 삶을 구하러 올 때까지, 불이 난 채로, 하지만 더는 태우지 않기로 했다.
2014.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