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2일 목요일
그저 살아보는 수밖에 없는 삶처럼, 결단코 퇴고하지 않겠습니다.
혼자 많은 것들을 책임져야 했던 아이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덥석 믿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밤을 새워도 모자란 제안 일정.
잠에 들지도, 일을 할 수도 없던 지난밤.
나는 4시간의 선잠 끝에 정수기가 내려준 물을 팔팔 끓인다.
프랑스에 놀러 간 동생에게 부탁했던 홍차 티백이 남아있다.
아주 커다란 컵에 물을 들이붓는다.
아침 8시 노트북 펼친다.
드라마에서 변호사들이 보는 사건 일지보다도 더 두꺼운 서류파일들이
책상을 뒹군다. 나는 캠페인 제안을 하기에 앞서 그것들을 최소 5번은 읽는다.
메일도, 서류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딱히 일 뿐만은 아니다.
나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자각할 수 없는 것들이 나의 위를 딱딱하게 만들거나 어깨 위에 무겁게 얹힌다.
숨을 쉬는 게 곤란하다.
가만히 앉아 있는 일도 편안하지는 않다.
쿠바, 체 게바라 혁명 시대의 가수였던 Soledad Bravo의 노래를 튼다.
눈 앞에 펼쳐진 활자들도,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 속 가사들도
날카롭게 분해되어 내 주변을 떠다닌다.
어느 것 하나 의미를 갖기에는 너무 작은 단위로 쪼개져있다.
무엇을 듣던, 보던, 그 수많은 글자들이 나를 공격할 틈을 엿보는 것처럼 주위를 맴돈다.
단어가 되지 못한 글자들이 꼭 파리떼처럼 윙윙거린다.
오전 10시 반.
서류 파일 위에 놓인 어제의 그 서류를 본다.
무엇하나 명확해지면 조금이라도 나는 현재에 충실할 수 있을까.
아니, 나를 현재에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 작은 노트북 안에 넘쳐나는 일들이었던가.
네이버에서 주택공사를 검색한다.
대표번호로 전화를 건다.
내가 받은 서류에 대하여 설명하고, 당신들이 보낸 것이 맞는지를 묻는다.
고객센터 직원은 내게 관할구역의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서류에 써있는 그 번호와 꼭 맞아떨어진다.
나는 그 번호가 맞지 않기를 바란 적이 없다.
그 서류가 가짜이기를 바란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서류가 진짜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도 잘 알 수 없다.
전달받은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건다.
- 제가 어제, 세입자 보증금 상속 관련 서류를 받았는데요,
이 분과 연락이 되지 않은지 오래되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이 서류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정말 그쪽에서 보내신 서류가 맞은 지 확인차 전화드렸습니다.
-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말투가 조금 어눌하고 다소 어려 보이는 전화 속의 여자는
내 이름을 듣자마자 이 서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이어나간다.
- 아! 그 서류 제가 보냈어요!
말투에 비해서 그녀는 이런 절차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나에게 상속 절차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
주민센터, 법원, 상속포기 어쩌고저쩌고.
나는 서울에 법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산 사람이다.
아버지는.
정말로.
세상을 떠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