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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Mar 20. 2020

부고 일지 8일 차

2020년 3월 18일 수요일

그저 살아보는 수밖에 없는 삶처럼, 결단코 퇴고하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게 힘이 든다.

가까스로 이번 주의 남은 이틀 휴가를 내기로 한다.

휴가를 내면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침 댓바람부터 아빠가 공무원 연금 가입자였다는 문자가 온다.

고객센터는 오전 내내 연결이 되지 않는다.

세상이 좋아진 덕에 카카오톡으로 답변을 받지만 나에게 오는 보상은 없다.

결정을 내리기가 쉬워진다.


나는 상속을 포기하기로 마음먹는다.


꼭.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팀원들은 막내를 제외하고는 이 사실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틈이 날 때마다 새로운 사실을 업데이트해준다.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던, 나는 누구한테라도 자꾸만 이 일을 얘기하고 싶다.

나 혼자서만 알고 있기에, 나 혼자서만 이해하기에 버거워서일까

혹은, 끊임없이 이해받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꽤 아무 일도 없는 듯 어제와 지난주와 지난달과도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써보려 한다.


부고 2일 차, 주택공사를 통해 아버지의 부고를 확인했을 때

나는 상속 관련하여 인감증명서가 필요하다는 부분을 알아차린다.

갑자기 불현듯 팔로우하고 있던 스탬프 브랜드 하나가 떠오른다.

희귀한(?) 원석들을 모아다 도장을 만들어주는 브랜드였는데,

나는 고민 없이 이들에게 25만 원을 주고, 기깔나는 인감을 맞추기를 다짐한다.

내게. 뭐라도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 순간, 하필 생각난 게 그것이다.


인감이 가치 있게 쓰이기를 바라며 2-3주 되는 제작기간을 마다하지 않고 주문을 해두었는데, 

게다가 덧붙여 아주 중요한 일이오니 최대한 빨리 진행해주십사 양해를 구해두었는데.

그 첫 쓰임이 상속포기라니.

괜히 허탈감이 밀려온다.


심지어 주변 친구들이 내게 맞는 원석이 무엇 일지에 대한 의견을 주기도 했다.

그들은 내가 붉은색과 하얀색 그리고 검은색의 대비가 꽤 강한 편인 스톤을 추천했다.

내가 그런 느낌의 사람이라는데, 그런 느낌이 무엇인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소화되지 않은 감정들이 몸을 딱딱하게 만든다.

잠들지 않은 이성이 신음소리를 내며 거듭 각성한다.


나는 분명 감정적인 상태가 되고 싶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슬픔이나 좌절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나는 나를 파괴시킬 수 있는 감정들로부터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다.

아무리 감정에 솔직해보려 노력해봐도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화를 내는 것뿐이다.

내 눈 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함에 있어 그 어떤 보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나는 화를 내고 싶다.


그러나 곧장 퇴근을 하며 그런 생각을 한다.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적어도 나의 신변에는 아직까지 아무런 이상이 없고,

적어도 그가 남긴 부채로 인해 더욱 골치 아파할 일이 없을 것임에 다행이라고.

참 깔끔한 삶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무엇도 남기지 않은 삶이었음에 감사함마저 든다.


꿈에도 한 번 나온 적이 없이 조용히 떠나간 그를 떠올려본다.

고작 13년의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였다고 나는 그의 얼굴이 기억이 나는 것만 같다.

길을 가다 마주치면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지난 17년처럼, 앞으로도 내가 그를 마주치는 일은 없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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