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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Mar 21. 2020

부고 일지 9일 차

2020년 3월 19일 목요일

그저 살아보는 수밖에 없는 삶처럼, 결단코 퇴고하지 않겠습니다.



부고에도 적응이 된다.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는 것이 이리도 간사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매일 각기 다른 기관에서 오는 자산 확인 문자 메시지에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그 안에 처리해야 하는 업무들이 많다는 사실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더 자고, 조금 더 먹을 수 있게 된다.

다만 슬퍼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마저도 적응이 되어버린다.

처음에는 지금 좀 넣어두어도, 언제든 꺼내기만 하면 온 마음을 다해 슬퍼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언제든 꺼낼 슬픔마저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


커튼을 치기 싫어하는 나는 요즘 부쩍 빨라진 일출 덕에 4-5시간밖에 잠을 못 잔다.

오늘은 날이 흐린 덕분에, 그래도 여덟 시간은 자고 일어난 것 같다.

아무것도 잘 먹히지 않는데, 배는 고프다.

갇힌 공간에서 시간을 계속 보내다 보면, 그 공간을 채우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으로

생각이 부풀어 오른다.

그렇다고 나가서 바람이라도 쫌 쐴까 하면, 그럴 에너지는 또 없다.

혼자 있어도 솔직해지지 못한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앉아있다.

사람을 만나면 단순히 솔직하지 않은 채 앉아있는 것이 아닌, 무슨 척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

이래도 저래도 편한 것이 없어 뒤척인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될까.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엄마를 미워했다.

이제야 엄마에게 내가 엄마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토록 미워하고 상처를 받았음에도 내게 엄마가 엄마로 남아있는 것은

그녀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 배 아파서 낳았다."

그럼에도 사랑에 서투르거나 사랑을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엄마가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순리라고도 생각한다.


아빠의 사랑은 잘 모르겠다.

살면서 부모가 필요한 적은 많았던 것 같은데, 아빠가 필요한 적은 별로 없다.

아빠를 잃든 엄마를 잃든, 자식 입장에서는 엄마를 잃는 것과 같은 효과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빠가 자식을 무척이나 사랑하려면

그전에 아내에 대한 사랑이 탄탄하게 깔려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가 낳은 나의 자식.

그런 연관성이 아니라면, 갑자기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난 갓난아이한테 무슨 정을 줄 수 있을까?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내 근처를 한번 서성이지도 않는 것만 같은 아빠가 떠올라 문득 크게 상처를 받는다.

정말 아무런 자극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혼자서 아주 크게 상처를 받았는데

아마도 나는 그때까지 그를 기다렸던 것도 같다.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사실을 드디어 받아들이게 된 것만 같았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나의 세상에서 그를 묻어버린 게, 사실 그때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인간의 성향에 기반하여 생각해보면

자식은,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인지하게 되기까지 본인이 받은 것들, 습관이 되어버린 의지나 안정감에 의하여

부모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거나, 

혹은 그렇게 학습된 것들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 그것을 부모에게 행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 중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아마도 그것에 가장 가까운 사랑을 하는 것은 엄마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 마저도 사랑이 아닌 보호본능에 의거한 습관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게 부모님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사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분명히 연인이나 배우자를 사랑하는 감정과는 확연히 다를 테기에.

애초에 나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잘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을 것이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린 내가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것..?

그런 사랑이 가능했을까?

지금에야 엄마에 대한 마음이 사랑인지 습관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미안함과 고마움과

미움과 전우애가 한데 뒤섞인 지극히 평범한 감정과 관계가 되었지만.

나는 그때 엄마나 아빠를 얼마나 사랑했을지, 

그게 정말 사랑이라는 범주안에 속하는 것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빠가 집을 나가고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꼬박 2년을 울며 기도하다 잠에 든다.

아빠와 함께하던 가정이 그리 평온하고 행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가 돌아와 예전 같은 가족의 모습으로 살게 해 달라며 빌기도 한다.

지금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나에겐 분명 그리워하던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다.

그 2년을 가끔씩 엄마 몰래 아빠와 통화를 하기도 한다.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아빠만이 우리 집에서 내 편이라는 생각을 꽤 오래도록 한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나에겐 아빠의 존재가 필요한 사건이 생긴다.

아빠는 신을 뜻을 앞세워 자신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는 내게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해버리고 만다.

그날, 내 세상에서 그는 죽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내 세상에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나는 이미, 그의 죽음에 대해 오랜 시간을 비통해왔다.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부재하고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가 내 세상에 존재하고 부재하고만이 내게 중요한 일이다.

나는 아주 오래 울었고, 아주 많이 슬퍼했으며

지금은 믿기지 않지만 언젠가의 나는, 그를 그리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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