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믐 Mar 22. 2020

부고 일지 10일 차

2020년 3월 20일 금요일

그저 살아보는 수밖에 없는 삶처럼, 결단코 퇴고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의 부고를 들은 이후, 나는 자꾸만 돈이 쓰고 싶어 진다.

나조차 내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나만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그러다 보니 위로의 수단으로 자꾸 무언가를 사주고 싶은 것도 같다.

그런데 그마저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누군가가 작은 선물이라도 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상속을 포기하는 데에 법무사를 수임하면 50만 원이 든다는데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

그런데 무언가를 읽고 정보를 습득하고 싶지는 않다.

하루 더, 혹은 며칠을 조금 더 미뤄보고 싶다.

오늘은 어떤 기관에서도 문자가 오지 않는다.


25만 원짜리 인감의 첫 쓰임이

주문 당시 기대했던 것만큼 가치 있지는 않겠지만

내 언젠가 인감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어본다.

누군가는 부동산 계약이라고 하는데, 그 보다는 더 의미 있는 일이면 좋겠다.


나는 요즘 내가 괜찮은지 너무 궁금하다.

그런데 나는 내가 어떤지 알지 못한다.

삶은 나를 들여다볼 여유도, 시간도, 마음도, 하다못해 용기마저도 빼앗아버린다.


나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린다.

내 얼굴, 내 표정 한번 들여다보지 못한 지 오래고,

정성을 들여 머리를 하거나, 화장을 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보는 것도 나와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바라보고, 나를 보는 것에 집중을 하고, 내게 시간을 보낸다.

매일매일 거울 앞을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한다.


반짝거리는 귀걸이가 갖고 싶다.

평소에 잘 하지도 않는, 있어도 앞으로 잘 하지도 않을.

반짝이는 귀걸이가 갖고 싶다.


그 귀걸이는 나를 거울 앞으로 데려다주겠지.

내가 내 발로, 내 의지로 갈 수 없는 곳이다.

나는 귀걸이를 들여다보려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을 것이다.

그러다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알게 되겠지.


- 너는, 너로 살아있구나.


나는 위로가 받고 싶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왈가왈부 떠드는 것이라도 봐야

무슨 생각이나 감정이 치밀어 오를 것만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는 도저히 내가 어떤지 알 수가 없다.

나의 이런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한테라도 그간의 사연을 털어놓고만 싶다.

나의 이야기를 아는 모든 사람한테 새로운 소식을 알려주고 싶다.

그런데 계중엔, 이미 그 이야기를 잊어버린 이들도 있더라.


사람을 만나는 일이 대단히 위로가 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시간에도 자꾸만 무언가를 숨기게 되는 내가

사람들 앞에서는 속이기까지 하고 있는 기분이다.

시간과 말은 휘발성이 강하다.

그들의 진심도, 나의 진심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는 또다시 어떤지 모르겠는 나와 조용한 공간을 숨이 막히도록 지켜낸다.


그런 나에게 나를 들여다보게 할,

내게 거울 앞에 서게 할 용기를 줄 수 있는 선물.

쉽게 휘발되지 않으며,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는 진심의 무게.

늘 내 곁에 있는 것만 같은 위로.


나로 살아있는 나는,

괜찮은지 알 수 없는 나는

위로가 받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고 일지 9일 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