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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Mar 23. 2020

부고 일지 12일 차

2020년 3월 22일 일요일

그저 살아보는 수밖에 없는 삶처럼, 결단코 퇴고하지 않겠습니다.



그늘이 드리우지 않은 나무는 오늘도 꽃을 피운다.

내가 기억 속의 봄은 늘 꽃이 먼저다.

바람은 여전히 봄을 모른다 하는데 꽃은 달처럼 무르익어 제시간에 핀다.

꽃을 보며 봄이 온 것을 안다.


올해의 봄은 좀 새삼스럽다.

잎사귀 하나 틔지 않은 마른 가지 사이로 햇볕은 뜨겁다.

그늘도 바람도 없다.

꽃은 한 박자 늦는다.

마치 제 한 몸 정성스레 준비하여 맞이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재촉에 아직도 잠결인 채 피워내는 것만 같다.

그런 꽃이 나는 왠지 불안하다.

꼭, 충실하지 못한 삶. 얼떨결에 시작한 인생.

부디 그들에게 끝만은. 여유로이 오기를 빌어본다.


황사 없는 파란 하늘, 

대한민국 역사상 이례적인 하늘이다.

창문을 실컷 열어놔도 춥지가 않고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많아진다.


여름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지독한 트라우마를 남겼던 인연의 생채기는

지독한 더위만큼 짓무른다.

끝이 없는 여름 속에 나는 갇혀버린다.

계절이 바뀐다는 것만큼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계절이 바뀌지 않는 것만큼 지옥을 걷게 되는 경험도 없다.


달라진 공기 냄새

지친 몸도 일으키게 만드는 햇볕

걸음을 재촉하는 꽃내음

움츠러들지 않아도 좋은 바람결


마치 봄꽃의 삶이 얼떨결에 시작해버렸다 한들

나의 이번 봄이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해버려도 좋을 것만 같은

그런 3월의 어느 날이다.


울기보다는 웃어왔는데

웃기보다는 울어보고 싶은 날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이내 삼켜버린다.

내게도 언젠가 당신을 위해 울어줄 날이 있겠지

내게도 언젠가 나를 위해 울어줄 용기가 생기겠지

당신이 떠나고도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나의 삶을

나는 내일도 어제처럼 살아가야지.


월요일이 되면 또다시 상속포기 절차를 알아보고

서류를 챙기러 분주해지겠지

서류를 신경 쓰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본업에 충실하겠지

종이 몇 장으로 대변되는 당신의 부고가 나는 언제쯤 실감이 날까.

내게도 그런 날이 올까.


어렸을 때 언젠가, 나중에 내가 많이 성공한다면

당신을 꼭 찾아가 맛있는 김치찌개를 한 상 차려줘야지 하고 생각했다.

당신이 떠난 이후로, 나는 엄마한테 요리를 많이 배웠거든.

내가 당신을 찾아갈 준비가 되기 전에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난다면

내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당신이 묻힌 그곳에라도 한번 들러보고 싶었다.


부재뿐인 우리의 관계의 끝에서

나는 묘조차도 알 길이 없다.


슬프지 않은 지금의 나를 원망하지 않겠다.

당신을 애도하려 애쓰지도 않겠다.

죽어버린 그리움을 되살리지 않겠다.

내가 당신을 잊어왔듯, 나는 앞으로도 당신을 잊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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