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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Apr 13. 2020

부고 일지 15일 차

2020년 3월 25일 수요일

그저 살아보는 수밖에 없는 삶처럼, 결단코 퇴고하지 않겠습니다.



홀로 사무실에 출근하게 된 날.

점심 약속이 생길 것 같다.

내가 원한다면 충분히, 그의 부고에 대해서 나누어도 좋을 사람들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검은색 옷을 한 벌 샀다.

나는 검은색이 참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누군가에게 내게 조의를 표할 일이 생겼다는 힌트를 주고 싶다.

다소 추위를 느낄 것을 알면서도 나는 새로 산 검은 옷들을 주워 입는다.


약속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오전 미팅이 끝이 난다.

나는 그들을 30분이나 기다리게 한다.

아무도 내게 먼저 묻지 않는다. 아무도 내게 먼저 물을 수 없다.

마치 이 이야기는 메인 코스에 해당하는 요리인 양,

정작 메인 요리인 점심 식사를 하는 동안은 애피타이저에 속하는 이야기들을 나눈다.

먹고사는 이야기들, 업계 이야기들, 크고 작은 소소한 업데이트들.

오랜만의 만남이 시작되면 만나지 못한 시간들이 어색한 듯 낯설게 맴돈다.

점심 식사를 마치는 동안, 낯섦은 금세 익숙한 제자리를 찾는다.


커피 타임. 이 점심 약속의 메인 요리는 끝났지만, 메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간.

청계천이 내려다보이고 햇살이 쏟아지는 2층 창가에

더위사냥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그는 어떻게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최대한.

"커피맛 아이스크림이 참 맛있죠, 이 아래는 초코시럽이 묻은 후레이크도 있어요."

라는 말과 비슷한 톤으로 운을 띄우려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에게 부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은

매우 불편하면서도 매우 고마운 시간이다.

그런 시간마저도 없다면, 나는 해가 뜨고 지는 파도에 파묻혀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데에 적응을 해버릴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무슨 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작된 말들 속에는

뜻밖의 진심이 묻어있다.


나는 햇살이 내게 부서지는 것을 아프게 맞으며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굳이 막지 않고 있었는데,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내가 살아온 날들에서 겪은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던 사람,

지금의 내가 이런 모습의 사람이 된 것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일들,

나의 상처, 나의 아픔, 나의 생, 나.를 증명해 줄 그 존재가 사라졌다.

나와 어느 순간까지 동일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사라졌다.


이제. 꼭. 마치. 나는. 이 모든 불행을 강제 종료시켜야만 할 것만 같다.

그가 죽음으로써 나는 더 이상 불행해서는 안될 것만 같다.

그가 죽음으로써 나의 상처는 꼭 나아야 할 것만 같고, 더 이상 그 상처에 연연해서는 안될 것만 같다.

그가 죽음으로써 특별하다고 믿어온 나의 이야기들은 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그가 죽음으로써 나는 더 이상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가 없고,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만 같다.

누군가 내게 과거 속에 살아있었던 일들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증명할 길이 없다.

꼭. 내가 치열하게 견뎌냈던 그 모든 감정들과 고통들이, 나의 망상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그의 죽음이 너무도 비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언젠가라도 만나서 "저 사람 때문에요!"라고 손가락질해 보이며,

내 이야기 속의 불행들이 모두 실재했음을 증명할 그런 기회가 내게는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실 그런 순간이 오기를 바란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순간마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임을 알아버리니

억울하고 얄미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앞으로의 다가올 나의 불행에 나는 더 이상 당신을 탓할 수가 없다.

아무도 나의 핑계를 믿어주지 않아도 원망할 수 없을 테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그 기억들이 내 안에서 천천히 죽어갈 것이다.


가족관계 증명서 위에 당신 이름 옆에 사망이라는 글자가 뜨기 전까지

당신이 내게 해 주었던 역할은 아마도

우리가 보낸 시간, 

나의 분노와 울음,

당신이 내게 준 상처,

오롯이 느껴지던 고통,

지속됨으로 인한 불행,

감내하기 위한 노력.

그것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는 실재할 수 있도록 증명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떠나고,

불행한 기억과 나만 외로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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