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믐 Apr 29. 2020

부고 일지 17일 차

2020년 3월 27일 금요일

그저 살아보는 수밖에 없는 삶처럼, 결단코 퇴고하지 않겠습니다.



떨어져 지낸 삶의 흔적을 자산과 부채를 확인함으로써 추측해보는 일은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다.

나는 그의 부고로부터 매일을 도망친다.

마치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마치 내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매일매일의 삶에 충실하는 게, 내가   있는 유일한 회피였다.

혹은 그의 부고로부터 나의 삶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부고로부터 도망치고픈 간절함을 매번 이겨버린지도 모른다.


그런 나를 고인 앞에 데려다 놓는 것은 안심 상속 서비스에서 매일 꼬박꼬박 보내주는 문자메시지이다.

사람이 살면서 이용할법한 각기 다른 모든 기관에서 매일매일 내게 결과가 준비되었으니 조회를 해보라며 두드린다.

 기관에 그의 자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나는 그가 넉넉하진 않아도 부족하지도 않은 삶을 살았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는 어제 야근의 끝에서 그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오천만 원의 부채를 만난다.

현존한 적이 없는 과거에 대한 바람마저도 무너진 듯했다.

나의 상속포기 의사는 번복될 여지가 사라졌고 

 결과를 마지막으로 어떤 기관에서도 더 이상 나를 두드리지 않는다.


그가 집을 나간 다음 , 엄마와 나는 7평도  안 되는 원룸으로 이사했다.

나의 어린 시절의 책들과 일기장과 피아노는 모두 외삼촌네  한켠에 갇혀버렸다.

아빠가 존재했던 행복했을지 모를 기억들도  방에 함께 갇혔다.

그리고  이후로 나는  방에 갇혀버린 것들을 다시 되찾을  없었다.

그것들은 모조리 누군가의 손에 의해 버려졌으며, 그것이 누구인지 나는 지금도  수가 없다.

매일같이 휘발되는 나의 기억 말고는  무엇도 그때  시절을 함께 기억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다음 날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앞으로 들어놓은 교육보험을 아빠가 타 가지고 갔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해지를 신청하러 갔다가 함께 들은 소식이었다.


엄마는 오랫동안 우리 집의 가장이었다.

아빠는 다양한 방면으로 돈을   있는 능력이 다분한 사람이었다.

논리적이었고 수리적이었다.

그러나 모든 직장을 오래 다니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집안일과 가계를 맡겼다.

아빠는 어느 날 내게 빚이 1억이나 되었다고 말했다.

엄마의 소비 때문이라고 했다.

엄마는 시간이 오래 지나서 말했다.

아빠가 주식을 하거나 엄마가 모를 무언가를  모양인  같다고.

그때는 신용등급을 확인하지 않고도 신용카드를 만들어 주던 시대였다.

돈을 벌게 된 지금의 나는 엄마의 말이  맞는  같다고 생각한다.


그때 아빠는 엄마의 신용카드와 돈을 벌지 않는 아빠의 신용카드를 잔뜩 만들어 돌려막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엄마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와중에도 엄마는 겨울방학을 맞이해 나를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보냈다.

종종 내가 한국으로 전화할 때면 전화연결이 되지 않고는 했는데 내가 불안함에 떨던 시간 동안 엄마와 아빠는 갖은 방법으로  독촉을 받았다고 한다.


감당할  없는 빚과 함께 남겨진 엄마는 아빠에게 말미를 주었다.

돌아오면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보자고, 그러나  날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엄마는 더 이상 아빠의 빚까지 감당할  없을  같다고.

 날이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5 즈음이었던  같다.

아빠는 엄마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엄마는 소송이혼을 준비했다.

위자료라고는   없는 이혼이었을게다.


아빠의 오천만 원짜리 빚은 그때의 빚이었을까.

아니면 파산과 회생을 거듭한 이후에 다시 생겨난 빚이었을까.

지난가을 기초 생활 수급을 신청했던 아빠는 과연 내가 모르던 시간조차  힘을 다해 살아내지 못한 것일까.

그가 어떻게 살았든 나의 삶이 조금이라도 달라졌을 리 없지만.

그가  살았다는 편이 이제와서는 조금  듣기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창피하다.


기침이 나고 열이 난다.

코로나일까.

나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그가 죽은 지 3개월이 되기 전에 빨리 상속 포기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데 덜컥 코로나 확진이라도 받는다면  인생은 얼마나  꼬이게 될까.

모르는 사람의 불안함은  세계를 잠식해버릴 만한 공포로 번지기 쉽다.

그러나 나는 내가 코로나에 걸린단들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나 보다.


엄마는 화를 낸다.

자식에게 빚을 남겨두고 가다니 개새끼라고 한다.

아빠의 이름 앞에 ()이라는 글자가 붙은 , 엄마와  반년만에 통화를 하며 삼십 년 만에 사과를 받았다.

나는 한번 정도  통화를 하면서 상속의 위험함에 대해 얘기했다.

엄마는 조금은 아쉬운  내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이후로 처음 하는 통화였다.

이번엔 엄마가 걸었다.

내가 코로나에 걸린  같다는 말에 걱정이  모양이었다.


엄마는 괜찮냐고 물으며 감기약이라도 먹어보라고 한다.

그리고 이내, 내게 대출을 받아 몇천만 원을 빌려줄  있는지 묻는다.

지금의 엄마는 직업이 없다. 여전히 갚지 못한 빚이 남아있고, 나는 아직  빚을 갚는 데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는 유일하게 의지했던 자신의 엄마와 남동생 때문에  다른 지옥을 맛본 지 수년이 되었다.

최근에 그녀가 지긋지긋한 삶으로부터 탈출할 좋은 기회를 찾은  같았다.

그녀는 너무도 절박했다.

그리고 나는  절박함 만큼 화가 났다.


그녀가 언제고 내게 같은 부탁을 해온들, 나는 결코 그녀에게  명의로 받은 대출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와 함께 해온 나의 삶이,  그녀의 삶이 나의 그런 결정을 충분히 대변해줄  있으리라 믿는다.

코로나로 인해 인원 감축을 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마당에 갚을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는 일에 나의 신용을 내어놓을 만큼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아빠의 부고로 인해 달라진 일상과,

코로나로부터의 불안감을 제대로 위로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나의 일상은 무사히 굴러가고 있는지, 밥은 제대로 먹고 잠은 제대로 자는지, 그녀는 내게 물은 적이 없다.

마음은  어떤지, 이것저것 알아보는 것은 할만한지 도와줄 게 없는지 그녀는  한 번도 내게 물은 적이 없다.

그런 그녀에게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아닌, 그녀와 함께도 아닌, 내가 홀로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코로나로 인한 불안감은  달랐다.

확진자가 급증한 이후로 나는 나의 컨디션을 매일같이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나의 일상이 겉으로는 평소와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끔 하는 , 그것만이 나의 매일의 목표였다.

아버지의 부고로도, 코로나로도 나는  삶을 지켜야만   같았다.


그녀 역시 내가 코로나에 걸릴 리 없거나 걸려도 죽지 않음을 확신했던 탓일까.

 삶의 절박함이 자식에 대한 걱정을 이겨냈다.

나는  승리를 인정할  없었다.

당신이 부모라면 이런 식으로 내게 그런 부탁을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

나의 존재가 부정당했다고 여겼다.

내가 느끼는 감정, 버텨내려는 발버둥, 불안함, 외로움, 공포, 그리움, 삶을 지켜내려는 구슬픈 애씀까지도 그녀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 알아주었으면 되는 것을, 아니 그녀조차 알아주길 바란 적도 없던 것을.

그녀는  하고픈 말을 내뱉음으로써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그녀가  한 번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던 그때로.

 한 번도 나를 돌아봐주지 않던 그때로.

 자신의 불행을 내 탓으로 돌리던 그때로.

내가  많이 외로웠던 그때로.


차라리 떠나버린 아빠는 원망스럽지라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내겐 그런 아빠조차도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고 일지 15일 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