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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Feb 05. 2022

눈 온 봄

그저 살아보는 수밖에 없는 삶처럼, 결단코 퇴고하지 않겠습니다.



아빠를 영영 잃어버리고 2년이나 지났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그때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숨기고 외면했다

지금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안아줄 수 있다

다시 소설이나 영화를 보다가도, 음악을 듣다가도, 어떤 장면에도 울어낼 수 있다


1월의 반이 아팠다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라는 것은 매일 자기 전에 꼭 한 번은 양치를 하는 것이었다

배달 용기들이 산처럼 쌓이고
먼지 알레르기 때문에 견딜 수 없어지기 직전이 돼서야

정전기 청소포로 바닥 먼지라도 밀어내 볼 의지가 생겼다

나는 그것을 '간이청소'라고 부르곤 했다

예전 같았으면 최소 2-3일에 한 번은 했을 일이었다


창문이 큰 집에 살고 싶었다

하늘도 담기고 나무도 담기는

그래서 하루의 민낯을, 날씨, 그리고 계절의 얼굴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그런 창을 갖고 싶었다

나는 작년에 아주 큰 무리를 해서 그런 창을 아주 잠시 동안 가져보기로 했다


밖을 나가지 않은지 벌써 한 주나 되었다

어제는 칼바람 소리가 창밖에서 윙윙 거리더니 입춘이라고 했다


그 말이 생각나서인지 하늘이 봄색인 것만 같아서 확인하고 싶어졌다

날이 맑으면 저 멀리 산이 두 개까지 보였다

산이  개가 보이는지로 미세먼지가 얼마나 많은지 대충 짐작  있었다

산이 두 개다 보이는 날이다

바람을 한가득 들였다

아주 은은하게 봄 냄새가 나는 듯했다

볼이 빨개질 때까지 창을 누렸다

버려진 구름 한 점이 금세 흩어졌다

여전히 녹지 않은, 그 누구에게도 밟힌 적 없는 눈들이 어디엔가 안심이 되었다

그저 직감으로 살아가는 어느 날 문득 잠깐씩 그리워질 장면이란 걸 알았다


글을 쓰는 동안 창에 걸린 모든 구름이 흩어졌다

해가 왼쪽으로 넘어간 것 같다


봄은 꼭 그렇게 왔다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은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나
제 혼자 나를 사랑하고, 또 상처만 받고 떠나간.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떠나고 없어

미안함과 그리움만이 오랜 시간 나를 따라다니던

서투른 인연으로.


이제야 비로소 봄이 언제 오는지 안다

눈이 녹는 동안 그를 사랑할 준비를 하리다

그는 늘 그렇듯 짙은 그리움을 남기고 떠나겠지만

미안함보다는 반가움으로

서투름보다는 고마움으로

열렬히 사랑해야지

저 멀리 오른편을 걸어서 올 그를

마치 처음처럼 설레여 기다려야지

저 멀리 왼편으로 떠나갈 그에게

기꺼이 손 흔들어 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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