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년회에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 사이에서 크리스마스에 사망률이 높아진다는 통계에 대한 설전이 붙었다. 한쪽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설렘이 심장의 관점에서 보면 여타 스트레스와 다를 바 없고, 그래서 연말연시 기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는 분들이 늘어난다 주장했다. 또 다른 한쪽은 모두가 모여서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크리스마스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이 마음이 얼어붙고 연쇄적으로 몸도 얼어붙어 고독사가 늘어난 거라 주장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들은 이런 하나마나한 설전을 진지하게 이어갈 수 있음에 유대감을 느끼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떠들어댔다.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고 있는데, 한 친구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산통을 깼다.
"크리스마스에 사망률이 높다는 속설이 있는데, 사실무근이라는데?"
이 말 한마디에 두고두고 우려먹을 즐거움 하나가 사라졌다. 객관적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열을 올리며 떠들어댈 소재가 필요할 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참 시간이 흘러 공통된 화제가 없는 우리들이 마음을 한데 모아 열을 올려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가 필요할 뿐이었다.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 이야기도 할 만큼 했고, 미친개(학생 주임 선생님의 별칭) 이야기도 할 만큼 했다.
고혈압, 당뇨, 탈모 등 노화에 대한 이야기는 공통 화제가 되겠으나 그런 구질구질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으니까. 심장마비로 저세상으로 떠난 체육 반장 이야기는 더더욱 하고 싶지 않으니까. 이혼한 이후로는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반장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고향을 떠나면서 더 이상 롯데를 응원하지 않는 변절자들이 속출하며 야구 이야기도 못하게 됐다. 정치 이야기는 나왔다 하면 싸우기에 눈치 없는 누군가가 정치 이야기를 꺼낼까 조마조마하다. 한때는 모였다 하면 여자 이야기였는데 테스토스테론 분비가 잘 안되는지 아무도 꺼내지 않는다. 간혹 여자 이야기가 나와도 금세 남자 몸에 굴이 좋다는 둥 흑염소가 좋다는 둥의 이야기로 넘어가버린다.
그러다 오랜만에 모두의 얼굴에 희색을 띄게 한 이야깃거리를 발견했던 건데, 이걸로 족히 두 시간은 즐거울 수 있었는데, 눈치 없는 녀석이 산통을 깨 놨다. 이렇게 눈치 없는 녀석은 모임에 못 오게 해야 한다. 아니 그건 너무 가혹하니 참석하는 조건으로 핸드폰을 압수하는 게 좋겠다. 아무튼 김이 빠져버린 친구들은 크리스마스에 비명횡사할 위기는 벗어났음에 만족하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 짓고, 이미 천 번 만 번도 넘게 한 미친개 이야기나 하기로 했다.
어느 학교에나 있던 것으로 사료되는 미친개는 수당에 눈이 멀었던 건지, 아니면 집에 가봐야 반겨줄 이가 없었던 건지 야간 자율학습 당번을 거의 도맡아 하는 수준이었다. 어쩌면 그의 존재감이 워낙 커서 자주 하는 것으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야자가 시작되면 미친개는 한때는 대걸래였던 사랑의 몽둥이로 바닥을 질질 끌며 복도를 어슬렁거렸다. 각 반에는 40명은 넘게 있었고, 총 12반까지 있었으니 약 50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다. 약 500명의 학생들이 허튼 생각 못하게 정신무장을 시켰을 뿐만 아니라 학습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게 했던 건 고작 사랑의 몽둥이와 바닥이 만들어낸 들릴 듯 말듯한 마찰음이었다. '띠띠띠띠'거리는 엠씨스퀘어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던 시대였으니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싶다.
미친개가 왜 미친개 인지는 야자 시간에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대번에 알 수 있다. 복도 끝에 있는 숙직실에 앉아서 12개의 반 중에 떠드는 반을 찾아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미친개는 기가 막히게 찾아내서 미친 듯이 짖었다. 그의 사자후를 듣고 있노라면 다시는 떠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가만 들어보면 쌍욕을 하는 것도 아니고 끔찍한 협박을 하고 있지도 않다. 청정한 대사로 이토록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비록 쌍욕도 협박도 폭력도 포함되지 않은 사자후이지만 정신적 타격은 어마 무시하기에 가능하면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40명 50명씩 오글거리는 교실에는 눈치 없는 친구가 꼭 있다. 이어폰을 셔츠 소매로 꺼내어 라디오를 듣다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흥얼거린다. 그리고 또 같은 라디오를 듣고 있던 다른 친구가 합세해서 흥얼거린다. 그러면 곧 반 전체가 흥얼거린다. 여기까지 오면 소심하고 눈치 빠른 나 같은 친구들은 미친개의 등장을 예견하고 이미 벌벌 떨고 있다.
미친개 일화는 많고 많아서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모이면 이야기 화제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교사로서 큰 영광이지 않나 싶다. 우리 학번에만 500명이고 30년간 근무한다 치면 15000명 제자들의 기억 속에 뚜렷하게 각인되는 영광을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게 아닐 테다. 물론 미친개 입장에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니 그에 앞서 미친개 자신이 미친개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의문이다.
우리 반이 유난히 떠들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미친개는 냄새를 맡고(?) 나타나 뒷문을 확 열어젖히더니 미친 듯이 짖었고 우리는 쫄았다. 아니 우리뿐만 아니라 12개 반 500여 명이 동시에 쫄았다. 미친개는 문을 부숴버리려는 듯 쾅 닫고 사랑의 몽둥이를 질질 끌며 복도를 조금 걷다가 앞문을 열어젖혔다. 잔뜩 쫄아있던 우리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각자 생각하기에 가장 바른 자세로 집중하여 공부하는 행세를 하고 있는데,
"이반은 참 잘하고 있네~"
라는 잊지 못할 명대사를 남겼다.
후에 이 이야기를 동창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했더니 어디선가 이 이야기를 들어 봤다더라. 게다가 아주 유명한 이야기라고 하더라.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의문에 빠졌다.
1. 어느 학교에나 있는 일인지,
2. 아니면 우리 학교 미친개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건지,
3. 아니면 어느 학교에나 있는 미친개의 행태가 똑같은 건지,
4. 아니면 교육부에서 전국에 있는 학교에 공문을 내려 학생주임교사를 소집하여 합숙훈련을 하는데 그 훈련 매뉴얼에 포함된 내용인 건지,
5. 아니면 이 이야기를 어디선가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미친개가 제자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고자 연기한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