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시간의 흐름에 유한한 내 존재의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나온 세월의 조각들을 기록하고, 요즘 드는 생각들과 근황을 기록하고, 직장인으로서의 나, 엉터리 상담가로서의 나를 기록하고, 가족들의 이야기까지 기록했습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 하는 만족감이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조금은 공허하네요.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생략했을 뿐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글의 맛을 살리기 위한 약간의 과장된 표현들이 포함되었을지 몰라도 없는 감상을 굳이 포함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글들이 나를 표현한 것이 맞냐 묻는다면, 백 번 천 번 그렇다 답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이유는 뭘까요?
이 세상 최고의 화가가 제 초상화를 똑같이 그린다 한들 그 그림이 곧 나는 아니잖아요. 3000만 화소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도 그 사진이 곧 나는 아니잖아요. 그러니 지난 21개월간 나의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했다 하나, 그 글이 곧 '나'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 글이 나의 분신이 되어 오래도록 존속되기를 바랐던 욕망은 진시황제의 영생을 향한 욕망만큼이나 터무니없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허물어지는 젊음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노력이 무슨 소용이며, 사라진 젊음을 애도하며 보내는 남은 여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또한 죽음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노력이 무슨 소용이며,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애도하며 보내는 남은 여생이 무슨 의미일까요.
허무한 생각을 전파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기운 빠지는 이야기일지 몰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래서 저는 그냥 받아들이려고요. 노화와 죽음을 껴안으려고요. 새싹이 돋고, 푸르름을 더해가다, 왕성한 생의 에너지를 자랑하다, 노랗게 혹은 빨갛게 익어가다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게 자연의 이치잖아요. 그리고 영원히 푸르른 조화보다 피었다 지는 자연이 더 아름답잖아요. 아니 어디 비교나 될까요?
저는 신이 존재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굳이 유한한 존재로 만든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만약 인생이 영원하다면 지금과 똑같이 살게 될까요? 어떤 생명과학자가 노화를 멈추는 약을 개발했다 가정해봅시다. 그래서 그 약을 먹으면 누구나 200년을 살 수 있다고 해봅시다. 그 약 드시겠습니까? 1000년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기쁜 소식일까요? 5000년은 어떻습니까? 5000년을 살게 된 인류는 지금처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며 노래 부를 수 있을까요?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저는 점점 늙어가고 있고, 활력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도 한때 팔팔했어! 나도 한때 잘 나갔어! 외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위로가 될까 싶어요. 나란 존재는 앞으로 점점 사그라들다 언젠가 숨이 멈추겠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허무한 생각을 전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그저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언젠가 죽는다는 그 당연하고 명확한 사실이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거북했는데, 지금은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여기에 이르기까지 지난 21개월간 생각을 정리하며 글을 쓰며 보냈던 시간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래서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에게도 초상화를 그리는 마음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찬찬히 기록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정성을 다해 기록하며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당신의 삶이 이전보다 풍성해질 거예요. 그 시간이 저에게는 1년 하고 9개월이었지만, 이보다 짧을 수도 길 수도 있겠지요. 쓰다 보면 느낌이 와요. 이제 다 되었구나, 끝내도 되겠구나 하고요. 저는 그랬습니다. 이제 다 되었구나 싶어요.
예전에 본업과 관련해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1년짜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고, 9개월쯤 진행되어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가 도출되어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자로서 인터뷰를 했어요. 인터뷰 내용이 인터넷 세상에 퍼졌고, 그 기사에 댓글을 다신 분도 꽤 많아서 SNS를 하지 않는 저에게는 신선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댓글 중에는 '고작 9개월 일하고 무슨 인터뷰냐'라는 것이 있어서 처음엔 기분이 좀 언짢았어요. 그런데 곱씹을수록 그 말에 일리가 있더라고요. 한평생을 진득하게 한우물을 파고, 묵묵히 자기 십자가를 감당하다가 소리 소문 없이 세상의 먼지와 이슬이 되신 분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댓글 달아주신 그분에게 깨달음의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저는 이제 겨우 40년 살았습니다. 인생의 중간쯤 왔다 생각하면 인생의 후배가 반이고 나머지 반은 선배님들이겠죠. 딱 중간인 제가 인생 다 산 사람처럼, 또 득도한 사람처럼, 때론 선지자나 되는 것처럼 함 참을 떠들어 댔습니다. 예전 글에도 썼다시피 여름철 한철 울다 사라지는 매미로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매미가 뭐 알고 떠드나요? 그냥 태어나보니 매미이고, 여름이 되니 울고 싶어요. 그래서 맴맴 거리는 거겠죠. 저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예요. 그런데 막 떠벌리고 싶은걸 어쩌나요. 그런데 내성적이라서 사람들 앞에서 말도 잘 못해요. 그러니 별수 있나요. 이렇게 끄적이는 수밖에요.
이 글을 쓰는 시간이 저에게 무척 큰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정의 마지막을 고하는 글을 쓰고 있으니 마치 오랜 친구와 헤어지는 듯 서운하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