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북한 혈통에 부산의 문화가 더해져 무뚝뚝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친가 친척들은 명절마다 주기적으로 보는데 비해, 흥과 여유가 넘치는 외가 친척들은 중학생이 된 이후로는 거의 보지 못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엄마랑 무궁화호를 타고 충청도 외가 투어를 종종 떠났는데, 기차에서 내리면서부터 시작되는 축제는 다시 기차에 오르기 전까지는 결코 그치는 일이 없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장례식장 문을 열면서 페스티벌이 시작되었다. 음주가무를 빼고 이렇게 신나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은 외갓집 사람들을 제외하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땐 아기였던 사촌동생들이 흥 많은 이모와 삼촌을 쏙 빼닮은 아줌마 아저씨가 되어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이렇듯 친가와 외가의 극명한 온도차를 느낄 때면 엄마와 아빠는 알콩달콩 살기에는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다 느낀다.
장례가 끝나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에도 온 가족이 나와 퍼레이드가 진행되었다. 마치 다른 나라로 떠나는 사람처럼 악수하고, 껴안고, 울다가 웃다가, 함께 사진도 찍고,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다음에야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이제 보면 또 언제 볼지 알 수 없긴 하다만..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외할머니와 함께한 기억을 떠올렸다. 한동네 살 때 할머니는 구멍가게를 잠깐씩 맡기시고 용돈을 500원씩 주셨다. 가끔은 깜빡하셨는지 안주기도 했는데, 그때는 몰래 동전함에서 500원을 꺼내갔다. 엄밀히 따지자면 훔친 그 돈을 들고 항상 오락실에 갔다. 떳떳하지 않은 돈은 늘 방탕하게 쓰게 되고 그 뒷맛은 찝찝하다. 금세 500원을 날리고 죄책감만 한가득 안고 집으로 향했던 찝찝한 기억이 여럿 남았다.
대부분 가게를 맡기시는 이유가 나에게 맛있는 거를 먹이고 싶어서 시장에 가시거나, 구멍가게의 뒤쪽 구석진 방에 위치한 부엌에 가서 요리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나는 염치없이 500원의 대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안 주면 훔치기까지 했던 것이다. 아마도 나는 인자하신 외할머니를 별로 닮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어쩜 그렇게까지 염치없을 수 있는지.
할머니는 옥천과 대전에서 주욱 사시다가 내가 초등학생일 때 잠깐 부산에서 사셨고, 그 이후에는 인천의 외삼촌 댁에서 사시다가 생을 마감하셨다. 그러니 할머니가 구멍가게를 운영하신 기간은 할머니 인생에서 10분의 1도 안된다. 하지만 나의 기억 속 할머니는 항상 그 구멍가게에 있다.
이기적인 나는 할머니와의 추억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이내 다른 사람들은 나의 어떤 순간을 기억할까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왔다. 엄마를 떠올리면 난 늘 4학년 때로 돌아간다. 봄빛이 따뜻했던 어떤 토요일,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왔는데 집 청소를 하시던 엄마와 봄빛이 가득 담겨 평온한 거실 풍경이 어우러져 '완벽한 행복'이라 느꼈던 그 날로, 나를 안고 빙글빙글 돌며 '사랑가'를 불러주셨던 그 날로 돌아간다.
아빠를 떠올리면 부산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돌아가던 그 날로 간다. 아빠는 그 어떤 말도 없이 걷기만 했고 침묵은 족히 30분은 이어졌다. 참다못한 나는 아빠에게 왜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냐고 물었고, 아빠는 할 말이 없어서 말을 안 했을 뿐이니 네가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답하셨다. 바로 그 날 아빠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어떤 날의 나로 기억될까? 누군가에겐 코털이 쭉 삐져나온 날,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갓집에 다녀와서 담배냄새에 절었던 날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언제로 기억될지 모르니 단정하게 청결하게 하고 다녀야지. 누군가에게는 불같이 화내는 모습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겁하고 가식적인 모습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언제로 기억될지 모르니 늘 온화하게 살려고 노력해야지. 또한 당당하고 정직하게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