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계약한 컨텐츠를 시청하고, 유튜브가 추천하는 클립을 본다.
대기업에서 생산한 가공식품을 먹고 마신다. 농산품조차 대형마트가 계약한 농장에서 수확해서 엄선된 상품을 구매한다.
넷플릭스와 유튜브는 AI 기술로 나의 취향을 파악해서 내가 좋아할법한 예능, 영화, 음악을 추천하기에 감히 탈출을 꿈꾸지 않는다. 알아서 취향을 저격해 주는데 무슨 수로 거부하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카트를 끌며 물건을 주워 담고 할인쿠폰을 적용해 결제하는 일체화된 편리함에 취해, 장바구니 챙겨 재래시장에 가서 가격을 묻고 흥정해서 구입하고, 이고 들고 지고 돌아오는 불편을 감수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러다 온라인몰 장바구니에 담아 결제버튼만 누르면 다음날 아침 문 앞으로 배달이 되는 극한의 편리함에 한번 중독되고선 마트 가는 번거로움도 견디지 못하겠다. 그런데 재래시장이 웬 말인가..
재래시장이 불편하기만 한가? 휴가를 맞아 고향집에 와서 어쩔 수 없이 재래시장에 오랜만에 가보니 값도 싸지 않더라. 지난주에 사과를 9900원에 6개를 샀으니 하나에 1700원이 채 안 되는 값인데, 시장에선 2500원에 팔고 있더라. 상추엔 벌레 먹은 흔적이 있고, 흙도 묻어 있더라. 고추는 기형적으로 길거나 짧고, 수박은 특유의 줄무늬가 없이 새까만 놈, 줄은 있는데 애호박처럼 조그만 놈 등 상품성이 없더라.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샀다.
그런데 왜 이리 맛있나? 사과는 쩍 하고 쪼개지며 신선한 과즙을 소나기처럼 뿌린다. 상추는 달고 야들야들하다. 그동안 내가 먹은 상추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상하게 생긴 고추와 수박도 모양만 그렇지 내리쬐는 태양, 신선한 공기, 땅의 지력이 담겨 생명력 있는 맛이었다. 그동안 대형마트에서 사던 농산품들이 마치 공산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마도 대기업이 상품을 선정할 때 보기 좋고 값이 저렴한 것들을 우선 매입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 모양은 제멋대로지만 알짜배기인 상품들이 재래시장으로 모여든 게 아닐까?
유튜브가 추천해주는 영상은 너무나 내 취향이고, 추천해주는 음악은 하나같이 마음에 쏙 든다.(그래서 나의 취향이란 게 이토록 뻔한 거였나 싶어 나 자신에 대해 약간의 실망감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고향집에 와서 어쩔 수 없이 백개도 넘는 채널을 하나하나 넘기며 탐색하는데, 의외로 재미있는 게 많았다. 의료상식을 좀 배우다, 당구의 기술도 알아보고, 여자 배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다, EBS를 통해 요즘 수능 트렌드도 살피고, 홈쇼핑도 좀 보고, 외국 방송도 보고, 스위스를 여행하다가, 아마존에도 갔다가, 맛집도 찾아가고, 법률 상식도 한수 배우고(퀴즈, 배우자의 핸드폰을 몰래 열어보는 건 불법일까?), 예전에 즐겨보던 스펀지밥에서 멈추어 한참을 낄낄거리다, 추억의 명화의 한 도막을 감상하다, 원조 순한 맛 드라마 전원일기를 시청하며 고두심의 아름다움에 탄복하고, 시가에 담긴 우리 민족의 애환에 대해 묵상하다.. (백여 개 채널을 모두 언급할 순 없으니 이하 생략)
어쩔 수 없이 본 건데, 왜 이리 재미있나? 나만의 세상에만 갇혀 살다가 세상의 곳곳을 구경하는 듯한 신선함이 있었다. 타인의 취향을 엿보는듯한 재미가 있었다. 심지어 CF도 재미있었다. 컨텐츠를 VOD로 찾아보는 시대가 도래하고 나서는 도통 CF를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일부 PPL로 대체되었지만, 자본과 상품만 남고, 정성과 예술성은 실종된 광고는 무색무취다. (일요일엔 내가 요리를 해야만 할 것 같고, 언젠간 잡고야 말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고, 손이 가고 또 손이 가는 충동을 느끼게 한 CF의 참맛이 실종되었다.)
오늘 아침 비스듬히 누워 리모컨을 부여잡은 채 난데없이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너무 유재석 예능만 편식한 건 아닌지, 너무 AI가 배달하는 컨텐츠로만 편식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러다 시나브로 편협한 시각과 단조로운 취향을 가진 무색무취의 공산품 같은 인간이 되는 건 아닐까?
퀴즈 정답: 비밀번호나 패턴, 지문인식, 홍채인식 등으로 잠가놓은 게 아니라면 불법이 아니지만, 핸드폰이 잠겨있는데 굳이 풀어서 보는 건 불법이란다. 충격! 나는 범법자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