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란 이름의 여자에게 농락당한 불쌍한 남자 '토끼'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500일의 썸머를 10년이 흘러 다시 봤다. 예쁜 외모를 무기로 남자들을 농락하는 나쁜 여자의 전형으로 보이던 여름이 다르게 보였다.
애송이의 사랑
토끼의 사랑은 내 스무 살의 사랑이 그러했던 것처럼 찌질하면서 간절했고, 그 간절함으로 인해 더욱 집착하며 찌질함을 더했다. '봄날은 간다'를 '영화관'에서 '혼자', 그것도 '두 번'이나, 그것도 '훌쩍이며' 보고 있는 남자를 상상해 보라. 부끄럽지만 소름 끼치도록 찌질한 그 남자가 바로 나다.
I love us
내 첫사랑 그녀를 짝사랑했던 1년 동안 사랑은 점점 자라났다. 바라만 보던 시절의 감정을 감히 사랑이라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사랑 이외의 단어로 그 뜨거운 감정을 설명할 수 없기에 사랑이라 하겠다. 그 사랑은 한 여름의 쏟아지는 햇살처럼 강렬하고 눈부셨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을 마음에 그린다. 찬란했던 그녀와 나. 나는 그녀를 뜨겁게 사랑했고, 뜨거운 사랑을 품고 있던 그때의 나를 여전히 그리워한다.
그런데 어쩌면 그 시절의 사랑이란 'I love me'의 시절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향하는 감정이야 토네이노처럼 요동치고 용광로처럼 뜨겁지만, 오히려 그 감정이 너무 거세어서 상대방을 바라보지 못하기도 하기에. 토끼는 마음의 사랑만 키우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때, 토끼가 듣고 있는 음악에 관심을 가지면서 둘의 관계가 시작되게 한 것은 여름이었다. 반면 토끼는 여름이 좋아하는 링고스타를 비웃다 위기에 처한다. 또한 여름의 사랑이 끝나가고 있음을 토끼는 바라보지 못해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
사랑은 현실이다
여름과 토끼는 영화관에서 '졸업'을 보다, 여름은 오열하고 토끼는 당황한다. '졸업'은 결혼식장 난입, 신부 탈취, 사랑의 도주라는 격정적 사랑의 3단 클리셰를 형성한 클래식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백미는 뭔가 어색하고 불안한 분위기의 엔딩신이다. 원래 대본상 엔딩은 납치한 신부와 멀리 떠나는 (진부한) 사랑의 시작을 그리려 했으나 감독의 커트 사인이 늦어지자 어린 배우들의 표정이 굳어가며 어색한 분위기가 영상에 담겼단다. 그런데 그 표정이 뭔가 마음에 든 감독이 'the sound of silence'를 bgm으로 깔면서 사랑의 현실에 눈을 뜬 으른들의 공감을 샀고, 그 결과 길이 남을 고전 영화가 되었다. 야생마처럼 날뛰는 감정만 가지고 길이 길이 행복할 수 없음을 으른들은 너무 잘 알기에 행복한 두 남녀의 모습으로 그려졌다면 결코 클래식으로 남지 못했으리라 장담한다.
사랑의 끝
대분의 사랑은 비극이다. 아니 비극이어야 한다. 결혼한 남녀를 대상으로 이전의 연애 횟수를 설문한 결과 7~8명이란 답이 가장 많았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젊음의 대부분의 시간을 실패로 점철된 시간을 보내게 됨을 의미한다. 사귀어보지도 못한 처절한 실패를 빼고, 애매한 썸도 빼고, 오피셜 연애로만 따져도 7~8회의 실패 끝에 결혼에 골인한다. 물론 그 사랑도 끝까지 성공으로 기록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만.
다시 생각해 보자. 앞자리에 앉은 그녀와도, 지하철에서 내 앞에 와서 선 그녀와도, 롯데리아에서 친절하게 주문을 받아 준 그녀와도, 소개팅에서 만난, 틴더로 매칭된, 클럽에서 함께 춤을 춘, 부킹포차 옆테이블에 있던, 헬스장에서 유독 눈에 띄던... 수많은 그녀들과 모두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면 이것이야 말로 재앙이지 않겠나.
사랑의 온도차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여름이 영화 속 영화 '졸업'을 보며 흘린 눈물의 의미를 떠올려보자. 여름은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무리 지어지는 동화와는 다른 현실의 사랑을 안다. 사랑이 지속되는 동안의 행복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않음을 그래서 필연적으로 아픔의 시간이 따름을 기억한다. 그래서 serious한 관계로 발전되기를 꺼려한다. 사랑의 행복은 누리되 아픔은 또 겪기 싫어 머뭇거리는 여자와 번지점프하듯 사랑에 몸을 던지고 싶어 안달 난 남자는 그 온도차로 힘들어한다.
사랑의 속도차
사랑만큼 우리 삶에 완벽한 행복이 없다. 하지만 모든 인연이 결실을 맺을 수는 없기에 나의 반쪽을 찾기 전까지는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몇 번의 사랑과 헤어짐을 경험한 이들은 둘 사이의 행복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끝을 준비한다. 반면 경험이 없거나 적은 애송이 시절을 지나고 있는 이들은 본인이 무엇을 잘못해서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 생각해서 자책하고 때로는 집착하며 괴로움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영화의 제목이 '500일의 썸머'이지만 사실 이 둘은 290일에 헤어진다. 나머지 210일은 토끼만의 고통과 아픔의 시간이다. 여기에 토끼만의 짝사랑의 시간 30일을 고려해 제목을 다시 붙인다면 '260일의 톰'이 되겠다. 아, 남주 고든 래빗이 극 중 이름이 톰이다.
헤어짐
헤어짐의 유형은 크게 둘로 나뉜다. 대판 싸우고 헤어지는 유형, 다시 잘해보려 하다 결국 포기하는 유형. 후자의 경우 여행을 가기도 하고, 재미있는 데이트를 준비하는 등의 '노력'으로 둘 사이의 균열을 메우려 하지만 당연하게도 '노력'으로 메워지는 게 아님을 처절히 깨닫고 헤어지게 된다.
연애 말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무드업을 시도했던 건 여름이었다. 그래서 토끼는 더욱 혼란에 빠졌으리라. 우리 사이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는데 갑자기 왜 떠나가는지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으리라. 그래서 더욱 여름이 미웠으리라.
운명 혹은 우연
사랑이란 우연한 사건의 결과인지 우주의 섭리로 나의 반쪽을 찾아가는 운명의 결과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운명적 사랑을 꿈꾸고, 사랑에 상처받아 회의하다, 언젠가는 또다시 운명적 사랑을 꿈꾼다는 것이다.
30일의 짝사랑, 260일의 사랑, 210일의 아픔을 모두 겪어낸 토끼가 비로소 새로운 사람을 마음에 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한 여자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가을.
그렇다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게 우연일까? 우연일 리 없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이 우연일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