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블스 플랜', 피스를 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by 바보

“게임은 공정해야 한다. 최소한, 가능성만큼은 평등해야 한다.”
넷플릭스 서바이벌 예능 <데블스 플랜>은 이 단순한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문제는 단순히 개인이 ‘악했다’거나, 누군가가 ‘착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프로그램은 구조 자체가 불공정했고, 그 구조가 특정 인물의 정치력과 감정 연합을 통해 증폭되며 시청자의 신뢰를 잃었다.


1. 규현과 소희 – 관계에 매몰된 판단 중지의 아이콘

규현과 소희는 이 프로그램에서 ‘게임 참가자’라기보다 ‘관계 연출자’처럼 행동했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이들은 생존보다 감정, 승리보다 현규의 방어막 역할에 몰입했다.

시청자들이 가장 불편해한 지점은 이들이 스스로의 전략을 포기하고, 타인의 감정선을 따라 움직였다는 점이다. 윤소희는 실력 면에서 누구보다 유력한 우승 후보였지만,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하며 현규의 설계에 동참했다. 규현 역시 냉철한 추리력을 보여주기보다는 ‘현규와의 정서적 동맹’ 안에 안주하며 경쟁력을 잃어갔다.

게임의 본질이 흐려지는 순간이었다.


2. 현규 – 감정과 신뢰를 장악한 정교한 설계자

현규는 뛰어난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전략이 아니라 ‘통제’에 가까웠다.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고, 감정을 건드리고, 죄책감을 최소화한 채 자신의 논리를 주입한다.
그가 만든 ‘정서적 전선’ 안에서 규현과 소희는 자발적으로 판단을 멈췄고, 이는 단순한 인간관계가 아닌 심리적 종속 관계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것이 게임의 서사 전체를 왜곡시켰다는 점이다.
현규의 승리는 개인의 승리를 넘어 ‘정치가 게임을 압도할 수 있다’는 증거로 작용했다.


3. 감옥동 – 기울어진 구조와 절대 권력의 문제

<데블스 플랜>의 진짜 문제는 권력 구조의 설계 방식에 있었다.
피스를 가진 자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이 주어졌고, 이는 게임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단순한 유리함이 아니라, 다른 참가자의 생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수준의 지배력.
이 구조는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가진 절대적 영향력과도 닮아 있었다.
정보를 알아도, 판단이 빨라도, 그 힘이 ‘피스’라는 자원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결국 세븐하이, 은유, 이세돌과 같은 걸출한 두뇌들이 감옥동에 수감되는 순간, 그들은 실력과 무관하게 탈락의 수순을 밟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시청자들이 가장 좌절감을 느꼈던 지점이다.
그 누구도 구조를 넘어설 수 없었고, 개인의 역량이 아닌 위치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


결론 – 전략보다 권력이 우선된 게임

<데블스 플랜>은 겉으로는 전략 게임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권력의 쏠림이 모든 긴장과 가능성을 흡수해버린 구조 실험이었다.

시청자는 정교한 두뇌 싸움을 기대했지만,
끝내 남은 것은 감정 정치, 권력 독점, 주체성의 실종이었다.

‘피스’라는 권력, ‘감정’이라는 무기,
무엇보다 ‘생활동’과 ‘감옥동’이라는 넘을 수 없는 구조적 경계.
이 세 요소는 게임을 '서바이벌'이 아니라 구조적 승자 독식 체계로 전환시켰다.
<데블스 플랜>은 개인의 전략이 아닌,
위치와 권력이 결합된 구조 그 자체가 승자를 결정하는 게임이 되어버렸다.

이 장면은 단지 게임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평민이 양반 앞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질서,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일본 순사 앞에서 2등 시민으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불평등이 떠올랐다.
아무리 총명하고 용기 있는 자라도,
넘을 수 없는 위치와 구조 앞에서는 이길 수 없었던 그 역사 말이다.

그래서 이 게임을 보며 불편했고,
그래서 쉽게 감탄하지 못했고,
그래서 결국 현실을 닮은 불신 속에 낙담했다.

<데블스 플랜>은 실패한 게임이 아니라,
너무도 현실을 정직하게 흉내 낸 슬픈 거울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작 예능 프로그램 하나에 이토록 마음을 쏟는다.
단순한 게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구조와 서사를 접하며 자라날 다음 세대가 불합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를, 기울어진 판에 순응하며 살아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데블스 플랜>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사회였고,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불완전한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다음 세대가 만들 세계는 이보다 조금 덜 불합리하고, 조금 더 공정한 구조 위에서 작동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이 불편함을 기억하고 말로 꺼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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