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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by 바보

지나가버린 방학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영화관을 찾았다. F1 더 무비를 본 후 늘 그렇듯 제멋대로인 감상평을 남기고자 한다. 거기에 덧붙여 일기인지 낙서인지 종잡을 수 없는 글도...


1. F1, 해밀턴의 시대가 끝나다

몇 해 전 넷플릭스 다큐 <본능의 질주>를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당시 시즌 3까지 나왔었고, 2020년까지를 다루고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메르세데스의 루이스 해밀턴이 절대강자였다. 다큐에서도, 그리고 내가 알고 있던 기억 속에서도 ‘F1 = 해밀턴’이었다.

그래서 영화 <F1 더 무비>를 보면서도 아내에게 해밀턴을 가리키며 “저 선수가 독보적인 최강자야”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검색을 해보니, 그 말은 분명 진실이었는데, 진실이 아닌 게 되어있었다. 해밀턴의 전성기는 분명 대단했지만, 딱 2020년까지였다. 그 이후의 트랙은 레드불 소속의 막스 페르스타펜이 지배하고 있었다.

영화관에서 본 F1은 내가 알고 있던 F1과 달랐다. ‘절대 강자’라고 믿었던 선수의 시대는 이미 끝나 있었고, 새로운 절대 강자가 왕좌에 올라 있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니, 내가 놓친 시간과 변화가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올해에는 해밀턴도 막스도 아닌 맥라렌 소속의 다른 선수가 대세란다. F1은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리는 레이스인데, 이 세상은 그보다도 더 빠르게 달리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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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레드불, 짝퉁이라 생각했던 그 음료

영화를 보며 더 충격이었던 건 따로 있었다. 레드불 팀이 몇 해째 F1을 제패하고 있다는 사실. ‘음료 회사가 자동차 경주를 한다고?’ 단순한 후원이 아니라 직접 팀을 꾸려 연승을 이어가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호기심은 검색으로 이어졌다. 레드불의 출발은 태국의 에너지 음료 크라팅 데엥. 오스트리아 치약회사 마케터 마테시츠가 출장길에 이 음료를 마시고 시차 피로가 풀리는 걸 경험한 뒤, 현지 창업자와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각각 50만 달러를 투자해 회사를 세우고, 제품 이름을 영어식으로 ‘레드불’이라 바꿨다. 그 뒤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다. 기발한 마케팅으로 세계 곳곳에 빈 캔을 퍼뜨리고, 스포츠 스타와 대회를 후원하고, 결국엔 귀족 스포츠라 불리는 F1까지 진출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건 이거였다. 몇 해 전 태국 여행에서 마셨던 에너지 음료. 나는 그것을 카피 제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게 바로 원조였다.
내가 무심히 지나쳤던 캔 하나가, 알고 보니 세계적인 성공 신화의 시작이었다는 사실.

세상에는 이렇게 내가 모르고 있던 게 많다. 그것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일, 그것이야말로 재미있는 배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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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공한 PD들의 뒷이야기

나는 김태호 PD와 나영석 PD를 늘 ‘타고난 천재’라 생각했다. 무한도전, 1박 2일. 한국 예능을 상징하는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낸 주인공들. 늘 성공 가도만 달려온 줄 알았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이야기는 달랐다.
김태호 PD는 “무한도전은 유재석 전화번호 받으려고 들어간 프로그램이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무모한 도전>이라는 이미 망해가던 프로그램에 굳이 들어간 이유가, 단지 유재석과 함께할 기회를 만들고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화려한 전략도, 확신에 찬 기획도 없었다. 그냥 작은 인연 하나가 출발이었다.

나영석 PD는 한때 실내에서 한자 맞히는 예능을 기획했는데, 결과는 실패였다. 그 프로그램의 멤버들을 야외로 데리고 나간 게 바로 <1박 2일>의 시작이었다. ‘국민 예능’으로 불리며 시대를 장악했지만, 출발선은 실패와 시행착오였다.

더 놀라운 건 두 사람 모두 내향적인 성격 탓에 “PD 일이 나와 맞지 않는다”며 전직을 고민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화려한 성공 뒤에는 적성에 맞지 않아 흔들렸던 시간과 실패의 그림자가 있었다.

성공은 언제나 완성된 결과물만 보여주기에 화려하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걸 견디고 돌파한 사람만이 결국 ‘성공한 사람’으로 불리게 된다.


4. 조선과 이탈리아, 140년의 인연

뉴스에서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기념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140년일 수 있지? 해방 이후가 아니라? 역사를 가르치는 내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게 부끄럽게 다가왔다.

알고 보니 시작은 1884년이었다. 조선은 그 해 이탈리아 왕국과 정식으로 수교를 맺었다. 서양 열강과 차례로 외교 관계를 열던 때였지만, 우리는 흔히 미국이나 청나라와의 조약만 떠올리지, 이탈리아까지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 인연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일제강점기라는 거대한 단절 속에서 외교의 끈은 끊어졌고, 한동안 기억에서도 잊혔다. 하지만 한국전쟁 시기 이탈리아가 의료진을 파견하며 도움을 주었고, 1956년에는 대한민국과 이탈리아 공화국이 외교 관계를 다시 열었다. 그렇게 이어지고 끊기고 또다시 이어진 관계가 어느덧 140년을 채웠다는 사실은, 단순한 숫자를 넘어선 역사적 무게로 다가왔다.

역사를 가르치며 나는 늘 “배움은 끝나지 않는다”라고 말해왔지만, 정작 나 자신이 역사의 빈칸을 채우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이탈리아와의 140년은 내게 또 하나의 배움이었다. 교사가 역사를 가르친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는 사람도 여전히 배우며 살아간다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사실 말이다.


5. 올림픽, 원래는 프로 선수 출전 금지였다

지금은 올림픽에서 NBA 스타도, 프로 축구 선수도 마음껏 뛴다. 하지만 원래 올림픽은 철저히 아마추어만 출전할 수 있었다. 창시자인 쿠베르탱 남작은 “스포츠는 귀족적인 정신을 지닌 아마추어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는 올림픽에서 돈을 받거나 프로 계약을 맺은 선수는 출전할 수 없었다. 심지어 1912년 금메달리스트 짐 소프는 고등학교 시절 하급 리그에서 돈을 조금 받았다는 이유로 메달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는 무너졌다. 1980~90년대를 거치며 프로 선수들의 출전이 허용되었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드디어 NBA 드림팀이 등장했다.

나는 당연히 올림픽은 ‘최고의 선수들이 모이는 무대’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 세기 가까이 ‘최고의 선수들’은 의도적으로 배제됐던 것이다.


6. 피사의 사탑은 애초에 똑바로 지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피사의 사탑이 ‘기울어져 있는 탑’으로 유명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덜 알려진 사실이 있다. 애초에 완공되기도 전에 이미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173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2층 정도 쌓아 올린 순간부터 지반이 약해 한쪽으로 서서히 기울어졌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층을 올릴 때마다 반대쪽을 더 높게 쌓아 균형을 맞추려 했다. 결과적으로 탑은 S자처럼 휘어진 모습으로 완성됐다. 지금 우리가 보는 우아한 곡선은 사실 건축가들의 절박한 ‘땜질’의 흔적이다.

나는 피사의 사탑이 단순히 오랜 세월 탓에 기울어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처음부터 비뚤게 서 있었고, 그 비뚤어진 탑이 지금은 세계인의 발길을 끌어모으는 명물이 되었다. 실패작이 오히려 도시의 상징이 된 셈이다.


7. 교대와 교직, 그리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세상

중학생 때 형의 친구가 교대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땐 교대가 뭔지도 몰라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대학이라고 설명을 듣고는 ‘남자가 할 게 없어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막상 고3이 되어 진학을 고민할 때는 전혀 다른 현실이 내 앞에 있었다. 기업은 치열한 경쟁률에도 불구하고 정년을 지키기 어려웠고, “사오정”이라는 말처럼 40~50대 중반이면 회사를 떠나는 일이 흔했다. 반대로 교직은 안정적인 직장으로 여겨졌다.

교대가 뭔지도 몰랐던, 남자가 무슨 초등학교 선생님이냐며 비웃던 내가 교대에 진학하게 될 줄은 그때는 정말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평안함도 오래 가지 않았다. 아동학대법 시행 이후 교사는 법적 소송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고, 교권 침해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했던 ‘교사의 죽음’과 ‘정신과 치료를 받는 교사’의 이야기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반면 기업문화는 너무나 빠르게 바뀌면서 기업 실적이 나쁘면 우수수 잘려나가던 풍경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다. 교대에 진학하며 살아남았음에 안도했던 그 당시의 나는 이런 날이 도래할 것을 알지 못했다.


모르는 거 투성이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나

나는 모르는 게 너무나 많은 인간이다.

스리랑카, 베트남, 동티모르에서 살아보며 알게 된 건, 내가 불러온 이름이 사실과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스리랑카는 현지 발음에 가깝게 하면 ‘쓰리랑카’가 아니라 ‘슈리랑카’다. ‘슈리’는 ‘빛나는’이라는 뜻을 지닌다. 베트남은 ‘비엣(Viet)남’이고, 동티모르는 정식 국명으로 ‘티모르 레스떼(Timor-Leste)’라 불린다. 익숙하게 불러온 이름은 편의와 습관일 뿐, 진짜는 따로 있었다.


사랑도 그렇지 않았을까.
기나긴 갈망 끝에 만난 A와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 금세 멀어졌다. 친구 같은 편안함이 좋았던 B와는 연인의 감정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늦게 깨닫고 상처만 남겼다. 평생 갈 거라 믿었던 C와는 사소한 다툼 하나로 허무하게 끝났다.

흔하디 흔한 인연이라 여겼던 D는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잊히지 않았고, 한때는 세상 전부처럼 여겼던 E는 이제 흐릿한 추억일 뿐이다.


나는 여전히 모른다. 이름도, 사랑도, 그리고 나 자신도. 어쩌면, 모른 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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