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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msnghwn Sep 18. 2016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아버지의 방 한 켠에는 딱 한 편의 비디오 테입이 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 어느날 이 영화를 보면서 어쩌면 키팅 선생님이 아버지가 그려왔을 바람직한 어른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들에게 틀에 박힌 입시 교육이나 냉정한 현실만을 강요하지 않고 진짜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들과 가슴 뛰게하는 이상에 대해서도 읊어주는 그런 어른말입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제가 어떤 일을 하던 지지해주시고 응원하셨습니다. 설령 그게 의미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말이죠. 도전하는 것에 관대하셨다고 할까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는 점점 키팅 선생님의 모습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셨습니다. 영화 속에서, 닐은 배우가 되기를 갈망하지만 닐의 아버지는 아들이 의대에 진학하기를 바랍니다. 닐이 그토록 갈망하는 '연극'일을 '쓸데없는'일이라며 부정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제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에게 만큼은 키팅 '선생님'이 아닌 닐의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으셨던거죠. 소위 말하는 '안정된 직장'과 '풍족하진 않아도 남 눈치보지 않고 살 만큼의 생활'을 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냐 한다면, 사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식을 생각할 때 부모의 마음이란 아무래도 걱정이 대다수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키팅 선생님은 "틀리고 바보 같은 일일 지라도 시도를 해봐야 해"라고 말하며 네 삶에 너만의 시각을 가지고 맞서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 이미 본인들의 겪었을 '틀리고 바보 같은 일'과 '낭만만 가득한 비현실적인 일'을, 자식이 되풀이 하는 걸 지켜보는건 분명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키팅 선생님처럼 멋지고 낭만적인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계속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는거죠. "안정된 길로 가는 게 어떻겠니? 그런 험한 길보다는."하고요. 윤동주 시인의 아버지 또한 그가 시인이 되기 보다는 의대에 진학하기를 바랐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의 일화일 것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결말은 정말로 감동적이고 슬픈 장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슬픔의 원인이 되는 '나쁜'인물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그 결말은 삶에 대한 '시각'이, '입장'이 달라서 생긴 비극이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세상의 많은 부모와 자식은 서로 쉼없이 다투고 반목하지만, 대부분의 다툼은 결국 관점의 차이일뿐 목적 자체가 다르진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결국엔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을테니 말이죠. 지금은 '도전'을 외치며 낭만과 이상을 외치는 자식들도, 언젠간 누군가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되어 본인이 아닌 자식의 행복을 위해 '안정'을 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결국 답은 없습니다. 키팅 선생님이 옳다고도, 닐의 아버지가 옳다고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저 답이 없는 이 삶에서 비극을 막기 위해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곤 부모와 자식 서로간의 '대화'뿐이지 않을까 짐작해볼밖에요.




커버이미지 출처 - DAUM 영화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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