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은 거목이 되자
아이로부터 맺어진 인연이건 아니건 나와 비슷한 또래로 구성된 사람들을 만날 때면 빠지지 않고 하는 얘기가 있다. 바로 자녀 이야기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는 골고루 밥 잘 먹어요?', '밤에는 몇 시에 자요?', '어떤 거에 관심 있어요?', '이대로 건강하게만 자라줬으면 좋겠어요'등의 얘기를 서로 주고받았다면 이제 큰 아이가 학교 생활을 목전에 둔 7살이 되니 자연스럽게 교육 이야기에 대부분을 할애한다.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아이가 건강하게만 자라길 바라던 마음은 어느새 '이왕이면 남들보다 잘했으면', '똑똑한 아이로 자랐으면' 하는 희망을 가장한 엄마의 욕심이 내 마음 한편에 차지하고 있음을 느낀다.
베트남이 코로나 사정이 좋지 않아 학교에 가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면서 나는 아이들 교육을 일찌감치 홈스쿨링으로 전환했다. 영어 유치원에서 배운 내용이 어려웠다는 아이들 말에 교육 내용을 아이들 수준을 고려해 대폭 낮추고 하루에 할 수 있는 만큼 또는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추가하는 식으로 유연성 있게 구성했다. 공부시간과 공부 순서도 아이들이 정한다. 오전에는 스케이트를 타거나 놀이터에서 놀고 점심 식사 후 슬슬 공부책을 가져와 시작할 때도 많다. 외부의 기준이 아닌 아이들에게 맞추어 진행하니 무엇보다 아이들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어느 점이 부족한 지가 눈에 보였다. 그리고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힘도 생겼다. 엄마 도움 없이 컴퓨터를 조작하여 CD를 틀어 영어공부를 하고 한글책 필사를 하면서 한글 맞춤법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하지만 수업 구성이 유치원에서 하던 수업보다 다양하지 못하고 아이의 실력을 제3자의 눈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단점도 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아이들이 받고 있는 전문적인 교육 수준에 더욱 촉각이 세워졌다.
“역시 영어 유치원에 보내니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했어요”
“한국에는 어느 유명한 영어 선생님이 학원을 오픈했는데 자녀를 거기에 보내기 위해 대기가 장난 아니래요. 에세이 시험도 쳐야 하고.”
“언니, 우리 아이 초등학교 1학년 돼서 영어학원에서 에세지 시험 봤는데 그날 엄마들 난리 났잖아. 아이들 시험성적에 엄마들 희비가 엇갈리고. 무슨 대학 입학시험인 줄 알았다니깐.”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맞는지, 과연 외국이 아닌 한국 아이들의 현실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심지어 하노이에서 자녀를 국제학교에 보내다 한국에 돌아가 유명 영어학원에 등록한 지인은 '국제학교 다닐 때보다 한국에서 영어 실력이 훨씬 늘었어요'라고 할 정도다. 스파르타식으로 많은 양의 정보를 외우게 하고 또 시험을 치르고 시험을 못 보면 '난 못하는 사람'으로 찍혀 남과 비교하게 만드는 공부는 한국이 최고란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그런 이야기들이 그야말로 '그들만의 리그'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머릿속 한켠엔 '사교육으로 무장한 아이들 틈에서 우리 아이들도 잘 해낼 수 있을까?'란 걱정은 떠나지 않았다.
몇 년 전 동료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 아직도 마음속에 쓸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이게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이고 그 이야기를 듣고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 이유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녀가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둔 동료 선생님은 온 신경이 그곳으로 향해 있었다.
'과연 내 자녀는 어느 대학에 갈 것인가?'
이는 비단 당사자뿐 아니라 자녀의 친구들, 친구 부모들, 부모의 친구들, 학교 선생님 등 그 결과에 곁눈질을 하며 궁금증을 내비치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닐 거다. 시 쓰는 걸 좋아한다는 선생님 자녀는 다행히도 수시로 원하는 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바로 축하인사를 건넸다.
“선생님 축하드려요. 이제 한시름 놓으시겠어요.”
“이제 시작이네요. 하나는 끝났지만 아직 둘이나 더 이 과정을 치러야 해요. 아휴 아이들 어렸을 때가 제일 행복했던 거 같아요. 대학 이게 뭐라고.”
선생님의 깊은 회환이 섞인 말속에서는 그동안 자녀와 함께 대학이라는 문턱을 넘기 위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데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어릴 때는 누가 잘하고 못하고 이런 게 없잖아요. 그 차이도 별로 없고. 그래서 엄마들끼리 대등한 관계가 유지되는데 대학이 정해지면 이게 나뉘어요. 명문대에 입학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기세 등등하고 어딜 가나 주목받고 사람들이 대접해줘요. 아이들 학교 서열에 따라 부모들 서열이 정해져요. 이거 진짜 그래요.”
“네? 정말요?”
난 그 이야기를 듣고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갔냐 보다 어느 대학을 간 게 더 중요하다니. 아이들 대학 서열에 따라 부모 서열도 정해진다니. 물론 아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간 일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공부를 좋아하건 아니건 그 아이는 힘듦을 참고 끈기 있게 공부했을 것이고 대학에서 필요한 인재임을 증명했기에 당당히 명문대에 입학한 거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두터운 우리나라에선 자녀가 좋은 대학에 입학한 일은 곧 '부모가 자녀를 잘 키워서'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이 대학에 따라 부모의 자식 농사 능력도 함께 평가받고 있는 셈이다. 그때 느낀 씁쓸함은 아이들 교육 이야기를 할 때면 이따금씩 떠올랐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사교육 없이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언니가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엄마는 주변에 많이 흔들려요. 다들 무슨 학원 다니니, 아이에게 뭐 시키니 엄마들이 이런 말만 하거든요. 난 그런 모임에 나가면 귀 막고 입도 꾹 닫고 있어요. 엄마가 흔들리지 않아야 아이도 흔들리지 않거든요.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내 길대로 가는 뚝심이 필요해요."
주변에서 무엇을 하건 나는 지금 아이들이 하고 있는 교육 수준에 만족하기로 했다. 전문적인 교육 수준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하고 싶은 교재로 조금씩 해나가며 공부하는 법을 스스로 깨치고 책을 통해 세상은 넓고 신기한 것도 많아 '세상은 참 재미있다'를 깨닫는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에겐 필요한 건 자신들을 믿어주고 힘들 때마다 기대어 쉴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다. 부모의 역할, 나의 역할은 바로 흔들리지 않은 거목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