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노이에 온 이유

그렇게 나는 하노이를 만나다

교사들에게 12월은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를 작성하고 일 년동안 정들었던 학생들과 아름다운 작별을 준비해야 한다. 동시에 새학년 계획도 준비해야 한다. 이래저래 마음이 분주한 달이다.

2019년을 코앞에 둔 12월 그날은 희망하는 새 학년과 업무를 써서 교감선생님께 제출하는 날이었다. 동학년 선생님과 같이 5학년 담임을 희망 학년으로 적어내기 직전,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 나 어쩌면 베트남으로 발령날 것 같아.”

“뭐라고? 베트남?"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베트남에 가게 될 확률이 높아. 나갈 차례가 되기도 했고 이번 아니면 언제 나가게 될지 몰라.”

남편은 건설사 해외영업파트에서 일하고 있어 몇 년에 한 번씩 해외 근무를 해야 했다. 2014년 쿠웨이트 근무 후 5년 만에 해외 근무 차례가 돌아온 거다. 결혼하고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거기 좀 살기 불편한 나라 아니야?”

나도 모르게 기존에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이 튀어나왔다. ‘베트남’이란 나라 이름과 수도가 '하노이'라는 것만 들어봤지 그곳에 대한 정보는 전무한 상태였다. 오직 아오자이 입은 여인이 끝이 뾰족한 둥근 모자(이 모자를 '농'이라 불린다는 걸 여기 와서 알았다)를 쓰고 있는 모습만 아른거렸다.

“이 사람이 뭘 모르네. 내가 가는 곳은 하노이 야. 여긴 도시라서 서로 가려고 줄 서는 곳이야. 살기가 얼마나 좋다고”


남편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를 다그치듯 내게 말했다. 그렇다. 동료들은 인도네시아, 카타르, 쿠웨이트, 인도 등으로 발령 나는 와중에 하노이는 가족과 함께 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하노이는 한국에서 비행기로 5시간이면 갈 수 있어 물리적 거리도 짧은 편이다. 무엇보다 베트남은 한국에 우호적인 나라다. 베트남 축구 대표팀 감독인 박항서 감독님이 한참 베트남 축구의 위상을 높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이리 휘청 저리 휘청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대한민국에서 5살, 3살 아이의 워킹맘으로 사는 건 그냥 나 자신을 다 희생하는 일이다. 하루 일과 중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0분도 없었다(물론 나중에 이것도 핑계라는 걸 알았다). 아침 7시 20분이 되면 아이를 억지로 깨운다. 대충 세수시키고 옷 입히고 뭐라도 입에 쥐어준다. 7시 50분에 차에 태워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바로 학교로 향한다. 퇴근 후 아이들 픽업해서 집 근처 놀이터에서 한 시간 논다. 집에 가면 저녁 준비하고 먹고 씻기고 바로 잔다. 이 일상이 매일 반복되었다. 이런 생활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항상 1등으로 유치원에 가는 아이들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 라도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고민거리가 쓰나미처럼 내 머릿속에 휘몰아치며 들어왔다. 해외에서 몇 년 동안 사는 건 며칠 갔다 돌아오는 여행과는 준비과정 자체가 달랐다. 해외살이를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생각했다. 학교는 언제까지 다니고 휴직할지,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어떻게 처리할지, 짐은 뭘 가지고 가야 할지, 아이들 학교는 어디로 보낼지. 고민은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심지어 '2-3년의 공백 후 다시 학교로 돌아오면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다시 신규교사처럼 되는 건 아닐까?'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우선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학교에 내 거취 문제를 정확히 알려야 했다. 당장 휴직할 수 없기에 한 학기를 다니고 휴직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5학년 담임’을 희망 학년으로 적어낼 수 없었다. 담임이 중간에 바뀌는 상황은 학교, 학부모, 학생 모두가 꺼려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희망 학년 제출서에 ‘담임’을 ‘전담교사’로 바꾸어 제출했다(나중에 학교 사정상 전담교사에서 다시 5학년 담임교사로 바뀌었다). 결국 나는 1학기 근무 후 3년간 휴직할 수 있는 동반 휴직계를 제출했다.


해외 생활은 처음이기에 기대도 되었다. 새로운 곳에 사는 건 나를 새롭게 발견할 기회다. 그동안 '집-학교-육아'의 틀에 갇혀 있던 나를 꺼내볼 차례였다. 새로운 생활을 하면 새로운 경험들을 마주하고 그 경험 속에서 인생의 다양함과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새로운 생각이 생겨 내 방식만이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아집이었음을 알게 된다. 하노이에 있는 동안 나를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해봤다. 우선 내 내면을 채우기 위해 다양한 책을 읽기로 했다. 한국 책을 쉽게 구할 수 없으므로 E-BOOK을 읽기로 결정했다. 당장 E-BOOK 단말기를 구입하고 사용방법을 익혔다. 이 조그만 단말기를 통해 더 큰 세상을 경험할 생각에 나는 이미 들떠있었다. 이렇게 하노이는 조그만 박스에 갇혀 있던 나를 꺼내 줄 트리거가 되었다.


남편은 발령 얘기가 나오고 두 달 후인 3월, 홀로 하노이 비행길에 올랐다. 난 그날도 출근을 해야 했기에 새벽에 짧은 인사를 나누고 그를 보내줬다. 결혼 후 이렇게 남편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었다.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남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남편의 옷들이 채워졌던 자리에는 공허함이 대신 채워졌고 칫솔꽂이에 나란히 놓여있던 그의 칫솔 대신 그리움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빈자리는 주말이 되면 2배 이상 더 커졌다. 아빠와 함께 여기저기 놀러 가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은 점점 집에서 노는 날이 많아졌다. 아빠와 몸을 부딪히면 놀던 놀이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기특하게도 아이들은 아빠 없는 생활에 점점 적응해갔다.


남편은 그사이 홀로 하노이 생활을 잘 꾸려갔다. 그 기간 동안 가족들이 살게 될 집, 아이들 학교를 알아보며 나름 바쁜 게 지냈다. 나도 한국에서 일하느라 아이들 돌보느라 바빴기 때문에 현지에서 알아보고 직접 둘러보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생각해 남편이 직접 나섰다. 남편은 주말이면 집을 보러 다녔고 집구석구석을 사진 찍어 내게 전송해줬다. 꼭 이 집을 얻기 위함보다는 '이 아파트는 대충 이런 구조다', '이 아파트 주변은 이렇다'라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국제 학교 입학 준비는 복잡했다. 아이들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 알아봐야 했고 입학 대기를 먼저 신청해놔야 인터뷰 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각자 한국에서 하노이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차근차근 해내며 새로운 생활을 준비해 갔다.

2019년 8월 20일. 드디어 새로운 곳으로 발을 딛는 날이다. 아이들과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공항 갈 준비로 분주했다. 들뜬 아이들과는 달리 내 신경은 온통 친정 부모님을 향해 있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으셨지만 앞으로 몇 년 동안 딸과 손주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섭섭함을 나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엄마, 아빠, 딸 있을 때 하노이에 한 번 놀러 오세요"

"그래. 한 번 갈게. 항상 몸조심하고."

"내 걱정은 말고. 엄마, 아빠 건강 신경 쓰세요."


내 눈은 한 살이라도 덜 늙으신 엄마 아빠 모습을 담기 바빴다. 몇 년 후에 봐도 다시 이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애써 참은 눈물이 쏟아질 찰나 나는 입국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 마음은 그리움, 서운함, 기대감, 희망 등이 마구 뒤섞여 오묘해졌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오묘한 빛깔을 밝고 선명한 빛깔로 바꾸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39세의 나이에 하노이라는 새로운 출발 길에 들어섰다. 하노이가 기회의 땅이 될 거란 희망을 안고, 걱정보단 설렘을 간직한 체 그렇게 하노이 생활을 시작되었다.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하노이 생활은 희망 가득한 밝은 빛깔로 현재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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