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디가 아닌 김삼순이 되고 싶다
글쓰기는 감정 소통창구
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Apr 15. 2021
지금은 드라마를 보지 않지만 결혼 전에 난 드라마 광이었다. 일일 드라마에서부터 미니시리즈, 주말연속극 등 안 빠지고 몇 편을 연달아 챙겨볼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여주인공에 빙의돼 가슴 아픈 사랑을 했다가 남자 주인공이 너무 멋있어 넋 놓고 보기도 하고 조연들의 감초 연기에 웃기도 했다. 그러면 한 시간은 순식간 지나간다.
내 인생 드라마를 뽑자면 2005년도에 방영된 김선아, 현빈 주연의 <내 이름은 김삼순>이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회식을 하다가도 김삼순이 하는 밤 10시 전에는 어김없이 들어와 TV 앞에 앉아 그들과 함께했다. 친한 동료에게 "어제 김삼순 봤어?"라며 운을 띄우고 그들과 김삼순에 대한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운 시절이었다.
김삼순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가 종로에 있었다. 회사 근처로 외근을 나갔다 온 같은 부서 언니가 “나 법원 앞에서 김선아 봤어”하며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회사 근처에 있는 법원 앞에서 <내 이름은 김삼순> 촬영을 했었나 보다. 드라마 속에서 김선아가 '김삼순'이란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 다른 이름으로 바꾸려고 법원에 간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 촬영 현장을 본 언니는 바로 코 앞에서 김선아를 찍었다. 드라마의 엄청난 팬이었던 나는 실제로 촬영 현장을 못 봐서 아쉬운 마음을 그 사진 한 장으로 달래곤 했다. TV 속 모습 그대로 김선아는 너무 예뻤다. 김선아의 실물을 본 언니는 “실제로 봤는데 정말 날씬해” 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이 당시 김선아는 김삼순 역할을 위해 자기 몸무게보다 10kg 정도를 일부러 찌었다고 했다. 10kg을 쪘는데도 실제로 보면 날씬해 보인다니 ‘역시 연예인은 연예인이다’ 라고 생각했다.
<내 이름은 김삼순>도 어찌 보면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재벌남과 평범한 여자의 뻔한 사랑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순전히 김선아가 맡은 ‘김삼순’이란 캐릭터 때문이다. 보통 드라마 여주인공들은 예쁜 건 기본이고 착하고, 남자들에게 인기도 많다. 순진해서 악녀에게 당하기도 하지만 외로워도 슬퍼도 언제나 어려움을 딛고 우뚝 일어서는 캔디 같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삼순이는 달랐다. 예쁘지도 않고(실제론 예쁘지만), 남자들에게 인기도 없고, 능력도 없는 나와 같은 평범한 여자였다.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긴 하지만 실직에 좌절하기도 하고 힘든 감정을 마음껏 표현한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기억나는 장면은 고속버스 터미널에 앉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 모습이다. 그녀는 그동안 못했던 말들, 지금 현재 느끼고 있는 가슴 아픈 감정들을 아빠에게 다 털어놓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럼 하늘에서 듣고 있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리며 딸이 힘들지 않게 위로해 준다.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고 나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삼순이가 대신 표현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 삼순이와 같이 감정을 잘 표현하고 살았나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며 산다. 기쁠 때도 있고 슬프고 화날 때도 있고 아쉬움과 그리움이 남을 때도 있다. 긍정적인 감정을 표현하기엔 그나마 낫다. 표현할수록 나도 기쁘고 남도 기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힘들고, 슬프고, 화나는 이런 마이너 한 감정 표출에 나는 서툴다. 잘못된 감정도 아닌데도 표현을 함부로 하면 안 될 것 같은 괜히 죄스런 마음이 든다.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까 봐 ‘그냥 속에 넣어두자’란 생각을 했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이 상황에서 화를 내면 주변에서 나를 이상하게 볼까 봐, 그 사람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질까 봐 화를 참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감정들은 신기하게 사라지지 않고 가슴에 하나씩 쌓여 나를 옮아 매고 위축되게 만든다.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는 감정이 폭발하여 갈등이 만들어지는 부분이다. 이런 갈등은 보통 마이너 한 감정에서 출발한다. 누군가의 시기, 질투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한순간의 서운한 감정이 폭발하기도 한다. 그 순간 우리는 모두 숨죽여 그들의 감정에 몰입한다. 그리고 인물들끼리 서로 소리 지르고 화낼 때 화면은 갑자기 멈추고 엔딩 음악이 흐른다. 연출가의 노림수다. 시청자에게 '왜 하필 이때 끝나, 다음에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란 아쉬움을 적당히 남겨야 시청률이 꾸준히 올라가는 걸 아는 거다. 이때 제대로 감정 표현을 못하면 우리는 그 연기자에게 ‘발연기한다’라며 손가락질을 한다.
혹시 나도 ‘내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마이너 한 감정을 제때 표현하지 못하고 발연기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언제나 남 앞에서는 밝게 보이려 애쓰고 힘든 모습은 숨기려 했다. 겉으로 보기엔 캔디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내 속에는 김삼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속이 문드러져도 마음속으로만 울어대고 표출하지 않았다. 이제는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캔디보다 힘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김삼순이 되고 싶다.
나를 옮아둔 마이너 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김삼순이 되기 위해, 오늘도 이곳에 글을 쓴다. 내 감정의 소통 창구는 글쓰기다. 글쓰기를 통해 내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멀리 날려 버린다. 그럼 내 마음속에는 공허함이 아닌 한층 성숙된 단단함이 자리 잡는다. 이곳 글쓰기 공간에서만큼은 난 캔디가 아닌 김삼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