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 꾸준함의 힘
20대 때 가끔 일기를 쓰던 시절 버킷 리스트를 적은 적이 있었다. 내가 이번 인생을 살면서 꼭 이루고 싶은 것 3가지. 그 3가지는 바로 ‘운전하기, 수영하기, 영어회화능력 갖추기’다.
40대가 된 지금 이룬 것은 ‘운전하기’ 한 가지뿐. ‘수영하기’는 도전 중에 코로나로 때문에 잠시 멈춘 상태고 영어 능력 갖추기는 지금도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는 목표다.
“Hello, How are you today?”
“I’m fine. Thank you. And you?”
“I’m fine too.”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영어를 배웠다. ABCD 노래를 불러보고 외우고 알파벳 대문자, 소문자로 학교에서 시험을 봤다. 다음으로 ‘Nice to meet you’로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면 위에 적힌 표현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는 방법을 배웠다. 우스갯소리로 외국인이 ‘How are you today?’라고 물으면 한국인이라면 어김없이 ‘I’m fine. Thank you. And you?’만 기계적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말로 난 그 표현만 주야장천 외웠고 그 외에 다른 표현을 배워보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 영어 시간은 그야말로 공포였다. 영어 선생님 손에는 항상 3가지가 들려 있었다. 영어 교과서, 회초리, 번호가 적힌 통. 영어 지문이 녹음된 테이프를 한 번 들은 후 우리는 열심히 한국말로 해석했다. 선생님이 번호가 적힌 통을 흔드는 소리는 우리 반 모두를 숨 막히게 했다. 깡통 속에서 번호표가 열심히 춤을 추며 부딪치는 소리는 고요한 적막 속에 더 크게 퍼져갔다. 그 시간에는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불행히도 당첨된 학생은 교탁 앞으로 나가 문장을 읽고 열심히 한국어로 해석을 했고 발음이 틀렸거나 해석이 잘못되면 선생님은 말없이 회초리를 잡으셨다. 그리고 이어서 단어 시험이 이어졌다. 영어능력의 평가는 주로 '얼마나 해석을 잘하느냐'로 판가름됐다. 당연히 영어식 사고가 생길 수 없고 단어 뜻은 한 두 가지 아는 걸로 한정됐다. 난 그야말로 전형적인 한국식 주입식 영어 교육의 피해자였다.
성인이 되어서는 고등학교 때 해왔던 해석, 문법 위주 공부 방식을 탈피하고 좀 더 실용적인 영어 회화를 배워보고 싶었다. 일부로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학원은 찾아다니지 않았다. 학원을 다닐 때는 실력이 느는 것 같으나 다니지 않으면 다시 도루묵이 되는 걸 알기에 접근성이 좋으면서 꾸준히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래서 20살 때부터 새벽 6시에 방송되는 ‘굿모닝 팝스’를 거의 10년 동안 청취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크게 3가지 코너로 나눠서 공부했다. 팝송에 나오는 표현 배우기, 주제에 맞는 짤막한 대화문 연습하기, 영화 속 표현 배우기. 이를 배우면 난 하루 종일 입에 달라붙도록 말하기 연습을 했다. 실제 외국인이 앞에 있다 생각했고 내가 그 영화배우라 생각하고 똑같이 따라 했다. 그래서 내 영어 공부 장소는 대부분 집이다. 미친 듯이 연기하듯 말해야 하니 아무도 없는 곳이 적당했다. 방송을 듣지 않는 지금도 가끔 그때 배운 표현이 생각날 정도니 꽤 소득이 있었던 공부 방법이다. 하지만 이전에 배운 표현은 점점 내 기억 속에서 지워졌고 외국인 앞에서 써야 할 순간에는 정작 생각나지 않았다. 내 기억력에 의존하는 공부 방법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방법을 이어오다 예전에 배운 표현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반복해서 하다 보면 언젠가는 외워지겠지’라는 마음으로 다시 1강부터 정주행 하기로 한 것이다. 난 영어 회화를 알려주는 유튜브 방송을 보고 선생님이 알려주는 표현을 공책에 열심히 적고 말해보며 연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방에 들어와 말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한국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방법 말고 그냥 영어 프로그램을 계속 봤으면 좋겠어. 《프렌즈》같은 미드 말이야. 이런 표현은 까먹으면 소용없잖아.”
“그럼 무슨 뜻인지 잘 안 들려서 재미없어.”
“그래도 들어. 안 들려도 그냥 들어봐. 한번 듣고 두 번 듣고 세 번 들어봐. 듣다 보면 들릴 때가 있어. 그렇게 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이런 표현을 쓰는구나’ 아는 거야. 무조건 외우면서 하는 건 한계가 있어. 아이들이 보는 쉬운 것부터 시작해.”
“당신은 중학교 때 미국 가서 처음에 어떻게 공부했어?”
“공부가 뭐야. 그냥 부딪쳤지. ABCD도 모르고 갔으니까. 처음에는 하나도 안 들렸어. 난 거의 벙어리로 지냈어. 그러다가 몇 개월 지나니 걔네가 내 욕하는 게 들리더라. 나도 똑같이 욕 해줬지 머.”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면서 머릿속에 몇몇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만났던 한국어를 잘하는 베트남인들이다. 그들에게 한국어는 외국어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노력이 들어가야 구사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의 한국어 공부방법이 궁금했다. 물으면 그들의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한국 방송 봤어요. 특히 한국 드라마요. 꾸준히 봤어요.”
그동안 나는 꾸준한 듣기를 하지 않고 단편적인 표현만을 외워댔으니 어쩌면 한계에 부딪치는 게 당연해 보였다. 영어를 공부로만 즉 열심히 쓰고, 외우고, 해석하기로 접근했던 나. 듣기부터 다시 하기로 했다. 영어를 처음 배울 때의 자세로 많이 듣기로. 많이 들어야 말로 연결될 수 있으니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때까지 꾸준히 듣기로. 이 방법은 우리 아이들 영어교육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이 있다. '1만 시간 동안 하고자 하는 일에 열정을 다하면 성공한다'는 이 법칙을 영어에 접목해보면 이렇다. ‘하루에 3시간씩 10년 동안 꾸준히 영어에 노출하면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할 수 있다.’ 오래 걸리더라도 꾸준히 항아리에 물을 차곡차곡 채우면 언젠가는 차고 넘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요즘 내 영어 말하기의 롤 모델은 《Max and Ruby》의 Ruby다. 언젠가 Ruby처럼 말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