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배우 이야기

어느새 내게로 스며들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를 굳이 꼽자면 <내 이름은 김삼순>과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이다(이렇게 보니 두 드라마도 모두 옛날 작품이다). 두 드라마를 통해 얻은 소득이 있다면 <내 이름은 김삼순>은 20대 시절의 현빈을 알게 해 준 작품이고 <응팔>은 내가 가장 힘들었던 2015년, 그러니깐 첫째를 낳고 육아 전선에 뛰어든 지 얼마 안돼 초보 엄마라는 딱지가 붙었을 때 육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일조해준 점이다.


처음에 <응팔>이 한다고 했을 때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기존의 응답하라 시리즈가 워낙 성공했던 터라 3번째 시리즈까지 성공할지 미지수였고 드라마 배경이 된 1988년도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으로 어릴 때라 그때의 추억이 잘 떠오르지 않아 공감되지 않을 것 같았다(반면 전작들은 모두 90년대를 바탕으로 해서 상당히 공감하면서 봤다).


기대감 없이 마주해서일까? <응팔>은 내게 기대 이상이었다. 여자 주인공인 혜리는 실제 성격을 보듯 사랑스럽고 때론 철없는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연기했고, 동네 친구인 박보검, 고경표, 류준열, 이동휘의 실제 같은 우정, 뽀글이 파마를 한 엄마들의 80-90년대 패션 스타일 등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작품은 '나도 저 똑단발했었는데', '우리 엄마도 저 뽀글이 머리 했는데', '맞아 저 당시에는 저 패션이 유행이었지' 라며 내 기억 한 구석에 고이 보관했던 옛 상자를 활짝 열어 젖히기에 충분했다. BGM으로 깔리는 노래들도 거의 기억나는 걸 보면 나는 그 당시 TV를 상당히 끼고 살았었나 보다.


내가 응팔을 통해 얻은 수확은 박보검을 알게 된 것도 류준열, 고경표를 알게 된 것도 아니다. 거의 3분 남짓 단역으로 등장한 그를 알게 된 점이다. 드라마가 끝난 지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깊이 남아 있는 장면은 그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성보라의 남자 친구인 종훈은 그녀의 친구와 수련회에서 키스를 하게 된다. 보라의 친구가 그 사실을 보라에게 고백했고 종훈은 보라의 집으로 찾아온다. 처음에는 실수했다고 싹싹 빌었고 보라가 받아주지 않자 갑자기 돌변하며 말한다.


종훈: 넌 뭐가 그리 잘났냐? 완벽해? 실수 안 해? …(중략)… 넌 감정이란 게 있냐? 난 너처럼 차갑고 인정머리 없는 애 처음 봐. 됐고. 나도 너 만나면서 숨 막혀서 죽는 줄 알았어. 이건 여자 친구가 아니라 얼음덩어리랑 사귀는 것 같아. 너 그 성질머리 못 고치면 아무도 못 만나. 알아? 너 진짜 여자로서 최악이야.


속사포처럼 일방적으로 막말을 내뱉고 그는 이내 가방을 들고 쌩하니 가버린다. 남아 있는 성보라는 주저앉아 울고 그때 선우가 나타나 울고 있는 성보라를 위로해준다.


넌 진짜 여자로서 최악이야. 이 마지막 말은 브라운관을 뚫고 나에게 날아와 가슴속 깊이 비수가 되어 박혀 버렸다. 자기가 잘못한 상황에서 오히려 상대방에게 화내는 표정과 쏘아 대는 말투는 진짜로 성보라에게 아니 나에게 하는 것처럼 꽤나 인상 깊게 다가왔다. 내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든 저 남자 누구일까? 저 남자 진짜 못되게 연기 잘한다. 이는 내가 그 배우를 처음 만났을 때 들은 느낌이다. 평범한(?) 얼굴로 주변에 한 명쯤 있을 법한 인물을 실감 나게 연기하는 그 배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배우는 바로 ‘동주’에서 송몽규 역을 맡은 ‘박정민’이란 배우였다. 영화 <동주> 촬영을 마치고 쉬고 있는데 응팔 감독님께서 특별 출연을 부탁해서 출연하게 됐다고 한다. 그전까지 그가 수많은 단역배우 중 한 명인 줄 알았는데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니. 실제로 그는 이 역할을 맡고 ‘3분 등장에 악플 3,000개를 받았다’라고 할 만큼 그는 못된 남자 종훈 그 자체였고 그 장면은 아직까지 내 뇌리 속에 깊이 박혀 있다. 그 후로 가끔 그에 대한 소식이 인터넷에서 들려올 때도 ‘아 성보라 전 남자 친구 역 맡은 그 배우’라는 타이틀로 내 추억을 소환하는 배우였다. 딱 거기까지 였다. 따로 작품을 찾아보지도 않았고 다른 작품 속 모습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나에게 박정민은 성보라의 전 남자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깐.


내가 그를 두 번째로 알게 된 계기는 우연히 그가 쓴 <쓸만한 인간>이란 책을 보고부터다. 뭐야 성보라 전 남자 친구가 책도 쓰는 사람이었어? 단숨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 책을 통해 tv나 영화관에 등장하는 ‘배우’ 박정민이 아닌 ‘인간’ 박정민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뭐랄까. 내가 인간적으로 알고 있는 친구가 알고 보니 유명한 영화 배우였다랄까. 아무튼 박정민은 영화 속 주인공이기 전에 tv에서 잠깐 봤던 글 쓰는 사람으로 내게 다가왔다. 학창 시절 존재감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공부는 꽤 잘한 학생(실제로 책 속에서 박정민은 자신은 학창 시절 존재감이 없었다고 말함), 처음 극단에 들어가 전단지를 붙이며 연기자의 꿈을 키우게 된 사연, 2013년 영화 매거진 <topclass>에 글을 연재한 계기, 강박증세의 고백, 영화를 찍으면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 부모님과의 일화 등을 솔직한 필체로 말하듯이 써내려 갔다.


내가 만난 그의 모습은 보통의 30대와 같이 평범하고 어릴 적 친구와 다소 욕이 섞인 거침없는 대화를 하고 소박하며 많은 독서를 통해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그런 청년이었다. 그는 책 속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작가는 아니다. 글씨만 쓸 줄 아는 그저 평범한 당신의 옆집 남자. 가끔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나오기도 한다’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책 속에서 ‘제발 책 좀 읽읍시다’라고 외친다. 영화배우가 영화를 보라는 말 대신 책을 읽으라 하니 신기하면서도 신선했다. 알고 보니 친구와 함께 '책과 밤낮'이란 책방을 운영할 정도로 책에 대한 애착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아쉽게도 며칠 전에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책방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는 배우이기 전에 책 읽기를 좋아하는 생각 깊은 참 괜찮은 청년으로 내게로 다가오는 중이다.


우리는 보통 ‘배우’라고 하면 잘 생기고 예쁘고 남들보다 눈에 띄게 튀어야 하고 끼가 많아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걸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나는 배우 박정민이 갖은 무기는 바로 그의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역할을 해도 어색하거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고 그전에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생각나지 않게 하는 그런 얼굴말이다. 이제는 그런 매력을 가진 ‘배우’ 박정민을 하나씩 만나보고 싶다. 그가 출연한 작품을 하나씩 정주행 해야지. <동주>부터 시작해보자.


**사진 출처: <쓸 만한 인간> 책 표지

이전 03화내 MBTI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