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지기 천 고지가 넘는 큰 산에 오르면 두 계절을 만나게 된다.
5월 산행이지만 이상기온으로 벌써 한 여름이 시작된 것 같다. 산 중턱에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으면 4월의 봄바람이 밀려오고, 옷을 껴 입고 싶은 한기 또한 몰려온다. 숨이 넘어갈듯한 가파른 산행은 돌계단에 무수한 땀방울을 남기고, 8월 무더운 어느 날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3~4분의 휴식으로 이내 3월의 서늘함이 찾아온다. 초목들만 살아남은 정상에선 10월의 가을바람이 성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청봉을 500여 미터를 남겨 놓고 성대한 소낙비를 만났다. 피할 수 없는 비였고 한 겹을 껴 입은 바람막이도 사선으로 퍼붓는 소나기에는 무용지물이었다. 몹시 추웠고 태풍을 만난 듯 몸이 떠내려 갈 것 같다. 중청 휴게소가 없었다면 젖은 몸은 마를 길 없어 체온이 급강하했을 것이다.
이번 산행은 오색 탐방관리소에서 대청봉을 지나 설악동에 이르는 산악 여행이다. 검은 새벽하늘에는 조각달조차 걸려있지 않았고, 산객들의 헤드랜턴만이 반짝반짝 빛날 뿐이다. 계곡은 가물었고 조용했다. 가파른 언덕이라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모르겠다. 목도리에 두른 수건은 첫 구간부터 땀 물로 가득하다.
엊그제 같은데 설악산 산행은 벌써 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포토앨범에서 제공하는 6년 전 설악산 사진을 보니 모든 분들이 지금보다 더 핸섬하고 젊어 보이는 것 같다. 매일 보는 거울 앞에선 세월을 알 수 없지만 우연히 들춰본 졸업앨범에서 가을 낙엽을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저녁 9시, 잠실종합운동장에 도착했다. 차에 짐을 실었으니 주차장에 들어가야 했다. 경찰이 바리케이트를 쳐놓고 만차라 못 들어간다고 한다. 야구경기가 있었고, 주 경기장에는 인디밴드의 공연으로 운동장 주변은 매우 번잡했다. 우여곡절 끝에 북문으로 들어갔고 수신호를 해주는 진행요원의 도움으로 수영장 건물 주차장에 파킹할 수 있었다. 9시 20분, 시간이 많이 남는다. 10시부터 선후배님께서 오셨고 짐도 만남의 장소인 6번 출구 앞에 내려놓았다. 우리가 타고 갈 버스도 갓길에 세우지 못해 한참을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3시 10분, 오색탐방소. 조용하기만 하다. 오색에서 대청봉까지 이어지는 급경사 언덕... 등산객들은 '안단테'처럼 고개를 숙인 채 쉬엄쉬엄 걷는다. 3분의 1도 올라가지 않았건만 쇳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온다. 동이 트면서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새소리도 정겹고 바람도 정겹지만 내 몸은 정겹지 않다.
오랜만에 와보는 대청봉이다. 칼바람도 심했지만 소나기가 빰을 사정없이 때렸다. 춥고 바람도 세서 대충 사진을 찍고 중청으로 내려왔다. 중청까지 가는 700여 미터도 소낙비로 인해 힘들 뿐이다. 중청에서 젖은 옷을 갈아입었더니 한결 편안했다. 라면도 먹고, 선배님이 가져오신 수박도 먹었으니 호강이 따로 없다.
하신길은 지루하다. 아름다운 경치도 오래 보면 싫증이 난다. 천불동 계곡을 지나 양폭산장에서 족욕을 했다. 발바닥이 풀리는 것 같다. 설악동으로 내려오는 길에 그렇게 많던 동동주 파전 파는 식당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신흥사에서 모두 철거를 했다고 한다. 설악동 매표소까지 걸어가는 평지도 힘들다. 아무래도 운동부족이 분명하다. 택시를 타고 내려와 설악동 모텔에 도착했다. 짐승에서 인간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니 한결 몸이 풀린다. 잠 한숨 못 잤지만 피로가 가시는 것 같다. 험난한 공룡능선 산행을 마친 선후배님들까지 안전사고 없이 무사히 내려오셨다.
동명항 횟집에 도착했고 즐거운 뒤풀이가 이어졌다. 선후배님과의 뒤풀이는 보약이다. 그룹별로 산행소감을 들었고 웃고 떠들다 보니 파도 소리도 묻혀진다. 속초의 밤의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