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일런
[구석구석 트레일런 대회 참가 후기]
새벽 네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집에 있었다면 편안한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다. 물에 흠뻑젖은 솜털마냥 무겁고 피곤한 몸을 털어내고 일어났다. 깊은 가을 새벽, 일요일. 사방은 어둡지만 약간의 긴장감으로 추위는 없었다.
가을바람을 타고 이슬이 풀잎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플라타너스 나뭇잎도 천사 유치원 앞 인도를 두껍게 덥기 시작했다. 아직은 동이 트지 않았다. 영익이가 운전하는 자가용 뒷좌석에 한구형님과 동승했다. 대회장은 시골 장날의 풍경처럼 설레고 신나는 음악에 흥이 돋는다. 난생 처음 참가하는 트레일런 대회라 데이트 신청을 받은 사춘기 계집아이처럼 내 마음도 한 없이 들떠있다.
휘문마라톤 교우회 7명은 6월부터 구석구석 트레일방을 만들었다.
동기 한명과 선배님 다섯분 한명의 후배님이 이 방의 구성원이다. 후배가 제안했던 대회에 모든 분들이 선뜩 응했다. 마라톤이 좋아 학교 선후배로 만난 분들이라 끈끈하고 구력 또한 어느 동호회 못지 않게 노련하다.
아침 7시. 출발을 알리는 부부젤라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몽골 울트라 마라톤에서 참으로 많이 접했던 친근한 신호다. 출발신호에 맞춰 달려나갔다. 광화문 사거리를 건넜고 사직공원을 거쳐 어느새 강북삼성병원을 끼고 홍난파 기념관으로 내 달리고 있었다. 출발 1~2키로 정도 지점이라 선수들 모두 신이 나는 것 같다. 얼굴에는 어린아이 같은 웃음 꽃이 한가득이다.
수백 명이 길게 늘어선 행렬은 인왕산 숲길을 환하게 열고 있었다. 가파른 언덕이 시작되는 지점이라 서로가 말을 아꼈다. 스틱을 찍고 달리는 선수,언덕을 빠르게 걷는 선수들의 뒷모습은 비트를 파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공비들의 모습처럼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선수들은 강북지역을 구석구석 달렸고 동 단위 행정구역을 빠르게 넘나들었다. 우리가 달리는 길은 끝없이 이어졌고 산 허리를 갈라 생긴 도로와 동네 언덕은 전신주에 걸려있는 줄처럼 우리를 길게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 구름한점 없는 푸른 하늘에도 붉은 태양이 우리를 내 비추기 시작했다. 하늘은 차지만 맑았고, 가을 빛은 무심하게 내 눈을 찔렀다. 팔각정 언덕에선 아침 도시와 빌딩 건물의 윤곽들이 한폭의 풍경화로 두 눈에 들어온다. 느닷없이 닥친 선수들의 뜀박질에 놀란 능금 마을은 젖은 안개에 낮게 가라앉았고 '컹컹'대며 동네 강아지들이 숲길을 지켜내고 있었다.
둥이 트기 시작한 무렵이라 아직은 쌩쌩하다. 2CP지점 여래사에서 버스종점을 지나는 내리막은 그야말로 질주 본능이었다. 15km 지점까지는 대체로 그랬다. 화계사에 도착할때 까지도 장막을 거둬라 이 세상을 펼칠 것 같은 기개를 부렸다.
화계사에서 칼바위로 오르는 길은 온 몸으로 여름바람을 맞아야 했다. 언덕을 오르면 하나의 두개의 세개의 네개의 언덕이 숨가쁘게 이어지고 있었다. 대단히 힘든 구간이었고 커다란 바위 난간을 잡을 때마다 내 다리는 전투력을 상실해 버리고 있었다. 다리는 휘청거렸고 패잔병 마냥 무의식적인 움직임으로 발을 떼고 있었다. 바닷물을 뒤집워 쓴 뱃사람처럼 소금에 쩔은 짜고 끈끈한 땀이 온몸에 흐르고 있었다.
이제는 언덕의 바람도, 바위 위에 핀 피자색 같은 단풍들도 더 이상 반갑지 않았다. 아름다움과 반가운 심정도 내 마음이 자연을 받아 들일 수 있을 때 아름답고 애뜻할 뿐이다. 러닝은 사선을 넘나드는 피난민의 심정처럼 다급하지 않았지만 칼바위 앞에서 몸도 마음도 탈진해 버렸던 것이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힘겹게 오른 길들. 기다랗고 꼬불꼬불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집중하던 여정이 너무 아까웠다. 여기까지 왔는데 가야만 했다.
다리를 푸는 동안 경범이와 한구형님이 기다려 주지 않았다면 아득히 나락으로 떨어졌을것이다. 입고 간 러닝복은 오랜 땀으로 축축히 젖어있었다. 힘겹게 칼바위에 올랐고 용암문을 지나 대성문에 도달했다.
붉게 물든 북한산 능선은 푸른 피자에 빨간 소스를 뿌려 놓은 듯 하다. 나무 사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거미줄도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선명하게 보인다. 산은 푸른 여름 옷보다 알록달록한 가을 색이 더 운치가 있어 보인다.단풍나무들은 빨갛고 노란 색을 띠우고 있다. 이리도 많은 단풍나무가 있는지 몰랐다. 단풍은 쓸쓸한 계절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저렇게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4CP지점 여래사에 도착했다. 이제 6키로 산행코스만 잘 견뎌주면 포장 길이 나올 것이라고 마음을 위로했다.
북악 팔각정으로 되돌아 가는 길은 낙엽이 수북하다. 밟을 때마다 바삭바삭 소리를 냈고 손에 쥐어보니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몇 초 동안 돋보기를 대고 있으면 흔적도 없이 화장될 것만 같은 황토색 낙엽. 많은 낙엽들이 산길로 몰려 나왔고, 자기가 살던 나무로 옮겨가기엔 계곡 바람은 가벼운 종이 한장보다 얇았다. 낙엽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 품에서 떨어져 낯선 길을 나선 낙엽은 바람이 불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적당한 비가 내려야 제 집에 정착한 채 가족들에게 올바른 자양분을 댈 수 있을 것이다. 광합성을 소진한 나뭇잎은 제 집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트레일 러닝화를 신은 선수들도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낙엽을 애써 밟지 않으려 했다.
'낙엽 조심하세요. 미끄럽습니다.’라고 비탈진 길을 달려가는 선수들은 제각기 한마디씩 던진다. 떨어진 낙엽들은 그렇게 쓸데없이 빈축만 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CP 청운공원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기어서도 제한시간 안에 골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내리막이라 수월했고 수많은 인파가 있는 광화문 이라 힘든 것도 어느새 잊어 버렸다.
골인지점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선후배님 세분의 카메라가 쉼없이 번뜩거린다. 36km. 8시간 45분 24초. 나를 포함한 네 분의 동시 골인 기록이다.
이제 대회 3일이 지났다. 선택을 아주 잘한 대회였고, 급수와 보급이 너무 잘 되어 있고 자원봉사자의 친철함도 대단했던 그야말로 명품대회가 아닐 수 없다.
내년에 다시 도전하고 픈 생각들이 깊은 가을 밤에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