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산 산행)
90년 초 여름, 강남구 신사동에는 극장이 하나 있었다.
화창한 날씨에 '비 오는 날의 수채화'라는 영화를 이곳에서 대학 후배들과 본 적이 있었다. 억수로 비가 쏟아지는 영화를 봐서 그런 지 극장을 나왔을 때도 파란 하늘에서 주룩주룩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권인하가 부른 메인 음악이 있었고, 신형원의 '커피 향 가득한 거리'도 영화 속에 있었다.
신형원의 '쏟아지는 비를 맞은 기억 있나요~ 라는 노랫말이 딱 들어맞는 비가 수리산에 내리고 있었다. 관모 쉼터부터 후두득 떨어지던 비는 태을봉 정상에서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굵은 빗줄기가 전투적으로 내리고 있었다. 정상 인증샷만 찍고 서둘렀던 하산 길은 밧줄을 잡을 만큼 가파르고 미끄러운 지형이었다. 이런 날은 창밖이 보이는 2층 커피숖에 앉아 빗소리 감상이나 허름한 술집에서 막걸리와 파전이 최곤데 그런 낭만도 이런 폭우에서는 좀체로 떠오르지 않는다. 매운 고추를 먹었을 때 냉수로 얼얼해진 혀를 빨리 게워내고 싶은 것처럼 얼른 젖은 옷을 벗어던지고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 입고 싶은 기초적인 생각만 앞선다. '낭만'은 최백호가 부른가사에만 있는 것일 뿐, 그저 한시바삐 아스팔트와 번듯한 건물이 반기는 도시로 내려가고 싶은 심정이다.
두번 구운 양반김처럼 같은 산을 두 번이나 넘었다. 한 번은 새벽 늦잠으로 허겁지겁 산을 넘어 친구들을 만났으니 내 몸은 잘 익은 양반김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관모봉을 다시 오르는 두 번째 산행은 석쇠가 한창 달거질 무렵 소낙비가 연탄불을 피시식 꺼버린 형국이었다. 검은 고양이 네로, 비 맞은 생쥐가 따로 없었다.
이런 날은 비지스의 '홀리데이'음률이 떠오른다. 준비없이 맞아야 했던 소나기라 왠지 슬펐던 것 같다. 태을봉 정상부터 하산 길의 소나기는 지리산, 설악산이 따로 없었다. 운무도 그렇고 바람으로 인해 비는 심한 사선을 긋고 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은 딱풀을 바른 것처럼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한기가 몰려오기 시작했고, 축축함을 오롯이 몸으로 견뎌야만 한다. 이럴 때는 살기위해 투사가 되는 것 같다.
명학역에서 성결대로 이어지는 산행 초입에는 70년대를 방불케하는 오래된 연립이 많았다. 낡은 연립은 깨끗한 아스팔트 포장 도로와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사람의 손길이 덜 간 깨진 시멘트 계단과 군데군데 금이 간 빨간 벽돌의 집들은 공포영화를 연상하게 한다. 수리산은 안양, 군포, 의왕, 안산 4 개시를 아우르는 산이다. 성결대 입구 산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결국 길을 잘못 들었고, 다시 제 자리로 오가는 데는 10여분의 시간이 지체되면서 거센 소낙비를 맞았던 것이다.
초등 동창들이 우리동네 뒷산을 찾아오는데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맑은 날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수리산에서 보는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생각난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경,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얘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