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느 가을, 85년 강남역에서 카메라는 돌아갑니다. 지나 간 사진을 보면 색이 바랜 것처럼 시절을 돌이켜 보는 것도 추억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재수생 시절, 저는 강남역 주변에 있는 종합반을 다녔습니다.
우리 재수생들은 폼 날것 하나 없고, 돈도 없었습니다. 가방에는 고등학교 참고서와 학원 학습지만이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고, 죄인도 아니건만 고개를 45도로 숙인 채 습관적 우울증에 시달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인생의 낙오자는 아니지만, 소속감이 없다는 무력증에 빠지곤 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동창 몇 명이랑 그날도 강남역을 배회하며, 강남역 지하상가에 앉아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최백호의 '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처럼 속으론 한 없이 고독을 씹고 있었습니다. 다들 소속감이 없던 재수생이라 허허로웠을 것입니다. 날은 시몬 너는 듣느냐? 낙엽 밟는 소리를... 뭐 이런 시구를 읊고 싶을 만큼 구름 가득 한 하늘과 회색의 도시에서 뭔가 탈출구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때, 친구 녀석이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 삼겹살 구워놓고 소주 한잔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한 놈이 더 거들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정말 좋지.. 그런데 돈 있냐? 다들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담배 뿌시러기 먼지만 날 뿐 한 푼의 동전도 없었었습니다. 왜냐면 우리들 모두 집에서 도시락 2개만 달랑 싸주고 토근 몇 개와 100원짜리 몇 개만 받는 재수생이었으니까요...
우리는 강남역 지하상가를 올라왔습니다. 저와 친구까지 모두 4명입니다. 강남역 골목골목 두 바퀴를 그저 거닐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냥 거닐었던 것은 아니고 주변의 멋진 대학생들과 멋진 또래 여학생들을 훔쳐보곤 했습니다. 그때도 강남역은 젊은이의 거리였으니까요. 한 녀석이 색다른 제의를 했습니다. 야! 우리 그러지 말고 대포 까고 삼겹살에 소주 먹으면 어떠냐? 조기서...
조기는 바로 삼겹살에 소주를 할 수 있는 뉴욕제과 건물을 끼고 강남역 골목으로 진입하면 바로 보이는 약국 건너 소주집이었습니다. 그런데 먹고는 싶었지만 우리는 정말이지 돈이 없었습니다.. 난처했습니다.
한 놈이 이제는 더 구체적인 범죄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술을 마시러 일단 저기에 들어가는 거야... 그리고 들어가서 술 마시다가 한 명씩 화장실 가는 척 빠져나가는 거야... 그리고 가장 달리기 빠른 경남이가 마지막으로 쨉 싸게 달려 나가는 거야...' 정말 좋은 제안이었습니다.
저를 추겨세우고, 녀석들은 빠져나가자는 제안이었지만 전 달리기 하나는 자신 있었거든요.. 초등학교 때 학교 대표로 서울운동장, 효창구장도 달려봤고, 고3 체력장 100미터 기록이 11초 8이었으니 녀석들에게는 제가 우샤인 볼트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그래서 오케이하고 삼겹살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때는 술이 약해서 우리는 소주를 몇 잔도 못 마셨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맛있게 삼겹살을 굽고, 삼겹 한 점에 소주를 털어 넣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곤 좀 전의 범죄의 구성처럼 한 놈씩 의자를 뒤로 밀고 빠져나갔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가 나갈 차례입니다. 홀에 있던 주인이 주방에 들어가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제가 일어날 때가 된 것입니다. 저는 부르르 떨리는 몸을 이끌고 미닫이 유리문으로 힘차게 달려갔습니다. 친구들은 천천히 걸어서 나갔는데, 저는 쨉 싸게 달렸습니다.
그런데 미닫이 유리문에 제 손이 닿을 무렵 누가 제 뒷 덜미를 잡더군요... 돌아보니 주인아저씨 달리기가 어찌나 빠른지 바로 제 코 앞에 계시는 겁니다. 그 아저씨 먼저 제 머리를 아주 세게 치더군요... 그리곤 '이놈 자식,, 돈도 없이 어딜 도망가려고.. 인마 너희 집 주소 어디야? 경찰서로 바로 넘길 거야,, 어서 말해...'
죄송하다 돈을 갖다 드리겠다, 말씀을 드렸지만 그 아저씨 몇 번 저 같은 나쁜 넘들에게 당했다며,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더군요...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돈 좀 갖고 나오라고..., 그때 계산대 테이블 근처에 계시는 분이 주인아저씨를 부르는 것입니다.
여보 쇼!.., 제가 제안 한 가지 하리다... 저 학생이 제게 종아리 3대를 맞으면 저 학생이 마신 술 값 제가 다 계산해 주겠소.. 주인 양반 그거 어떠시오... 학생은 어떻게 생각하나???
순간 저와 주인아저씨는 얼굴을 마주 보고 머릿속에서 계산을 하기 시작합니다.
주인아저씨 왈, 계산해 주신다면야, 이 녀석 경찰서로 안 넘기겠습니다. 이제는 제 차례입니다... 저는 조금 더 생각을 해봤지만 저도 딱히 생각할 것이 없었습니다. 경찰서 가서 아버님께 두들겨 맞으나, 여기서 종아리 3대 맞으나... 뭐~~ 좋습니다. 저도 동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손님은 주인아저씨에게, 아주 단단한 몽둥이 하나 준비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주인아저씨 아무런 주저 없이 몽둥이를 갖고 오셨습니다.. 저는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건 보통 몽둥이 보다 두배나 굵고 단단해 보이는 몽둥이였습니다... 마대자루보다 크고 단단한 그것을 보는 순간 아찔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마루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때까지는 손님들 모두 시끌시끌 나름대로 떠들고 있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종아릴 걷었습니다. 단 세대만 때리겠네... 준비됐나? 네. 준비됐습니다...
첫 번째 몽둥이가 날아왔습니다... 철썩...
순간 시끄럽던 그 삼겹살집 일순 조용해집니다... 저는 종아리가 아픈 것보다, 얼굴 쪽 팔린 것이 더 아팠습니다. 다시 한대 철썩... 마지막 한대...
그렇게 맞고 종아리를 내렸습니다... 모든 손님들이 저만 쳐다보았습니다.. 정말 이지 얼마나 창피하던지...
아저씨 말씀을 하십니다... 학생.. 우리는 00 고등학교 동창들인데,,, 나도 젊은 시절 중국집에서 돈 안 내고 2층에서 뛰어내린 적 참 많이 있었네... 그 마음 이해하네... 참 대단하네... 세분 모두 제게 명함을 건네면서 꼭 한번 찾아오라고 하시는데, 명함을 보니 다들 뭔 회사 대표이사를 하시더군요...
그렇게 무사히 그 삼겹살집을 빠져나와서 쓸쓸하게 약국을 건너는데,, 친구넘들이 약국 옆 전봇대에서 숨어있다 나오는 겁니다.... 아....
저 그날부터 친구들에게 영웅이 됐습니다... 그리고 저를 지금까지도 미안해하며 지내는 그런 친구들로 만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