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
벤야민의 서재에는 희귀한 어린이책과 정신병자의 책 수집품도 있었다. 그는 아동심리학에도 정신의학에도 관심이 없었기에, 그의 보물에 속하는 다른 많은 것들처럼 이 책들은 문자 그대로 무엇에도 쓸모 있지 않았으며, 오락을 위해서도 가르침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p. 121-122)
이번에 출간된 한나 아렌트의 <발터 벤야민>은 이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온 적이 있다. 나는 이 책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동일한 내용의 책을 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필로소픽의 출판과 이성민의 번역으로 인해 새 책을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마치 책 수집가였던 벤야민처럼.
이성민을 알게 된 것은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과 <철학하는 날들>이라는 두 권의 저서를 접하고 나서다. 당시의 나는 인문학적 방황을 거치고 있었고, 더 이상 철학책을 탐독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그랬던 내가 여전히 인문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는 것은 한나 아렌트와 이성민이라는 두 명의 철학자를 만난 덕분이다.
이성민의 저서에 꽤나 많은 감명을 받은 나는 <여자들의 무질서>, <동기간>,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에 대하여>와 같이 그가 번역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번역서를 접했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과거의 내 기준에서 ‘번역이 잘 된 서적’은 S 모 출판사의 책이었다. 이 출판사의 대표는 자신이 직접 만족할 때까지 교정을 보느라 2주에 한 번씩 안경 렌즈를 맞추었고, 윤문에 윤문을 거듭하여 책 속의 모든 문장을 자연스러운 한국말 문장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번역된 책을 읽고 나면 ‘지금까지 내가 읽은 번역서들을 이해 못한 이유는 내가 모자란 탓이 아니라 좋지 않은 번역 때문이었어’하는 묘한 만족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성민의 번역은 전혀 달랐다. 그는 한국어로 읽을 때 딱딱한 표현들을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 가령 이번 책에서는 ‘사실내용’이나 ‘천재 열광’과 같이 낯선 어휘들이 눈에 띈다. 그에게 있어서 ‘sea-change’는 말 그대로 ‘바다-변화’이다.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이를 ‘완전한 변화’로 번역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쉽게 이해하겠지만 그들은 독자들이 무엇을 놓치게 될지 상상하지 못한다. 셰익스피어가 처음 이 단어를 사용한 의도. 이 단어가 관용어가 되기까지의 역사. 그리고 표현에 담긴 은유까지도.
이성민의 번역 원칙은 직역이다. 그는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본래의 영어 문장을 끊어서 번역하거나, 본문에 없는 문장을 추가하지 않는다. 그가 의역을 나쁘게 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역을 하기 위해서는 배의 노력과 세심함을 기울여야 한다고 그는 말한 바 있다. 과연 수려한 한국어로 윤문된 번역서들이 이러한 노력과 세심함을 통해 번역된 것일까? 가끔은 독자들을 이해시키겠다는 역자의 배려가 본래의 의미에서 독자를 더 먼 곳으로 데려가는 일도 발생한다.
내가 처음 이성민의 번역을 접했을 때처럼, 누군가 이 책을 처음 읽는다면 낯선 어휘들에 당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낯선 감정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 이러한 의심은 그의 또 다른 번역서인 <정신의 고귀함>을 읽어보면 금방 해결된다. 다른 역서들과는 다르게 이 책은 굉장히 쉽게 읽히는데, 그 이유는 번역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 이 책이 쉽고 대중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원래부터 어려운 본문을 읽기 쉽게 번역했다면 그 번역이 잘 된 번역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대학교 정치철학 강의에서 들은 일화를 이야기하며 글을 맺는다. 우리 강의를 담당한 교수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롤스를 전공했는데, 하루는 롤스의 책이 너무 어려워 미국인 동료에게 우는 소리를 했다고 한다. “나는 영어가 서툴러서 롤스의 글을 이해하는 게 너무 어려워. 너는 미국인이니까 나보다 훨씬 쉽게 이해하겠지?” 그러자 동료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고 한다. “It’s a totally different langu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