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초역 채근담
채근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흥이 무르익었을 때,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사람은
마치 거리낌 없이 절벽 위를 걷는 듯 당당하고 멋지다.
며칠 전, 오랜만에 동창 모임이 있었습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세월의 흔적보다 먼저
학창 시절의 웃음소리가 되살아났습니다.
그때 그 시절,
수업 시간에 서로 주고받던 쪽지,
운동장에서 뛰놀던 땀방울,
졸업식 날 주고받던 장난스러운 농담까지.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우리는 단숨에 젊은 날의 한가운데로 돌아갔습니다.
대화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한 잔, 두 잔 기울이다 보니
술기운이 오르면서 마음의 빗장이 풀렸습니다.
서로의 삶을 털어놓고,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술잔에 담아 나눴습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채근담의 구절.
흥이 무르익었을 때,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말.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두고
먼저 일어난다는 건
왠지 모르게 정을 저버리는 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채근담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밤이 깊었는데도 여전히 술에 취해 서성이는 사람은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듯 보인다.
나 이제 들어가야겠어.
조심스레 말하자
이 사람아, 이렇게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먼저 가면 서운하지!
웃으며 붙잡는 손길.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잠시 더 앉았습니다.
그 순간,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나도 떠날 때를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
남아 있는 것이 진정한 우정을 지키는 것인지,
아니면 떠나야 할 순간을 놓친 것인지.
그때, 한 친구가 구원투수처럼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나 먼저 간다.
그 말에 저도 얼른 뒤따랐습니다.
나도 갈게.
아쉬움이 묻어나는 친구들의 눈빛을 뒤로한 채
그 자리를 나섰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채근담의 구절이 다시금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아는 것.
그것은 내 마음을 지키는 지혜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남아 있음이 미덕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멋은
물러나야 할 순간을 알고,
미련 없이 발걸음을 떼는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