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한겨레출판
“돌보지 않았던 몸이 깊은 병을 얻은 지금,
평생을 돌아보면 만들고 쌓아온 것들이 모두 정신적인 것들뿐이다.
그것들이 이제 시험대에 올랐다.
그것들이 무너지는 나의 육신을 지켜내고 병 앞에서 나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이제 나의 정신적인 것은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자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단 여섯 줄의 글을 읽고 한없이 생각에 잠긴다. 그 여섯 줄 속에는 나무에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이 있고 그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어린아이의 까르륵 유쾌한 웃음소리도 담겨 있다. 세상에 내가 머물던 모든 시간들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순간! 그렇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는지는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증명해내면서 판단될 일이구나. 죽음 앞의 시험대에서도 내가 지나온 알알의 생(生)들이 나 자체였다는 걸 겸손하게, 그러나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것, 내가 진짜의 삶을 살았음을 증명하는 것. 미학자이자 철학자인 저자는 자신의 삶의 끝자락에서 우리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삶은 진짜인지 거짓인지! 진짜의 삶을 위해서는 어떻게 살 것인지 저자 자신의 남아 있는 시간을 기꺼이 내놓아 보여준다.
언젠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느닷없이 죽음을 앞두게 된다면 나는 어떨까? 평소에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남을 사람들을 위해서 전전긍긍 하지 말고 의연하게, 호기롭게 죽음 앞에 서겠다고. 마지막까지 잘 정리하고 당당하며 유쾌하게 마무리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자고. 그리고 또 상상해본다. 몇 개월의 시한부를 선고 받는다면 나는? 상상만으로도 조금 전의 다짐은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금세 혼자 울컥하고 마음이 얼얼하다. 죽음 앞에 당당하자는 건 어쩌면 건강 검진을 앞두고서 결코 마음 편할 수 없는 나이가 된 나의 불안과 나약함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어쩌면 경험하지 못한 죽음에 대해 나는 우아하게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결정적인 순간, 나의 이 마음은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아침의 피아노‘는 저자가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일구어낸 “새로운 영토”다. 삶과 죽음 사이에 무슨 새로움이 있을까? 그 사이의 시간은 삶의 시간보다는 죽음의 시간에 좀 더 가깝게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노학자는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과 감사,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토록 단정하고 우아하게 우렁찬 정신으로서의 사랑과 삶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존재에서 소멸로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그 위태로운 공간조차도 온 힘을 다해 삶과 존재의 영토로 일구어간다. 목전의 죽음에 한 치의 고통, 절망, 슬픔을 내어줄 수 없다고, 지극한 긍정과 당당함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이 말하고 생각하고 느꼈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며 삶의 품위를 지켜낸다.
물론 “살아있는 동안은 삶이”고 “이 삶에 성실할 책무가 있”지만 “그걸 자주 잊”고 “때아니게 툭툭 마음이 꺾”이기도 하면서 부재와 이별의 아픈 순간에 내던져질 때도 있다. “나는 살 만큼 생을 누렸”으니 “슬퍼할 필요도 이유도 없”고,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엄마의 치마폭을 붙들고 놓지 않는 아이처럼” 생을 붙들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또 고스란히 드러내곤 한다. 어찌 그대로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두려움과 포기하고 싶도록 제멋대로 헝클어지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문득문득 “분노와 절망”이 “거꾸로 잡은 칼”처럼 “나를 상처”내는 것도 애써 다독이고 쓰다듬으며 온 힘을 쏟아내 본다. 그 또한 스스로를 증명해내는 것이기에. 덜컥 떨어지는 마음을 주워 올리며 꿋꿋이 버티는 것이 나의 사람들에 대한 의무이고 책무라며 슬픔과 원망의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 한다.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혼자서 다 껴안아야 한다니!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말을 슬프고 외롭게 되뇌어 본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그 짐을 나눌 수 없이 오롯이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 “무력한 상실감과 우울의 고통”에 어쩔 줄 모르는 나약하고 쓸쓸한 존재로 전락할 수는 없다. 롤랑 바르트가 사랑을 잃고 그랬던 것처럼 죽음 앞에서 “비로소 나는 귀중한 주체가 되었다”고 바꿔 말해본다. “한 철을 살면서도” “이토록 성실하고 완벽”한 삶을 살아낸 풀들처럼. 세상에 작은 푸른 빛 한 줌 더하며 웅변하는 그들의 성실한 삶의 주장을 온전히 이해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삶의 귀중한 주체가 된다. 나의 숨이 다하는 순간 어쩌면 미루어 두었던 세상에 대한 깊고 따뜻한 이해가 찬란하게 찾아와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살던 세상은 아름다웠노라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234일간의 애도 일기는 죽음을 맞닥뜨린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살아 온 게 거짓이 아니었음을 끝까지 증명해내고 인간의 품격을 유지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글이다. 꺾일 줄 모르는 바이러스 기세로 모두가 사는 게 힘들다고 아우성인 이때, 그마저도 ’아름다운 소풍‘이라고 생의 생기를 노래한 어느 시인처럼 노학자는 “삶은 향연이“고 우리는 ”초대받은 손님“임을 잊지 말라고 힘주어 말하며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는 위로를 건넨다. 어려움 속에서도 충만한 삶을 위해 힘을 낼 수 있는 ”우리는 모두 ’특별한 것들‘이다. 그래서 빛난다. 그래서 가엾다. 그래서 귀하고 귀하다.“ 며 속 깊은 응원을 보낸다. “간절할 때 마음속에서 혼자 또는 누군가에게 중얼거리는 말들”이 다 기도란다. 삶에 게을러지고 나태한 일상이 거듭될 때, 사는 게 더 이상 새로울 것 없이 시시하다고 느껴질 때, 그래도 힘을 내보자고 애쓰며 나를 돌봐주는 건 내가 아니라 나를 향한 중얼거림, 어딘가에서 이루어지는 그들의 기도 덕분일지도 모른다.
지난 10월,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나의 기도가 부족했는지, 모든 면에서 철저하셨던 늙은 아버지를 예전의 젊은 아버지처럼 여겼었는지, 정말 아무 준비도 못한 채 황망하게 보내드려야 했다.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드라마 같은 일일 수 있음을 가신 후에야 뒤늦게 깨닫는다. 이제야 조금씩 아버지의 부재가 실감나기 시작한다. 친정집의 대문을 넘어설 때면 창밖을 내다보시며 맞아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해서 차마 대문을 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애도처럼 이 책을 또 한 번 읽었다. 그리고 또 서러워지는 것은 아버지가 미처 당신의 삶을 증명해낼 시간조차 가지지 못한 채 급하게 떠나셨다는 점이다. 나의 생을 열어주신 아버지, 외롭게만 보내드린 것 같아 목이 아파오고 가슴 한 켠이 끄먹하다. 아버지의 삶을 함께 돌아보고 아버지 역시 틀리지 않은 생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덜 아쉬웠을까?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감사, 아름다움을 기억한다면 위로가 될까?
"이 책이 나와 비슷하거나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의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성찰과 위안의 독서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면 노학자의 증명은 훌륭하게 끝났다. 날짜가 지날수록 간결해지는 그의 문장에 아버지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서늘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응원하는 단단한 메시지에 나도 더불어 단단해진 느낌이다. 아버지가 주신 삶을 덧없는 인생이지 않도록 아름답게 채울 것, 아무렇지도 않은 점점이 들꽃도 빛나고 귀한 존재임을 알아챌 것, 이 세상에 내가 살아있음을 기억할 것! 그가 남긴 마지막 날의 ”내 마음은 편안하다.“에 공감할 수 있는 삶을 꾸려갈 태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빈 여백만큼이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여백 가운데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그는 옳고 진짜의 삶을 살았다. 아버지의 삶도 역시 그렇다. 나도 그럴 준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