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서경식/돌베개

by 머무는바람

떠나오거나 떠밀리거나, 스며듦을 희망하다


#디아스포라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우리 동네에는 “수상한 집-광보네”라는, 이름마저 수상한 카페가 있다. 사실 이곳은 조작 간첩으로 복역까지 마치고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강광보 선생이 시민단체와 함께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전시 공간으로 마련한 곳이다.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으면서 먼저 강광보 선생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간첩으로 조작된 그분의 인생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혹은 국가 폭력에 의한 피해자들과 함께 분노하는 감정만 가졌던 나에게 이 책은 국가 폭력 이후 이분들에게 놓인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좀 더 깊게 생각해보고 들여다보게 하였다. 사전적으로 디아스포라는 “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면서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키지만, 오늘날에는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좀 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나는 거기에 더해 심리적, 정서적으로 삶의 시, 공간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의심하고 부유하는 현대인들의 많은 모습도 디아스포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심리적 이산, 심리적 디아스포라, 안쪽에도 바깥쪽에도 끼지 못하는 위태로운 경계의 심리. 국가에 의해 자기 삶의 뿌리에서 멀리 떠밀린 강광보 선생도 그래서 떠올랐나 보다. 무죄 판결 이후에도 계속되는 어우러지는 삶 언저리에서 맴도는 머뭇거림과 경계성이 극단으로 부딪히는 그 모습도 어떤 면에서 디아스포라가 아닐까?

저자는 디아스포라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간단치 않다는 점을 많은 시간을 들여 설명한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 민족 분단에 이은 민족 이산을 개인의 특수성으로 지닌 이들이 일본과 한국, 북한 사이의 누군가로 살아가는 것을 보편적인 상황으로 명쾌하게 말하기 곤란함을 자신의 경험을 들어 조목조목 따져 말한다. 대다수 사람들에겐 지극히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이 경계 위의 그들에겐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를. 그런 상황에 대해 너무나 쉽게 “왜 그러는데?”라는 단순한 반문이 돌아올라치면 진지한 설명도 버거울 정도로 당황스럽다고도 말한다. 나에게는 조국이자 고국이며 모국인 국가가 당연히 일치하는 데 비해서 “디아스포라에게는 조국(선조의 출신국) 고국(자기가 태어난 나라) 모국(현재 국민으로 속해있는 나라)의 삼자가 분열해 있”고 “그 삼자의 지배적인 문화관이나 가치관은 서로 많이 다르고 자주 상극을 이룬다.”라는 점을 우리는 복잡하다고 느낄 틈도 없이 지나쳐 왔다. 매 순간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해내야 하는 디아스포라들의 고단함을 우리는 너무 늦게 알아챘다.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

있어도 상관없을 만큼

주위는 나를 감싸고 평온하다.

일은 언제나 내가 없을 때 터지고

나는 나 자신이어야 할 때를

그저 헛되이 보내고만 있다.

-중략-

36년을 거듭하고서도

아직도 나의 시간은 나를 두고 간다.

저 멀리 내가 스쳐 지났던 거리에서만

시간은 활활 불꽃을 돋우며

흘러내리고 있다.



재일 시인 김시종의 <바래지는 시간 속> 중의 일부이다. 스스로를 디아스포라라고 느끼는 저자의 마음을 시인에게서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언제나 쉽지 않았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 자신이어야 할 때를 그저 헛되이 보내고만 있다”는 노시인의 음성이 되어 울린다. 인생의 여러 국면에서 마주해왔던 이 질문은 “36년을 거듭하고서도” 아직도 노시인을 두고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에 불과하다. 다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한 디아스포라들의 시간은 지나서야 “활활 불꽃을 돋우며 흘러내리”는 “저 멀리” 있는 “‘내가 스쳤던 거리”에 불과해 보여 그 삶이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은 그렇게 바래지다가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디아스포라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어떤 면도 놓치지 않고 제대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비록 복잡한 일이 될지라도.


#디아스포라의 시선을 함께 한다는 것

저자에게 여행은 “조금씩 공기가 희박해지는 지하실과 같”은 “일본 바깥의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붕어가 산소 부족에 허덕이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미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도 일본으로 돌아오는 이유를 추궁하는 다수자들에게, 내부의 사람들에게 “여기밖에는 살 곳이 없”다고 실토한다. 그 안타까운 디아스포라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죽음과 폭력의 기억을 보여준다. 그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할 수 있을까? 디아스포라의 처지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일상화된 자폭”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저자는 “선진국에 살기 때문에 누리는 기득권”과 자신이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행위가 이 세계를 바꾸는 데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무력함" 때문에 일상화된 자폭 공격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스위치 뚝 끄듯이 사라져 버"리는 디아스포라들의 죽음을 "아 역시나" 하며 "이제 어깨의 짐을 내려놓았"다고 납득할지도 모른다.

<안개 쌓인 바다 위의 방랑자>의 모습처럼 정상에 올랐으되 안개에 싸여 볼 수 없는 지상의 삶에 불안과 죽음을 옆에 두고 끝없는 고독 속에서 헤매는 것이 저자가 목격한 자신의 모습이자 디아스포라들의 모습이다. "국민"과 "국가"라는 불사의 공동체 저쪽에, 여전히 "바깥"에 머물러 있는 스스로를 보게 되는 것, 인생의 중심을 이루는 세월 속에서도 그랬고, 남은 유한한 시간도 그렇게 지나가리라고 실감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절망을 가져오는지, 그 시선을 함께 따라가기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시선은 또 다른 디아스포라들에 가 닿아 자신을 객관적으로 투영한다.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은 영락없이 디아스포라들의 예술들이다. 평범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절대 공감되지 않는 디아스포라들의 언어를 저자는 곱씹고 또 곱씹는다. 나라와 민족, 언어와 사상을 뛰어넘는 그들의 작품에서 디아스포라들의 죽음과 불안은 큰 울림이 되어 우리 앞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이 책은 기행이 아닌 디아스포라의 삶을 보여준다는 것이 옳다.

저자가 만난 광주의 모습은 또 어떤가? 형이 출소한 후 찾은 망월동, 미국에서 만난 또 다른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남동생이 갇혀있는 광주의 감옥, 비전향 정치범들에게 사상전향을 강요하기 위해 집중적인 고문이 행해졌던 광주교도소는 감추고자 한 폭력의 기억을 고스란히 끄집어낸다. 10년의 세월을 두고 만난 광주에서는 오히려 저자는 이렇게 빛나도 되는가 하는 불안감과 함께 그 자신이 이 변화를 가져온 구동력의 일부분이었을지, 여전히 그 변화의 ”밖“에 서 있는 것인지 거듭 자문한다. 비엔날레의 작품들에서 또다시 나온 질문은 역시 "나.는.누.구.인.가?", 저자만의 질문이 아닌 디아스포라, 이중의 디아스포라들의 우렁찬 저항이다. 자신을 기어코 되찾고야 말겠다는 함성.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것은 현실에 단단히 발 딛고 서지 못한 "공중에 매달린 상태"일 뿐이다. "진정한 인간적 삶을 찾아" 서슴없는 도약만이 그들 자신을 증명해내는 일이다. 재일조선인 미술가 “후지노 노부루”가 “문승근”이라는 본명을 비로소 작품전에 붙일 수 있는 것, 본인의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암시하는 은유인” 것 같은 <활자구>, “뿌리도 없고 토대도 없”이 “외적인 힘에 의해 마음대로 굴려지는 존재”, 굴려져야만 “흔적을 남기는 존재”, 그의 최대 저항은 굴려지지 않는 것이다. 멈추는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일 것이다.


#내 옆의 디아스포라를 찾아서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는 내내, 내 삶터인 제주가 어른거렸다. 어쩌면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동안 섬은 자발적 혹은 떠밀려온 디아스포라들의 공간이었고 지금도 그런지도 모른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자녀의 질 높은 교육을 위한 자발적 디아스포라를 선택한 이들은 제주 사람들의 “육지 것”이라는 투박한 선 긋기를 기꺼이 감내한다. 반면에 비자발적 디아스포라들에게 제주는 스며들기 힘든 공간이었다. 조선 시대 200여 년간의 출륙 금지령은 섬사람 전체를 디아스포라로 만들었다. 육지와의 단절로 고립된 섬에 갇힌 제주 사람들은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디아스포라의 삶이라도 챙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유배를 당한 비자발적 디아스포라들에게는 그 생을 담보받을 수 없는 절망이었다. 삶의 무게를 바다와 나누어야 했던 제주 사람들은 출륙 해녀로 돌아와 돌담 한편에 전설처럼 걸린다. 제주 4.3 사건의 광풍으로 일본으로 밀항한 제주인들은 재일 시인 김시종이 되고, 생계에 떠밀려 일본으로 향한 젊은이들은 조작 간첩 강광보가 되어 디아스포라의 삶을 잇는다.

그리고 제주와 예멘 난민. 2년 전쯤 제주를 탈출구로 삼은 예멘 난민 문제로 온 제주가 떠들썩했던 걸 기억한다. 중국이나 베트남, 우즈벡키스탄 등 다양한 외국인들이 머무는 제주였지만 난민의 처지였던 예멘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격렬한 찬반 논쟁이 진행됐다. 세계 각지에서 활약하는 우리 동포들을 생각하며 역지사지로 예멘 난민들의 난민 신청을 찬성하고 한글 공부나 통역, 요리나 식자재 지원 등 열성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그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반대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반대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안전 문제에 예민했는데 예멘 난민이 불법적인 범죄를 벌인다거나 하는 부분에 대한 염려가 컸다. 그 염려는 놀랍게도 예멘에 대한 무지에서 온 걱정이었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무지, 세계 뉴스에서 봐 오던 테러집단의 소식 등이 예멘 난민을 흉악한 범죄 집단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전쟁 같은 제주 4.3의 광풍을 겪었던 제주인들은 당시 3년이 넘도록 내전이 계속되어온 그들을 공감하기는커녕 외면하기에 바빴다. 콜레라로, 굶주림으로 전쟁 최대 비극을 관통하고 있는 예멘인들을 제대로 알아보려고도 않고 모른 척하기 바빴다. 600만 명의 코리언 디아스포라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문제는 자명해 보인다. 디아스포라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내도록 요구하기보다는, 무조건 받아주고 베푼다는 시혜적인 이해보다는, 울림 없는 인정이나 포용보다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우리 국가, 우리 국민, 우리 도민, 우리 동포의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 필요하다.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다양한 그들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디아스포라, 진정한 조국을 기다리며

저자는 이 시도가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근대'를 다시 보는 것, 그리고 '근대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프롤로그에서 미리 제시하였다.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본 부조리한 폭력과 파괴가 일상화된 어제의 '근대'와는 이제 안녕을 고할 때이다. 이 일상화된 근대 이후의 '인간의 가능성'은 우리가 보여줘야 한다. 우리를 탐구한 결과가 실망적이지 않길 바란다.


“디아스포라에게 조국은 향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국이란 국경에 둘러싸인 영역이 아니다. '혈통'과 '문화'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으로 굳어버린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식민지배와 인종차별이 강요하는 모든 부조리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을 의미한다. 우리 디아스포라들은 근대 국민국가를 넘어선 저편에서 '진정한 조국'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한국어판을 펴내며 서문에 쓴 저자의 말이다. 다수자로서 내가 내뱉었던 가벼운 말이 폭력이 되었던 적은 없었을까? “진정한 조국”을 향한 디아스포라들의 치열한 고민을 그저 감성적인 그리움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바꿔버린 것은 아닐까?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많은 질문이 터져 나온다. 이 질문에 대답을 찾으며 그간의 관심 폭이 좁고도 낮았음을 알아차렸다. 나 자신이 그들에게 “진정한 조국”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도 품어본다.

떠나거나 떠밀린 그들이 부디 나에게도 스며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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