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흐리다. 보통 때 같으면 날씨에 따라 기분도 가라앉겠지만 곶자왈* 속 일만 팔천 신들을 만나기에는 그리 나쁘지 않은 날씨다. 아니 어쩌면 옅은 비라도 흩뿌린다면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더해져 안성맞춤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거문 오름 근처에 자리 잡은 ‘탐라신화공원-신들의 고향’이다. 오랜만에 오긴 했지만 생소한 풍경에 잠시 당황한다. 바로 옆에 언제 생겼는지 거대한 공룡 한 마리가 떠억 하니 버티고 있다. 아하! ‘oooo 사파리’라는 곳이 새로 생겼다. 아이들 소리가 소란스럽다. 그에 비해 탐라신화공원의 널찍한 주차장이 더욱 한가롭게 느껴져 쓸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매표소 앞에서는 무인운영이라는 말에 또 한 번 쓸쓸해진다. 비도 내 마음을 아는 듯 오며 가며 낮게 내린다.
*곶자왈 숲을 뜻하는 제주 사투리 ‘곶’과 가시덤불을 뜻하는 ‘자왈’을 합쳐 만든 글자로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져 요철(凹凸) 지형이 만들어지면서 나무, 덩굴식물 등이 뒤섞여 원시림의 숲을 이룬 곳을 이르는 제주 고유어다.
▲ 탐라신화공원 입구 ⓒ머무는구름
신을 품은 곶자왈
곶자왈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제주 초가와 오름의 모양을 따온 전시관이 낮게 줄지어 있다. 예전에 방문했을 때는 이곳이 ‘기메지전’이라는 전시관이었던 기억이 있다. ‘기메’는 제주에서 무속의식을 치를 때 쓰는 종이로, 다양한 형태로 오려서 굿을 할 때 대나무 끝에 매달아 신단 주위에 세워두거나 무당이 손에 들고 춤을 추기도 했다. 한 마디로 신의 강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지전’은 종이돈으로 현금 대신 신에게 올리는 돈으로 저승에서 망자가 사용할 저승 화폐를 상징화한 무구이다. 기메지전 외에도 굿할 때 쓰는 도구들을 전시한 ‘무구전’ 공간도 있었는데 지금은 문을 걸어 잠가 살펴볼 수가 없다.
제주에는 ‘절 오백, 당 오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절도 많고 토속신앙도 발달해서 자연에 기댄 모든 것들을 신처럼 여겼다. 구비전승되는 신화로는 제주 신화가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돌에 새겨진 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제주 사람들의 의식이나 삶의 모습이 온 곶자왈에 가득하다.
▲ 제주 초가와 오름을 본뜬 전시관 ⓒ머무는구름
전시관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곶자왈이 펼쳐진다. 그 속에 서로 다른 표정을 한 신들이 곳곳에 자리해 있음은 물론이다. 곶자왈을 산책하면서 신들의 모습을 보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읽어볼 수 있도록 안내판을 배치해 두었다. 많이 알려진 천지왕의 개벽 이야기를 지나면 처음 보이는 것이 세경할망 자청비다. 제주 섬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섬긴 농경신이다. 삶에 적극적인 태도를 지닌 제주 여성의 모습을 자청비에서 엿볼 수 있다. 빨래를 하다가 문도령에 반해 남장을 하면서까지 따라나선 자청비가 농경신이 되기까지의 온갖 고난과 극복의 이야기는 어느 영웅의 그것보다 흥미롭다. 자청비에게 거짓을 고해 곤란을 겪게 한 돌조각 속 정수남의 표정은 지금도 자청비의 눈치를 보는 듯 실감 난다.
▲세경할망 자청비(농경의 여신) ⓒ머무는구름
염라대왕을 속이고 사만 년을 살다가 한순간의 말실수로 이승 차사 강림에게 잡혀온 사만이와 강림의 모습은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사만이의 낭패감 짙은 표정과 차사 모자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곶자왈의 초록 식물이 자연스럽게 신과 함께 어우러지고 이끼 옷은 원래부터 입고 있었던 듯 시간의 무늬가 보기 좋게 어려 있다. 이 숲길을 따라나서면 또 어떤 신을 만나게 될까?
▲ 사만이와 이승 차사 강림 ⓒ머무는구름
▲ 신에게 가는 숲길 ⓒ머무는구름
본향당의 주인 백주또와 그 아들 궤네깃또, 바람의 신 영등과 장수의 신 노인성, 생명 점지와 양육을 관장하는 생불할망, 꽃감관 사라 도령과 원앙부인, 전투의 신 군웅과 시험 운을 도와준다는 진안 할망과 관청 할망 등... 비슷한 듯 다른 신들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지는 이곳은 그야말로 신의 놀이터다. 얼핏 신들의 모습만이 나열되어 지루할 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 표정들과 이야기에 빠지면 지루할 틈이 없다. 있는 그대로의 돌덩이 원형을 최대한 지키면서 근엄하면서 익살스럽고, 무서우면서 귀여운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신들의 고향’이라는 별칭이 그냥 붙은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탐라신화공원 안 다채롭고 생생한 신들의 얼굴 ⓒ머무는구름
땅 속에 묻힌 돌에서 신의 얼굴을 찾다
그럼 이 많은 신의 얼굴을 찾은 이는 누구일까? 화가 김재경 선생의 꾸준한 제주 신화 연구가 제주의 자연과 신성하게 교감한 결과다. ‘신들의 얼굴’ 개인전을 열 정도로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쏟은 걸로 잘 알려져 있다. 공사장에서 버려지는 돌을 가져다 깨지고 부서진 원형 그대로 조금만 손을 보았을 뿐인데 마치 원래 신들의 얼굴이 그 바위에 있었던 듯, 신들의 고향을 찾은 듯, 숲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신들의 이야기 속을 거닐다 보면, 마치 우리도 신이 머무는 세계의 일부인 듯 공간의 분위기에 저절로 스며든다.
계단 옆에서 방문객을 무심히 바라보는 신의 얼굴에 놀라다가도 의자 모서리에 설핏 나타나 딱 걸린 얼굴은 부끄러워 다시 돌 속으로 숨어버릴 것 같다. 풀 숲 사이의 신들은 무엇 때문에 뾰로통해졌는지 알길 없다. 신이면서 인간적인 표정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 계단 옆에 숨어 있는 신의 얼굴 ⓒ머무는구름
▲ 의자 모서리에 자리한 신 ⓒ머무는구름
▲ 풀숲 사이에 나란히 앉은 두 신 ⓒ머무는구름
초월적 존재, 생활 속에 들어오다
굿판에서 무당의 입을 통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생활 속 무속신앙을 통해 전해 내려온 제주의 신화와 설화는 현재도 여전히 제주 사람들의 삶에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주인들은 오래전부터 수많은 토속신이 길흉화복을 관장하며 자신과 함께 살고 있다고 믿었다.
제주어 중에 ‘동티 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이사나 이장의 과정 같은 일상생활에서 신의 노여움을 사서 재앙을 당하는 일을 말한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1년에 딱 한 번, 모든 신들이 매년 자신의 임기를 마치고 옥황상제를 만나러 가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는 일주일을 ‘신구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신구간에 동티 날까 봐 못했던 일들을 다 해버리는 풍습이 있다. 지금은 많이 줄어든 편이지만 그래도 역시 이사는 신구간에 몰아서 하는 일이 많다. 그러다 보니 제주에서는 특히 집을 빌릴 때 신구간에 이사를 할 계산으로 월세나 전세가 아닌 연세 계약이 두드러진다. 신구간은 토속신앙과 관련한 제주 주거 문화의 독특한 풍습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렇듯 제주 신화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이자 그 자체로 제주 문화의 역사다. 마을마다 존재하는 당을 보면 그 마을 사람들의 삶이 보인다. 그래서 제주 신화는 제주사람들이 일상에서 이해하고 공감하는, 그들에게 살아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 탐라신화공원에서 다시 돌아본, 마지막 풍경 ⓒ머무는구름
▲ 신의 별장 ⓒ머무는구름
꽃감관의 서천꽃밭은 내년 봄을 미리 생각하게 하고, 색이 바랜 수국과 수련은 한여름을 기다리게 한다. 이제는 절정의 단풍빛이 신들의 옷을 화려하게 바꾸고 있다. 제주의 사계절, 신들의 모습을 새롭게 즐길 수 있는 곳, 그냥 두기 아깝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돌보지 않아 쓸쓸하고 휑뎅그렁한 모습이 이웃 사파리의 떠들썩함과 대조되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제주의 신들은 제주인의 삶에 녹아든 문화이며 환경이고 정신이라고 한다. 여기 ‘신들의 고향’이 더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 신들에게 넉넉히 위로받는 공간으로 다시 서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