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나 댕겨왓쪄. 신경 쓰지 말라."
"엥? 화요일에 갈 건디게."
"응 이거 틀니가 좀 아프기도 허곡 살살 댕겨 왓주게."
월요일에는 오전, 오후로 수업이 있어 화요일에 가기로 약속을 한 엄마는 월요일날 혼자 치과를 다녀오셨다. 막 못 견디신 걸 이 딸이 너무 무심했구나 싶은 마음이 한 쪽 구석에서 민망한 표정을 짓는다.
"다시 하는 건 물어보난 혼 200만원 들크라라 원. 혼 7년 이시믄 싸게 해진다고 골으난 나가 그때까지 살아지믄 그때 바꾸쿠댄 햇주. 의사도 웃어라게."
"아니 불편하면 그걸 바꿔야지 참으면 됩니까? 뭐 못 드시믄 병 나."
"이게 요며칠 요기 아랫니가 닿으면 아판게. 겅허난 의사가 아래 잇몸에 뭐 이빨 같은 게 있다면서 톡 째멍 해난 하나도 안 아파. 틀니에 잇몸 닿는 데도 이, 요렇게 해주곡 허난 아깐 갔다왕 막 씹어 먹어젼."
"그래도 며칠 지나면 또 아플 수도 잇수다. 그땔랑 치과 가그네 틀니 새로 봐 보게. 참지말앙예?"
"어 기여 기여."
이젠 하나두 안 아프다고 힘 줘 말하는 것과는 달리 새로 틀니 보자고 하는 말에는 건성건성 대답을 하신다. 아무래도 200만원이라는 말에 마음이 덜컥 하신 게지. 이젠 50이 넘은 자식들도 한 둘이 아닌데 무슨 걱정이실까 싶으면서도 내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또 그 엄마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간다.
직업군인인 아빠를 따라 육지 생활을 하면서도 엄마는 일을 놓지 않았었다. 텅텅 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동네 사람들과 모내기는 기본이었다. 물론 나는 엄마의 모내기보다는 엄마가 챙겨오시는 하얀 크림이 가운데 들어간 보름달 빵을 먹는 재미가 더 좋긴 했었다.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에서는 아빠 부대 옆 누구네 고구마 밭인지는 몰라도 엄마는 부지런히 고구마 줄기 손질을 하시고 나는 원두막 위에 앉았다 누웠다, 조금 운이 좋으면 수박 한 덩이를 얻어먹는 지루함과 호사를 동시에 누리기도 했다. 장마철이 들기 전에는 옥수수를 수확해 와 와서는 깔끔하게 정리하시고 나는 그 옆에서 옥수수 껍질과 수염으로 인형 머리 땋듯 놀던 나른한 기억도 있다. 그도 아니면 우리 동네보다 조금 더 번화한 시내에 있던 아가씨 술집 무진장의 빨래며 아가씨들 밥을 챙겨주시는 일을 아르바이트처럼 하기도 했다. 그 무진장 언니들이 머물던, 쪽방이 쭉 이어진 뒷마당으로 엄마를 보러 갈때면 화투를 치다가 아는 척 하는 무진장 언니들을 마주볼 수 없는, 알 수 없는 미묘한 마음이 어색했던 그때 그 풍경.
그렇게 일 욕심 많던 엄마이기에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아쉬움이 너무 크셨다. 양파 작업과 당근 작업, 미깡 따기에 더 이상 삼춘들이 부르지 않기 시작할 때는 그 상심함에 병이 날 정도였다. 자식들이야 힘드신데 이제 쉬시라고, 오히려 잘 됐다고, 혹여라도 늙은 엄마 일 하는 거 말리지도 않는 자식들이라는 말을 듣지 않게 된 안도감에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엄마에게는 그때가 당신 스스로에 대한 쓸모를 잃은 것 같은 마음이 컸던 건 아닐까. 그렇게 일을 했으니 허리고 무릎이고 성한 곳이 있을 리 만무하다. 나에게는 따뜻한 어릴 적 기억이 엄마에게는 이렇게 굽고 휘고 삐거덕 대는 몸으로 남은 거구나.
컵 안에 다소곳이 담겨져 있는 엄마의 틀니, 연세가 들어가면서 건강 걱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7년 싯당 그때꼬지 나 살아지믄 그땔랑 바꾸쿠다.'하는 엄마의 말이 서늘하다. 7년, 아니 어쩌면 더 가까운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걸 왜 나는 미처 실감하지 못했을까? 엄마의 시간이 이렇게 구체적인 거리감으로 다가오니 마음이 또 덜컥이며 싸르르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