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자주 쓰겠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저 "간단한" 서평을 쓰는 데 시간이 정말 많이 걸렸다. 글을 짜내야 했기 때문이다. 『페스트』의 문체를 다루는 전반부까지는 글을 적어내는데 사흘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페스트』의 문학적 메시지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느라 머리를 쥐어싸매야만 했다. 그럼 왜 굳이 문학적 메시지를 담고자 하였는가? 그 이유는 유치하기 그지없다. 『페스트』라는 대작을 논하는데 단순히 문체만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내가 『페스트』를 읽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문체"였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조금 과장하자면 나는 문체 때문에 『페스트』를 읽은 셈이다. 어쨌든 나흘간의 고민 끝에 나는 포기를 선언했다. 글이 도저히 마음에 들게 뽑히지 않았지만, 차마 이 글을 깔끔히 폐기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내가 그 글을 다시 완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든 것은 몇 주 후였다. (그 몇 주간 꽤나 많은 일들과 미약한 깨달음들이 있었다. 그 깨달음은 향후 다른 글에서 쭉 풀어보겠다.) 친구와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데, 도무지 마음에 드는 책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무턱대고 소비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분명히 책을 원하고 있었다. 약 한 시간 동안 수십 권의 책들을 뒤적거리며 돌고 돈 끝에, 일본 책 좀 그만 읽으라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를 골랐다. (그 판단에는 아는 찻집 이름이 "산세라"인 점도 한몫했다.) 나는 왜 수많은 명서들의 구애를 왜 모조리 거절했을까. 집에 가는 내내 고민했고, 철학적인 생각을 달고 사는 나답게 그 고민은 머지않아 '왜 나는 책을 읽는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으로 발전했다.
너진똑이라고 독서 입문자들에게 꽤 괜찮은 유튜브 채널이 있다. 그가 제시한 문학을 읽어야하는 이유는 바로 문해력과 경험. 문해력은 자명하니 넘어가고, 경험인즉 책으로 말미암아 독자가 등장인물에게 이입해 사랑을 하고, 전쟁도 겪고, 죄책감에 파묻혀 봄으로써 수 십 년분의 경험을 축적함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소리다. 따라서 나도 간접경험을 의의로 삼고 독서를 해왔는데, 막상 『페스트』 서평을 써가며 뱉어낸 내 감상은 간접경험과 연관이 적었다. 즉, 내가 독서를 하는 데 있어 간접경험이란 사실 유의미한 요소가 아니였던 것이다. 그럼 무엇이 나를 문학의 세계에 묶어두고 있느냐... 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 중이지만, 단편적으로나마 추론해보자면 나는 책이라는 것을 매체보다는 예술로 취급하고 있는 듯하다. 보통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정보 전달이라는 책의 매체적 측면이라면, 나는 감상이라는 좀 더 비논리/비실용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소통이다. 육체는 우리를 구분해주지만 우리를 타인으로서 존재하길 강제한다. 내가 기쁨을 운운한들, 온 몸으로 퍼지는 야릇한 따뜻함이나 단전에서 솟아오르는 아련한 벅차오름을 상대는 결코 똑같이 느낄 수 없을뿐더러, 상대에게 상대만의 따뜻함과 벅차오름이 있을지언정 그것은 나에게 닿을 수 없기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사람마다 갖는 고유한 '느낌'들을 철학에서 감각질이라 일컫는다. 물론 이 감각질의 비보편성은 단순히 감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녹색이 상대에게는 적색일 수도 있고, 내가 분노라 칭하는 끓어오름이 누군가에게는 기쁨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소통을 위해 이런저런 상황에서 보편적으로 발생한다 믿어지는 감각질의 공통분모를 기쁨, 분노, 슬픔, 불안과 같은 단어로 어찌저찌 뭉뚱그린 채 살아간다.
나는 예술로 말미암아 이러한 모호함이 잠시 사그라들고 감각질의 전이, 즉 소통이 가능해진다 믿는다. 예술가가 작품과 상호작용하며 느꼈던 감성을 매우 흡사하게 수용가능하다는 뜻이다. 게르니카를 감상하면서 폭격 소식을 들은 피카소의 착잡함을 알 수 있고, 카뮈의 문체를 통해 그가 상상한 햇살의 뜨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술가라는 인격체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예로부터 나는 사람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경험을 매우 즐거워해왔다. 주객이 전도된 감이 있지만, 책을 읽지 않던 시절 내게 각각의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가 담긴 한 권의 책처럼 보였고, 그 사람의 가치관과 자아를 알아가는 경험을 책을 읽어낸다 고 표현했다. 하지만 마음의 문을 닫아놓는 것이 기본값인 시대에 원없이 사람을 탐독하는 것은 내 성격으로는 특히 불가능했기에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무의식에 파묻힌 채 갈증으로서 남아있었다. 그렇게 몇 년 후 나는 책을 집어들었고. 예기치 않게 그 갈증이 해소됨을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일차적으로 등장인물이라는 사람을 알아가고, 한 발 더 나아가 작가의 소설과 에세이까지 손을 뻗침으로써 작가라는 사람을 알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행위를 질릴 때까지 반복할 수 있다.
(서점으로 돌아와서) 그런 의미에서 일본 사소설은 나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등장인물과 작가가 사실상 동일인물이니 한 인물에 대해 더욱 깊이 파고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고심 끝에 『산시로』를 고른 거고. 재밌는 제목과 적당한 길이를 갖춘 사소설이었다.
결국 나는 인간을 알기 위해 문학을 읽는다. 하지만,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보통 문학이 다루는 개념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개체로서의 인간이다. 굳이 따지자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보다는 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더 끌린다고나 할까. 그것은 동시에 내가 요즘 문학으로부터 멀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한 달에 서너권의 책을 무리없이 읽어나갔던 그때에 비해 지금은 인간관계가 좁아져서인지 나라는 완벽한 타인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느끼고 있다. 다른 사람을 알려 할 필요 없이, 스스로의 재발견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즐겁다. 이 재발견에 대한 이야기도 역시 다음 글에...
여하튼 좌충우돌 어리둥절 배보다 배꼽이 큰 페스트 서평 시리즈는 이만 끝마치도록 하겠다. 페스트로부터 얻어간 건 카뮈가 전하고자 한 그의 사상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통찰. 그것도 그거대로 나쁘지 않지만 문학, 역시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